신라를 정벌함
겨울 10월 기해삭 신축(3일)에 화이진(和珥津;와니노츠)주 001에서 출발했다. 이때 풍신(風神)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海神)은 파도를 치게 하였다. 그리고 바닷속의 큰 고기들이 모두 떠올라 배를 떠받쳤다주 002. 순풍이 불어 범선이 파도를 타니 노를 젓는 수고로움 없이도 곧 신라에 이르렀다. 그때 배를 따라온 파도가 멀리 나라 안에까지 미쳤다. 이 일로 인해서 천신지기(天神地祇)가 모두 도와준 것을 알았다. 신라왕은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사람을 불러 모아 “신라의 건국 이래 바닷물이 나라 안까지 들어온 일은 아직 없었다. 천운이 다해 나라가 바다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군이 바다를 메우고, 깃발들이 햇빛에 빛나고, 북과 피리소리가 산천에 울렸다. 이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신라왕은 뜻밖의 군사들이 나타나 장차 신라를 멸망시키려 하는 것이라 여기고 두려워 전의를 상실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으니 동쪽에 신국(神國)이 있는데, 일본(日本)주 003
번역주 003)
이라고 한다. 또한 성왕(聖王)이 있는데 천황(天皇)주 004 『日本書紀』에는 倭와 日本이 혼용되어 나온다. 일본 국내 사료에서 대외적으로 日本이라는 국호을 정식으로 사용한 것이 확실한 기사는 『續日本紀』 大寶 2年(702) 乙酉條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당에 파견된 粟田朝臣眞人이 자신이 일본국의 사신이라고 주장하자, 당 황제는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질문하였다고 한다. 중국 측 사료의 경우는 『舊唐書』 卷6 則天皇后本紀 大足 2年(702) 기사와 同 卷199上 列傳 倭國條에서부터 나오고, 『삼국사기』에는 신라본기 문무왕 10년(670) 12월조에 日本이란 국호가 처음 보인다. 이러한 日本이란 국호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일찍이 推古天皇이 隋의 황제에게 보낸 國書에 있는 ‘日出處天子’(『隋書』 卷81 列傳 倭國條)를 근거로 日本은 중국의 동방에 있다는 의미로 推古朝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현재는 天武末에서 持統初에 걸쳐(7세기 말~8세기 초) 성립하여 지통천황 3년(689) 淨御原令에 의해 제도화된 후, 신라나 당나라에도 전해졌다고 하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편 최근 중국 학술잡지에서 보고된 백제인 禰軍(613~678) 묘지명에 새겨진 ‘日本’이라는 글자는 왜국의 정식 국호가 아니다. 여기서 ‘일본’은 자연지리적 특징에 따른 은유적 명칭으로 중국 쪽에서 볼 때 ‘해가 뜨는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때 ‘일본’이 백제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묘지명에서 실제 왜국은 海左, 瀛東 등으로 표기되었기 때문이다.
