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취도(烏就屠)의 사망 후 소곤미의 계승을 설명
성미가 죽자주 001아들 자율미(雌栗靡)가 뒤를 이었다. 소곤미인 오취도가 사망하자 아들 부리(拊離)가 뒤를 이었으나 동생인 일이(日貳)에게 피살되었다. 한나라가 사신을 보내주 002
부리의 아들 안일(安日)을 소곤미로 세우니, 일이가 도망쳐 강거로 갔다.주 003
각주 003)
한나라가 기교(己校)주 004『漢書』 「陳湯傳」에는 ‘西域都護’ 段會宗이 ‘烏孫兵’에게 포위되어 서역의 여러 성곽과 돈황의 병력을 지원해 달라는 上書를 올렸고, 이에 대해서 丞相 王商과 大將軍 王鳳 등이 결론을 내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을 때, 陳湯이 烏孫兵의 취약함을 지적하면서 지원군을 보내지 않아도 烏孫軍이 스스로 포위를 풀고 돌아갈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에 대해서 余太山(2005 : 172)은 이 ‘烏孫兵’이 段會宗에 의해서 옹립된 安日의 군대 일리도 없고 또한 한나라와 관계가 좋았던 大昆彌 雌栗靡의 군대일 수도 없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 康居로 도망했던 日貳가 그 군대를 얻어서 段會宗을 공격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추정하였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段會宗이 ‘西域都護’로 있을 때가 아니라, 1차로 都護職을 마치고 돌아간 뒤 拊離 피살 후 혼란한 烏孫의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서 ‘使臣’으로 파견되었을 때 벌어진 일인 셈이다.
각주 004)
를 옮겨 고묵(姑墨)
주 005에 주둔시켜서주 006토벌할 기회를 엿보려고 하였다. 안일이 귀족인 고막닉(姑莫匿) 등 세 사람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반란을 일으켜 강거로] 도망케 하여 일이를 따르도록 한 뒤 그를 찔러서 살해하였다. 도호 염포(廉襃)
주 007는 고막닉 등에게 금 20근과 비단 300필을 하사하 였다.己校 : 『漢書』 「百官公卿表」에는 “戊己校尉는 元帝 初元元年(전48)에 두어졌다.”라는 기사가 있고, 『漢書』 「西域傳」에는 “元帝時에 이르러 戊己校尉를 復置하고 車師前王庭에 屯田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러나 『後漢書』 「西域傳」에는 “元帝가 다시 戊己二校尉를 두어 車師前王庭에 屯田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로써 戊己校尉라는 하나의 직책인가 아니면 戊校尉․己校尉라는 두 직책인가, 아니면 처음에는 하나였다가 나중에 둘로 나뉘었는가 등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漢書』의 戊己校尉도 실은 戊․己校尉로 읽어야 옳다는 입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으며, 특히 敦煌 懸泉漢簡에 따라서 初元元年 처음 설치될 때부터 戊․己 二職으로 分設되었으나 후일 一職으로 통합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李炳泉, 2002). 한편 余太山(2006 : 235)은 “元帝가 다시 戊己二校尉를 두었다.”는 『後漢書』 「西域傳」의 기사에 대해서 元帝는 初元元年(전48)에 戊己校尉․戊校尉․己校尉 등 모두 3명의 校尉를 두었고, 戊校尉․己校尉는 戊己校尉의 지휘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漢書』 「陳湯傳」에는 ‘西域都護’ 段會宗이 ‘烏孫兵’에게 포위되어 서역의 여러 성곽과 돈황의 병력을 지원해 달라는 上書를 올렸고, 이에 대해서 丞相 王商과 大將軍 王鳳 등이 결론을 내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을 때, 陳湯이 烏孫兵의 취약함을 지적하면서 지원군을 보내지 않아도 烏孫軍이 스스로 포위를 풀고 돌아갈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에 대해서 余太山(2005 : 172)은 이 ‘烏孫兵’이 段會宗에 의해서 옹립된 安日의 군대 일리도 없고 또한 한나라와 관계가 좋았던 大昆彌 雌栗靡의 군대일 수도 없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 康居로 도망했던 日貳가 그 군대를 얻어서 段會宗을 공격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추정하였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段會宗이 ‘西域都護’로 있을 때가 아니라, 1차로 都護職을 마치고 돌아간 뒤 拊離 피살 후 혼란한 烏孫의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서 ‘使臣’으로 파견되었을 때 벌어진 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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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4)
己校 : 『漢書』 「百官公卿表」에는 “戊己校尉는 元帝 初元元年(전48)에 두어졌다.”라는 기사가 있고, 『漢書』 「西域傳」에는 “元帝時에 이르러 戊己校尉를 復置하고 車師前王庭에 屯田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러나 『後漢書』 「西域傳」에는 “元帝가 다시 戊己二校尉를 두어 車師前王庭에 屯田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로써 戊己校尉라는 하나의 직책인가 아니면 戊校尉․己校尉라는 두 직책인가, 아니면 처음에는 하나였다가 나중에 둘로 나뉘었는가 등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漢書』의 戊己校尉도 실은 戊․己校尉로 읽어야 옳다는 입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으며, 특히 敦煌 懸泉漢簡에 따라서 初元元年 처음 설치될 때부터 戊․己 二職으로 分設되었으나 후일 一職으로 통합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李炳泉, 2002). 한편 余太山(2006 : 235)은 “元帝가 다시 戊己二校尉를 두었다.”는 『後漢書』 「西域傳」의 기사에 대해서 元帝는 初元元年(전48)에 戊己校尉․戊校尉․己校尉 등 모두 3명의 校尉를 두었고, 戊校尉․己校尉는 戊己校尉의 지휘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색인어
- 이름
- 성미, 자율미(雌栗靡), 오취도, 부리(拊離), 일이(日貳), 부리, 안일(安日), 일이, 안일, 고막닉(姑莫匿), 일이, 염포(廉襃), 고막닉
- 지명
- 한나라, 강거, 한나라, 고묵(姑墨), 강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