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차국(莎車國)에 대한 소개
사차국(莎車國).주 001도읍은 사차성(莎車城)이고, 장안에서 9,950리 떨어져 있다. 호수는 2,339, 인구는 16,373, 병사는 3,049명이다. 보국후·좌장·우장·좌기군·우기군·비서야군(備西夜君)주 002이 각각 1명씩 있고, 도위가 2명, 역장이 4명 있다. 동북으로 4,746리 가면 도호의 치소에 이르고, 서쪽으로 560리 가면 소륵에 이르며, 서남쪽으로 740리 가면 포리(蒲犁)에 이른다. 철산(鐵山)이 있고 청옥(靑玉)이 난다. 선제 때에 오손공주의 어린 아들 만년(萬年)이 있었는데, 사차왕이 그를 총애했다. 사차왕이 아들 없이 사망했는데, 죽을 당시 만년은 한나라에 있었다. 사차국 사람들이 스스로 한나라에 의탁할 생각을 갖고, 또 오손의 환심을 살 생각으로, [황제에게] 글을 올려 만년을 사차왕으로 해달라고 청원했다. 한나라가 이를 허락하여 사신 해충국(奚充國)으로 하여금 만년을 호송케 하였다. 만년이 즉위하자 처음부터 포악하여 국인들이 기뻐하지 않았다. 사차왕의 동생 호도징(呼屠徵)이 만년을 살해하고 아울러 한나라 사신도 죽인 뒤 스스로 왕이 되고, 여러 나라들과 맹약하여 한나라를 배신하였다. 위후(衛候) 풍봉세(馮奉世)가 대완의 손님을 호송하러 사신으로 갈 때, 그 기회를 이용하여 여러 나라의 군대를 동원하여 [호도징을] 격살하고, 그의 형제의 아들을 사차왕으로 대신 옹립하였다.주 003
각주 003)
풍봉세는 귀환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에 배수되었다. 그해는 원강(元康) 원년(전65)이었다.이 사건은 『漢書』 卷79 「馮奉世傳」에도 설명되어 있다. 즉 그가 大宛에 사신으로 떠나 伊脩城에 이르렀을 때, 莎車가 萬年과 漢使 奚充國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그때 莎車는 北道의 諸國이 모두 匈奴에게 복속했다고 선전하면서 南道를 공격하고 反漢聯盟을 도모하자 鄯善 以西의 지역이 모두 한나라와 두절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당시 西域都護 鄭吉은 北道의 일로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馮奉世는 南北道의 여러 도시에서 15,000명의 병사를 징발하여 莎車를 습격, 그 성곽을 함락시키자 莎車王은 自殺하고 그 머리를 長安으로 보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색인어
- 이름
- 선제, 만년(萬年), 만년, 만년, 해충국(奚充國), 만년, 만년, 호도징(呼屠徵), 만년, 풍봉세(馮奉世), 호도징, 풍봉세
- 지명
- 사차국(莎車國), 사차성(莎車城), 장안, 소륵, 포리(蒲犁), 한나라, 사차국, 한나라, 오손,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대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