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倭)의 위치와 특성
왜는 스스로 말하기를 태백(太伯)
주 001의 후예라고 한다. 풍속으로는 모두 문신을 한다.주 002
대방(帶方)
주 003
다시 바다 하나를 건너 천여 리를 가면, 미로국(未盧國) 주 008
각주 003)
으로부터 만이천 여리 떨어져 있는데, 대체로 회계(會稽)
주 004의 동쪽에 있으며, 서로 떨어진 바가 아주 멀다. 대방(帶方)에서 왜까지는 바다를 따라 물길로 가야하는데, 한국(韓國)
주 005을 거쳐, 때로는 동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7천여 리를 가서 비로소 바다 하나를 건넌다. 바다의 너비는 천여 리로, 한해(澣海)
주 006帶方: 後漢 建安 연간에 公孫康이 樂浪郡의 남부를 쪼개어 설치하였고, 유주에 속하였다. 치소는 帶方縣(북한 황해북도 鳳山土城 안)에 두었다. 帶水(북한 황해도의 재령강)로 인해 이름을 지었다. 관할 구역은 현재의 북한 황해남북도와 경기도 및 강원도 북부 지역에 상당한다. 西晉 建興 元年(313) 고구려의 점령으로 棘城(遼寧省 義縣 서남)에 교치하였다. 北魏 延和 元年(432)에 폐지하였다. 공손강의 대방군 설치로 인해 낙랑군에 속해 있던 삼한과 왜는 대방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야마타이의 히미꼬 또한 대방군을 통해 공손씨 정권에 내속하였다(西嶋定生, 2002: 186).
각주 006)
라고 하며, 일지국(一支國)
주 007에 이른다.瀚海: 지금의 對馬海峽에 해당한다. 다른 중국 고대의 여러 漢文典籍에 기재된 瀚海는 원래 北海(北極海), 바이칼湖 그리고 몽골사막의 서북부 등을 가리켰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瀚海는 고유명사로 보기보다는 일반명사로서 ‘큰 바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史記』에서는 곽거병이 흉노 정벌시에 도착한 북쪽 경계를 한해라고 한 것처럼, 중국이 알고 있는 세계의 동쪽 끝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森浩一, 1985: 109∼110). 그러나 이 글에서는 澣海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므로, ‘큰 바다’라고 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다시 바다 하나를 건너 천여 리를 가면, 미로국(未盧國) 주 008
각주 008)
이라고 한다. 다시 동남쪽으로 육지로 5백리를 가면, 이도국(伊都國)
주 009未盧國: 『三國志』에는 ‘末盧國’으로 되어 있으며, “又渡一海, 千餘里至末盧國, 有四千餘戶, 濱山海居, 草木茂盛, 行不見前人. 好捕魚鰒, 水無深淺, 皆沈没取之.”라고 하였다. ‘末盧’는 ‘마쯔로’, ‘마쯔라’ 등으로 읽을 수 있으며, 이전의 肥前 松浦郡(마쯔라군)으로서 지금의 名護屋(나고야) 혹은 唐津(카라쯔) 부근에 해당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古事記』에는 “梅豆羅(메즈라)” 혹은 “末羅(마쯔라)”로 기재되어 있고, 『日本書紀』에서는 “松浦(마쯔우라, 마쯔라)”라고 기재되어 있다(石原道博, 2005: 40∼41).
각주 009)
에 이른다. 다시 동남쪽으로 백리를 가면, 노국(奴國)
주 100伊都國: 현재의 福岡縣 糸島郡(이토시마군)의 深江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伊斗, 伊蘇, 伊覩라고 표기하기도 한다(末松保和, 1962: 23∼43 및 石原道博, 2005: 40∼41). 1974·1975년에 糸島郡 前原町 三雲 南小路에서 조사된 옹관묘에서는 前漢時代 銅鏡 22면, 비취곡옥 1개, 유리곡옥 12개, 유리제 목걸이 등이 발굴되었다. 인접한 옹관묘에서도 전한 동경 35면이 출토되어, 彌生時代와 古墳時代를 통틀어 가장 많은 동경이 발굴된 무덤이 되었다. 墓壙의 규모도 긴 변 5.2m, 짧은 변 4.2m로 彌生時代 분묘 최대 규모이다. 묘역 역시 폭 24m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옹관묘들이야말로 이도국의 국왕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森浩一, 1985: 202∼207).
