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안산성(自安山城)[附적백송고성(赤柏松古城)], 나통산성(羅通山城)
통화(通化)지역은 혼강(渾江) 상류유역의 중심지이자, 부이강(富爾江) 상류에서 나고하(喇咕河)를 거쳐 집안(集安)지역으로 들어가고자 할 때 거쳐야 하는 요충지이다. 이 일대에는 고구려 초기의 것으로 여겨지는 돌무지무덤떼도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어, 일찍부터 고구려인들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통화지역에는 교통로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시설뿐 아니라 지역 지배와 관련이 깊은 통치거점이 세워졌다. 이와 관련하여 통화시 혼강변에 세워진 자안산성(自安山城)과 인근의 적백송고성(赤柏松古城)이 이 일대의 지방거점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이 일대에는 소형의 고구려성도 여럿 축조되었다. 부이강의 지류 삼과유수하(三棵楡樹河)의 의목수고성(依木樹古城)·남대고성(南臺古城)·태평구문고성(太平溝門古城)이나 나고하 유역의 영액포산성(英頟布山城) 등이 혼강 유역으로의 접근로를 봉쇄했던 것이다.
또한 통화는 고구려의 북변(北邊) 경영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었다. 고구려의 북변은 옛 부여(夫餘)의 땅이었다. 4세기 초, 늦어도 전연(前燕) 모용씨(慕容氏)의 부여 침입이 있던 346년에 앞서, 고구려는 부여의 원 중심지였던 현재 길림시(吉林市) 일대를 확보하였다. 기록에는 북부여(北夫餘)로 불리었던 지역이다. 당시의 왕도 국내성(집안)에서 북부여(길림 일대)까지는 통화에서 북상하여 휘발하 유역을 거쳐 북쪽으로 송화강(松花江)을 따라 나아갈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유하현(柳河縣)의 나통산(羅通山) 정상부의 높은 지대에 나통산성이 세워져 일대의 교통을 통제하였다.
이에 통화지역에는 교통로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시설뿐 아니라 지역 지배와 관련이 깊은 통치거점이 세워졌다. 이와 관련하여 통화시 혼강변에 세워진 자안산성(自安山城)과 인근의 적백송고성(赤柏松古城)이 이 일대의 지방거점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이 일대에는 소형의 고구려성도 여럿 축조되었다. 부이강의 지류 삼과유수하(三棵楡樹河)의 의목수고성(依木樹古城)·남대고성(南臺古城)·태평구문고성(太平溝門古城)이나 나고하 유역의 영액포산성(英頟布山城) 등이 혼강 유역으로의 접근로를 봉쇄했던 것이다.
또한 통화는 고구려의 북변(北邊) 경영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었다. 고구려의 북변은 옛 부여(夫餘)의 땅이었다. 4세기 초, 늦어도 전연(前燕) 모용씨(慕容氏)의 부여 침입이 있던 346년에 앞서, 고구려는 부여의 원 중심지였던 현재 길림시(吉林市) 일대를 확보하였다. 기록에는 북부여(北夫餘)로 불리었던 지역이다. 당시의 왕도 국내성(집안)에서 북부여(길림 일대)까지는 통화에서 북상하여 휘발하 유역을 거쳐 북쪽으로 송화강(松花江)을 따라 나아갈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유하현(柳河縣)의 나통산(羅通山) 정상부의 높은 지대에 나통산성이 세워져 일대의 교통을 통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