번역주 004)
이라고 한다. 반드시 그 나라의 신병(神兵)일 것이다. 어찌 군사를 내어 방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백기를 들어 항복하였다. 흰 줄을 목에 드리우고 두 손을 뒤로 묶고, 도적(圖籍)주 005을 바치고 왕선 앞에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머리를 조아리고 “지금 이후부터길이 천지와 함께 복종하여 사부(飼部;미마카이)주 006 倭王 또는 大王(熊本縣 江田船山古墳出土 大刀銘)에서 바뀐 고대 일본 군주의 칭호이다. 성립 시기는 먼저 推古朝의 法隆寺 「藥師如來像光背銘」과 孝德朝의 「元興寺塔露盤銘」에 ‘天皇’이 새겨진 것을 근거로 推古朝 즈음에 성립되었다는 견해와, 天武紀 이전의 『日本書紀』 기록은 물론 금석문 등에 보이는 천황호는 천무, 지통천황 이전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 현재는 1983년 飛鳥京유적에서 출토된 ‘皇子’, ‘大津皇’ 목간과 1997년 ‘天皇聚□弘寅□’이라고 적힌 飛鳥池 출토 목간을 근거로 日本 국호와 함께 7세기 말 천무조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번역주 006)
가 되겠습니다. 배의 키가 마를 사이 없이, 춘추로 말빗과 말채찍을 바치겠습니다. 또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꺼리지 않고 해마다 남녀의 조(調)주 007를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거듭 맹세하여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서쪽에서떠오르는 일이 없는 한, 또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주 008가 역류하고 강의 돌이 하늘에 올라가 별이 되는 일이 없는 한, 춘추로 조공을 거르거나 태만하여 말빗과 말채찍을 바치지 않는다면 천신지기여, 벌을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신라왕을 죽이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이에 황후가 “처음에 신의 가르침에 따라 장차 금은의 나라를 얻으려고 하였다. 또 3군에 호령하여‘스스로 항복하여 오는 자는 죽이지 말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 이미 재국(財國)을 얻었다. 또한 사람들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라고 말하고, 결박을 풀어 사부(飼部;미마카히)의 일을 맡겼다. 드디어 그 나라 안에 들어가 중보(重寶)의 곳간을 봉인하고 도적문서(圖籍文書)를 거두었다. 그리고 황후가 가지고 있던 창을 신라왕문에 세우고주 009, 후세에 표시로 삼았다. 그 창은 지금도 신라의 왕문 앞에 세워져 있다.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주 010 율령제하에서 말의 사육을 담당하는 곳을 말한다. 『令集解』 職員令 左馬寮條에 「頭一人. 掌左閑馬調習. 養飼. 供御乘具. 配給穀草. 及飼部戶口名籍事. 」라고 나온다. 신라가 왜국의 飼部가 되겠다는 것은 『古事記』 仲哀段에 신라왕이 ‘御馬甘’이 되겠다는 표현 및 『日本書紀』 웅략천황 8년 2월조에 신라인을 ‘典馬’로 삼았다는 표현과 함께 앞으로 일본에 복종하겠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한반도제국에서 말과 마구, 말의 사육법 등이 왜국에 전래된 사실과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이라는 전설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허구에 불과하다.
번역주 010)
은 즉시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주 011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제5대 婆娑尼師今이 보이는데 서기 80년에서 112년까지 재위하였다. 그런데 寐錦이란 용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는 보이지 않고 「廣開土王陵碑」, 「中原高句麗碑」, 「蔚珍鳳坪碑」, 「智證大師寂照塔碑」 등의 금석문에만 보인다. 寐錦에 대해서는 尼師今과 동의어라는 견해와 麻立干의 異表記란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中原高句麗碑」, 「蔚珍鳳坪碑」가 신라 마립간 시기에 세워진 것이 판명됨으로써 현재 寐錦을 麻立干으로 보는 데는 거의 이견이 없다. 이렇게 볼 때 『日本書紀』의 婆沙寐錦이란 표현은 맞지 않다.
번역주 011)
를 인질로 삼아 금은채색(金銀彩色) 및 능라겸견(綾羅縑絹)을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을 따라가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왕은 항상 배 80척의 조공선을 일본국에 바치게 되었는데주 012 이것이 그 연유이다. 이에 고구려(高麗)주 013와 백제 두 나라 왕은 신라가 도적(圖籍)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군세를 엿보게 하였다. 그리고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영외로 나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지금 이후부터는 길이 서번(西蕃)주 014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로써 내관가(內官家)주 015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한(三韓)주 016이다. 황후가 신라에서 돌아왔다. 『日本書紀』 신공황후 섭정 5년 3월조에는 微叱許智伐旱으로 나온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微叱己知波珍干岐는 신라 15대 奈勿王의 아들 未斯欣(?~433)으로 보이며, 『삼국유사』에는 美海·未叱喜라고 적고 있다. 微叱己는 未斯欣과 음이 통하는 동일인물이다. 波珍干岐는 신라 17관등 중 제4위에 해당하는 波珍飡이고, 知 혹은 智는 신라의 인명어미에 붙는 존칭적 의미이다. 未斯欣은 『삼국사기』에서는 402년, 『삼국유사』에서는 391년에 왜국에 파견되었다고 나온다. 본조에서는 波沙尼師今과 동시대의 인물로 기술되어 있는데, 양자의 생존 시기는 무려 3백여 년 정도가 차이가 난다.