각주 100)
에 이른다. 다시 동쪽으로 백리를 가면, 불미국(不彌國)
주 011에 이른다. 다시 남쪽으로 물길로 20일을 가면 투마국(投馬國)
주 012에 이른다. 다시 남쪽으로 물길로 10일, 육지로 1달주 013을 가면, 야마대국(邪馬臺國)
주 014奴國: 지금의 福岡縣 博多 부근으로 과거에 이곳은 이전의 儺縣 및 那津으로 불렸다(石原道博, 2005: 40∼41). 1784년에 北九州 博多灣 志賀島에서 발견된 金印 ‘漢委奴國王’의 나라이다. 이 奴國은 甕棺, 箱式石棺, 돌멘 등을 특징으로 하는 北九州 연안에 있던 諸國 聯盟體의 盟主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後漢書』의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라는 기사 속에 奴國이 보인다. 福岡平野 남쪽에 위치한 春日市 岡本의 통칭 須玖岡本 유적에서는 역시 前漢鏡 30면 전후, 동검, 동모, 동과, 유리제 곡옥, 유리제 관옥 등이 수습되었는데, 이 유적은 바로 奴國의 국왕묘급으로 생각된다(森浩一, 1985: 207∼208).
각주 014)
에 이르는데, 왜왕(倭王)이 거처하는 곳이다. 그 관직으로 이지마(伊支馬)주 015가 있고, 그 다음은 미마획지(彌馬獲支)주 016라 하고, 그 다음은 노왕제(奴往鞮)주 017라 부른다. 사람들은 벼주 018와 모시[苧麻]주 019를 재배하고 양잠을 하여 실을 잦는다. 생강, 계피, 귤, 산초, 차조기[蘇]주 101가 있다. 검은 꿩,주 021진주,주 022청옥주 023이 난다. 소처럼 생긴 짐승이 있는데, 산쥐[山鼠]라고 한다.주 024또한 큰 뱀이 있어 이 짐승을 잡아먹는다. 뱀의 껍질이 견고하여 자를 수 없으며, 그 위에 구멍이 있는데,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며, 때로는 빛을 내는데, 이곳을 쏘아 맞히면, 뱀이 곧 죽는다. 물산은 대체로 담이(儋耳)주 025邪馬臺國: 3세기 전반 일본열도에 있었던 나라로 伊都國 등의 여러 소국들을 통솔하였다고 한다. 여왕 卑彌呼가 주재하였던 나라로, 大和政權의 前身으로 보고 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九州說과 大和說이 현재까지도 대립하고 있으며, 이 나라가 九州에 있었다는 주장 내부에서도 日向이나 大隅 지역에 해당된다는 설과 薩摩나 豊前 지역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大和說에서도 瀨戶內海航行說과 東海(日本海) 航行說이 있다(末松保和, 1963: 23∼43; 石原道博, 1985: 41∼42, 55). 그리고 『後漢書』에서는 “其大倭王居邪馬臺國. 樂浪郡徼, 去其國萬二千里, 去其西北界拘邪韓國七千餘里(그 大倭王은 邪馬臺國에 거주하고 있다. 樂浪郡治에서 그 나라는 12,000리 떨어져 있고, 그 나라의 서북방에 있는 拘邪韓國에서는 7,000여 리 떨어져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각주 025)
