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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평양성

平壤箕城圖의 평양성 현황

平壤箕城圖의 평양성 현황

평양부의 鎭山은 부의 북쪽 5리에 있는 錦繡山인데, 금수산의 정상이 모란봉이 된다. 1600년대 이전에 보이는 內城은 본래 高麗 때 쌓은 재성으로 1397년(태조 6)에 개축한 바 있다. 내성은 대부분 석성으로 표시되었고, 그 상면에는 여장이 표시되었다. 그 후 1624년(인조 2)에 서남쪽을 줄이고, 개축하였다. 이로써 고려 때 쌓은 나성은 중성이 되고, 조선 후기에 쌓은 부성은 내성으로 부르게 되었다. 『輿地圖書』주 001
각주 001)
『輿地圖書』. 平安道. 平壤, 城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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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는 府城의 규모가 28,800척으로 5,760보라고 기록하고 있다.
내성에는 동남문인 대동문위치, 남문인 주작문위치, 서문인 정해문위치, 북문인 칠성문위치, 동북문인 장경문위치 등 5개의 성문과 대동문의 門樓인 相灝樓, 超然臺, 反求亭, 鍊光亭이 있다. 이 중 대동문의 문루는 2층 누각으로 되어 있고, 문 밖에는 반원형의 옹성이 둘러져 있다. 칠성문 양 측면에는 적대가 노출되어 있다. 이 밖에 북성으로 통하는 암문과 대동문 주변 동암문위치도 있다. 대동강으로 흘러나가는 동수구문과 성 안의 우수를 배출하는 수구가 표시되었다. 성벽에는 12개 이상의 치성이 존재하고, 성벽 상면에는 치성을 포함하여 23개 정도의 성랑시설이 확인된다.
그리고 성 안에는 上衙·二衙, 中營 建物, 武器庫와 倉庫 등이 배치되어 있다. 대동문 안쪽에는 대동역 관청건물도 관찰된다. 崇仁殿과 檀君祠와 東明王祠도 관찰된다.
중성은 내성 개축시 내성에서 분리되었다. 1732년(영조 8)에 토성을 증축하였다. 성벽은 『輿地圖書』에서는 14里이며, 舊城의 터라고 하고 있다. 성에는 북문인 경창문위치, 서문인 보통문위치, 남문인 정양문위치, 남동문인 함구문위치, 동문인 륙로문위치이 있다. 보통문은 2층 누각으로 되어있다. 보통문과 경창문에는 내성의 대동문과 같이 반원형의 옹성이 둘러져 있다. 중성 안에서 안산 북쪽을 통과하여 보통강에 흘러 들어가는 서수구문의 흔적이 표현되었다. 함구문 서쪽으로는 산지가 형성되는데, 2개의 수구와 암문이 관찰된다. 正陽門 안쪽에 仁賢書院이 그려져 있다. 이 서원은 명종 19년(1564)에 세워졌고, 선조 41년(1608)에 사액 받은 서원이다. 그리고 성안에는 日影池와 月影池 등 연못이 있다.
외성은 中城 남쪽에 위치하며, 이 곳에는 箕子井과 井田의 遺制가 남아 있다. 외성의 축성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新增東國輿地勝覽』 평양 성곽조에 주위 8,200척의 석축 부분과 10,205척의 토축 부분이 있고, 높이는 32척이었다고 한다. 이후 『여지도서』에는 둘레 10리 정도이다. 외성에는 북문인 선요문위치, 서문인 다경문위치, 남문인 거피문위치, 동문인 고리문위치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문의 형태 혹은 계단시설 일부만 기성도에 표현되었다. 그 중 거피문이 車門으로 명칭을 표현하였다. 성 서쪽에는 고려시대 양명포로 알려졌던 곳에 토축으로 된 원형의 성곽표시가 되어있다. 외성 안에서 외성 서문인 다경문을 통과하는 남수구문과 성벽 절단면을 통해 우수가 흘러내렸던 수구터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다.
외성 내측에는 箕子井과 기자조선 때의 도시계획을 보여주는 井田이라고 알려졌다. 기전도에 묘사된 9畝路는 중성의 정양문과 동남문인 함구문에서 외성 내의 중앙부를 동서로 연결되는 9무로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 길들은 남북으로는 거피문과 정양문, 함구문과 연결되며, 동서 방향으로는 고리문과 다경문과 연결되어 있다. 기성도에서는 경작지로 사용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북성은 내성의 동쪽에 금수산의 주봉인 모란봉을 정점으로 하여 평양성을 내려다보이는 북단에 숙종 40년(1714)에 監司 閔鎭遠이 쌓았다. 『輿地圖書』에서는 둘레가 1,318보로 기록되어 있다. 북성에는 북문인 현무문위치, 남문인 전금문위치이 있고, 門樓인 浮碧樓와 乙密臺가 있다. 모란봉 동북쪽으로 성벽을 길게 빼어 성벽이 축조된 곳이 있다. 기성도에서는 牛馬城으로 표시되었다. 이 우마성은 甬道로 보이며, 대몽항쟁기 성곽에서는 주요 접근로 혹은 통행로를 바라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攻擊的인 효과를 위한 것이기 보다는 望臺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병자호란 이후 광주 남한산성에는 이러한 용도와 비슷한 5개의 옹성이 설치되었다. 이 옹성들은 남한산성의 경우 병자호란 이후에 적의 화포공격에 대응할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평양성의 우마성도 남한산성의 경우와 같이 옹성으로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북성 안에는 고구려 동명왕 설화와 관련 있는 麒麟窟과 그 오른쪽에 文武井이 표시되었다. 산 중턱에 고구려 때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는 英明寺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며, 5층탑이 표시되었다. 오층탑은 八角五層石塔으로 고구려적 특징인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 각주 001)
    『輿地圖書』. 平安道. 平壤, 城池.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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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壤箕城圖의 평양성 현황 자료번호 : ispy.d_0004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