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고구려 벽화고분은 현재 106기가 알려져 있다. 중국 요령성 무순에 1기, 요령성 환인에 1기, 길림성 집안에 29기(장천을 포함), 북한의 평양과 그 주위에 74기가 있다. 집안은 고구려의 제2차 왕도였고, 평양은 제3차 왕도였기 때문에 이곳에 고분이 집중되어 있다. 환인은 제1차 왕도였으나 벽화고분은 왕도가 이동한 후에 조영되었다. 1945년 이전에 발견·조사된 벽화고분은 집안에 29기, 평양과 그 주변에 19기가 있다.
주 001당시의 조사에 관계된 사람은 주로 일본인 연구자로서 세키노 다다스(關野貞),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 구리야마 슌이치(栗山俊一), 오바 쯔네키치(小場恒吉),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등의 이름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벽화고분은 봉토분으로, 지상에 흙을 쌓아 올린 높은 분구를 가지며, 그 중앙에 횡혈식 석실을 조영하였다. 봉토분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므로 일찍부터 도굴을 당해 부장품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1941년에 조사된 진파리 4호분의 내벽(內壁)에는 ‘咸通十一年庚寅三月七日’(870)이라는 명문이 있어,
주 002이 무렵 이미 석실의 입구가 열려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더욱이 1912년에 강서(江西) 지역의 우현리(遇賢里) 삼묘(三墓)를 세키노 다다스와 함께 조사한 야쓰이 세이이치는 소묘(小墓)가 이미 발해 시대 무렵에 발굴된 것처럼 보이고, 대묘(大墓)와 중묘(中墓)는 몇 번이고 발굴된 것 같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주 003다른 고분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 근대 발견 당시 이미 도굴의 흔적이 보이고 부장된 유물은 대부분 가져가 버린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고구려 벽화고분에 남겨져 있던 것은 석실과 벽화로, 이것을 대상으로 하는 고고학·미술사·건축사 분야의 관심이 높았고, 석실의 구조나 벽화 문양에 대한 연구가 행해져 왔다.
이러한 연구의 출발점에 있는 학자가 건축사를 전공한 세키노 다다스이다. 그는 1912년 9월에 처음으로 벽화고분을 발굴 조사하고, 그 성과를 1913년 1월 일본 고고학회의 예회(例會)에서「조선 강서의 고구려 시대 고분」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주 004세키노는 그 후의 조사를 포함하여 고구려 벽화고분을 “동양 최고의 회화라고 칭할만하고, 이러한 고분의 구조·수법과 함께 동양의 건축사·예술사상 최대의 광명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주 005세키노 다다스는 도쿄대학의 명령에 의해 1902년 처음으로 한반도에 건너가 고건축(古建築)을 조사하였다.
주 006통감부는 쓰마키 요리나카(妻木賴黃)의 추천에 의해 1909년 세키노 다다스를 위촉하여 한반도 전 국토의 고적 조사를 개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에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이 사업은 계승·강화되었다. 고구려 벽화고분의 조사도 1909년부터 시작된 한반도 전국토를 망라하는 고적 조사의 일환이었다.
통감부 탁지부(度支部)에서 총독부 내무부(內務部) 지방국(地方局) 제1과에 인계되어 행해진 고적 조사는 식민지 통치 중에 보존해야 할 고적의 목록을 작성하고, 그 수리 보존을 행정적으로 수행하였다. 여기서는 보존해야 할 고적을 선정함에 있어서 고적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그 평가를 위해 세키노 다다스가 중심이 된 고적 조사에서는 사진, 도면, 간단한 기술 등을 보고서로 작성하고 학술적인 의견을 첨가해 총독부에 제출하였다. 그와 동시에 세키노 다다스는 개인적으로 야장(필드카드)을 작성하였는데, 현지 조사한 벽화고분에 관한 관찰 내용을 상세히 기술한 스케치도 포함되어 있다.
주 007이 야장는 후에 벽화고분에 관한 논문의 자료가 되었다.