- 번역주 001)
- 번역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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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3)
『日本書紀』에는 倭와 日本이 혼용되어 나온다. 일본 국내 사료에서 대외적으로 日本이라는 국호을 정식으로 사용한 것이 확실한 기사는 『續日本紀』 大寶 2年(702) 乙酉條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당에 파견된 粟田朝臣眞人이 자신이 일본국의 사신이라고 주장하자, 당 황제는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질문하였다고 한다. 중국 측 사료의 경우는 『舊唐書』 卷6 則天皇后本紀 大足 2年(702) 기사와 同 卷199上 列傳 倭國條에서부터 나오고, 『삼국사기』에는 신라본기 문무왕 10년(670) 12월조에 日本이란 국호가 처음 보인다. 이러한 日本이란 국호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일찍이 推古天皇이 隋의 황제에게 보낸 國書에 있는 ‘日出處天子’(『隋書』 卷81 列傳 倭國條)를 근거로 日本은 중국의 동방에 있다는 의미로 推古朝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현재는 天武末에서 持統初에 걸쳐(7세기 말~8세기 초) 성립하여 지통천황 3년(689) 淨御原令에 의해 제도화된 후, 신라나 당나라에도 전해졌다고 하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편 최근 중국 학술잡지에서 보고된 백제인 禰軍(613~678) 묘지명에 새겨진 ‘日本’이라는 글자는 왜국의 정식 국호가 아니다. 여기서 ‘일본’은 자연지리적 특징에 따른 은유적 명칭으로 중국 쪽에서 볼 때 ‘해가 뜨는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때 ‘일본’이 백제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묘지명에서 실제 왜국은 海左, 瀛東 등으로 표기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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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4)
倭王 또는 大王(熊本縣 江田船山古墳出土 大刀銘)에서 바뀐 고대 일본 군주의 칭호이다. 성립 시기는 먼저 推古朝의 法隆寺 「藥師如來像光背銘」과 孝德朝의 「元興寺塔露盤銘」에 ‘天皇’이 새겨진 것을 근거로 推古朝 즈음에 성립되었다는 견해와, 天武紀 이전의 『日本書紀』 기록은 물론 금석문 등에 보이는 천황호는 천무, 지통천황 이전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 현재는 1983년 飛鳥京유적에서 출토된 ‘皇子’, ‘大津皇’ 목간과 1997년 ‘天皇聚□弘寅□’이라고 적힌 飛鳥池 출토 목간을 근거로 日本 국호와 함께 7세기 말 천무조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 번역주 005)
- 번역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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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11)
『日本書紀』 신공황후 섭정 5년 3월조에는 微叱許智伐旱으로 나온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微叱己知波珍干岐는 신라 15대 奈勿王의 아들 未斯欣(?~433)으로 보이며, 『삼국유사』에는 美海·未叱喜라고 적고 있다. 微叱己는 未斯欣과 음이 통하는 동일인물이다. 波珍干岐는 신라 17관등 중 제4위에 해당하는 波珍飡이고, 知 혹은 智는 신라의 인명어미에 붙는 존칭적 의미이다. 未斯欣은 『삼국사기』에서는 402년, 『삼국유사』에서는 391년에 왜국에 파견되었다고 나온다. 본조에서는 波沙尼師今과 동시대의 인물로 기술되어 있는데, 양자의 생존 시기는 무려 3백여 년 정도가 차이가 난다.
- 번역주 012)
- 번역주 013)
- 번역주 014)
- 번역주 015)
- 번역주 016)
색인어
- 이름
- 파사매금, 미질기지
- 지명
- 화이진, 아리나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