본고에서는 세키노 다다스가 조사한 고구려 벽화고분 발견 경위나 조사 내용, 보존 대책 등에 관해 지금까지 필자가 보고한 논문
주 008을 중심으로 전체 흐름을 살펴봄과 동시에 각 고분 야장의 기술과 스케치를 소개하였다. 야장의 기술에는 세키노 다다스의 논문에 보이지 않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스케치에는 부분 상세도도 있어서 이후 연구에 기초 자료가 될 것이다.
주 001당시의 조사에 관계된 사람은 주로 일본인 연구자로서 세키노 다다스(關野貞),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 구리야마 슌이치(栗山俊一), 오바 쯔네키치(小場恒吉),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등의 이름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벽화고분은 봉토분으로, 지상에 흙을 쌓아 올린 높은 분구를 가지며, 그 중앙에 횡혈식 석실을 조영하였다. 봉토분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므로 일찍부터 도굴을 당해 부장품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1941년에 조사된 진파리 4호분의 내벽(內壁)에는 ‘咸通十一年庚寅三月七日’(870)이라는 명문이 있어,
주 002이 무렵 이미 석실의 입구가 열려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더욱이 1912년에 강서(江西) 지역의 우현리(遇賢里) 삼묘(三墓)를 세키노 다다스와 함께 조사한 야쓰이 세이이치는 소묘(小墓)가 이미 발해 시대 무렵에 발굴된 것처럼 보이고, 대묘(大墓)와 중묘(中墓)는 몇 번이고 발굴된 것 같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주 003다른 고분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 근대 발견 당시 이미 도굴의 흔적이 보이고 부장된 유물은 대부분 가져가 버린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고구려 벽화고분에 남겨져 있던 것은 석실과 벽화로, 이것을 대상으로 하는 고고학·미술사·건축사 분야의 관심이 높았고, 석실의 구조나 벽화 문양에 대한 연구가 행해져 왔다.
이러한 연구의 출발점에 있는 학자가 건축사를 전공한 세키노 다다스이다. 그는 1912년 9월에 처음으로 벽화고분을 발굴 조사하고, 그 성과를 1913년 1월 일본 고고학회의 예회(例會)에서「조선 강서의 고구려 시대 고분」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주 004세키노는 그 후의 조사를 포함하여 고구려 벽화고분을 “동양 최고의 회화라고 칭할만하고, 이러한 고분의 구조·수법과 함께 동양의 건축사·예술사상 최대의 광명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주 005세키노 다다스는 도쿄대학의 명령에 의해 1902년 처음으로 한반도에 건너가 고건축(古建築)을 조사하였다.
주 006통감부는 쓰마키 요리나카(妻木賴黃)의 추천에 의해 1909년 세키노 다다스를 위촉하여 한반도 전 국토의 고적 조사를 개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에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이 사업은 계승·강화되었다. 고구려 벽화고분의 조사도 1909년부터 시작된 한반도 전국토를 망라하는 고적 조사의 일환이었다.
통감부 탁지부(度支部)에서 총독부 내무부(內務部) 지방국(地方局) 제1과에 인계되어 행해진 고적 조사는 식민지 통치 중에 보존해야 할 고적의 목록을 작성하고, 그 수리 보존을 행정적으로 수행하였다. 여기서는 보존해야 할 고적을 선정함에 있어서 고적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그 평가를 위해 세키노 다다스가 중심이 된 고적 조사에서는 사진, 도면, 간단한 기술 등을 보고서로 작성하고 학술적인 의견을 첨가해 총독부에 제출하였다. 그와 동시에 세키노 다다스는 개인적으로 야장(필드카드)을 작성하였는데, 현지 조사한 벽화고분에 관한 관찰 내용을 상세히 기술한 스케치도 포함되어 있다.
주 007이 야장는 후에 벽화고분에 관한 논문의 자료가 되었다.
본고에서는 세키노 다다스가 조사한 고구려 벽화고분 발견 경위나 조사 내용, 보존 대책 등에 관해 지금까지 필자가 보고한 논문
주 008을 중심으로 전체 흐름을 살펴봄과 동시에 각 고분 야장의 기술과 스케치를 소개하였다. 야장의 기술에는 세키노 다다스의 논문에 보이지 않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스케치에는 부분 상세도도 있어서 이후 연구에 기초 자료가 될 것이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