·주애(朱崖)주 026儋耳: 옛 부족 이름. 둘이 있다. 하나는 북황에 있는데, 『呂氏春秋』 「任數」에 따르면, “북으로 儋耳를 품는다”라고 하였다. 『山海經』 「大荒北經」에서는, “儋耳의 國이 있는데, 성이 任씨이고 禺號의 자손으로 곡식을 먹고 산다. 北海의 모래섬 안에 신이 있다.”고 하였다. 郭璞은 주를 달기를, “그 사람들은 귀가 커서, 아래로 어깨 위까지 늘어뜨린다.”라고 하였다. 다른 하나는 현재의 海南島에 있었는데, 漢武帝 시에 이곳에 儋耳郡을 설치하였다. 『漢書』 「武帝本紀」에 대한 應劭의 주에 따르면, “儋耳라는 것은 種이 큰 귀를 가졌다는 것이다. 渠率 가운데 스스로 王이라 말하는 자들은 귀가 더욱 늘어져 있으며, 어깨 아래로 3촌이나 내려온다.”라고 하였다. 또 張晏은 주를 달아 말하기를, “儋耳라 이르는 것은 그 뺨에 쇠붙이 장식을 붙여서 위로 귀와 연결하여 잡는데, 나눈 것이 여러 갈래여서 모양이 닭의 창자와 흡사하며, 귀에 묶어서 아래로 늘어뜨린다.”라고 하였다. 담이는 그 곳의 사람들이 큰 귀고리를 한 까닭에 만들어진 말이며, 지금까지도 일부 黎族 부녀자들은 이러한 풍속을 유지하고 있다. 儋耳郡은 前漢 元封 元年(전110)에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儋耳縣(현재의 海南省 儋州市 西北의 南灘)에 두었다. 그 관할 지역은 현재 해남성의 해남도 서부 지역에 상당하였다. 始元 5년(전82)에 珠崖郡으로 편입되었다. 隋 大業 6년(610)에 주애군을 바꾸어 복치하였으며, 치소는 義倫縣(儋州市 서북 南灘. 수말에 현재의 儋州市 서북 中和鎭으로 옮김)에 두었다. 唐 武德 5년(622)에 고쳐서 儋州를 두었다.
각주 026)
와 같다.주 027이 땅은 온난하고, 풍속은 음란하지 않다. 남녀가 모두 상투를 드러낸다[露紒].주 028부귀한 자들은 금수(錦繡)나 잡채(雜采)로 모자를 만드는데.주 029朱崖: 곧 珠崖郡. 前漢 元鼎 6년(전111)에 설치하였고, 治所는 瞫都縣(海南省 琼山市 동남 30里)에 두었다. 『漢書』 「武帝紀」 注에, 應劭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두 郡(담이군과 주애군)은 大海 가운데 벼랑가에의 가에 있어서 眞珠가 나는 까닭에 朱崖라고 하였다.” 관할 지역은 지금의 해남도 동북부 지구에 상당한다. 初元 3년(전46)에 폐지하였다. 隋 大業 6년(610)에 다시 설치하였으며, 치소는 舍城縣(현재의 琼山市 동남)에 두었다. 唐 武德 4년(621)에 崖州로 개치하였다. 天寶 元年(742)에 이름을 珠崖郡으로 바꾸었고, 乾元 元年(758)에 崖州로 이름을 되돌렸다.
각주 029)
중국의 호공두(胡公頭)주 102와 닮았다. 음식을 먹고 마실 때는 변두(籩豆)주 031帽: 帽는 원래 冠 안에 쓰는 內冠을 말하는 것이지만, 일본에서는 冠과 帽가 분리되어 발달하지 않고 冠만 사용하였고, 또한 冠의 크기가 작고 천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帽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冠位라고 하여 관인이 쓰는 관모로 그 지위를 나타내는 관행이 있었다. 603년에 聖德太子가 제정한 12계 冠位를 시작으로, 647년(大化 3년)에는 7色 13階制를 정하였다. 관의 재료와 색깔에 따라, 織·繡·紫·錦·靑·黑을 각각 대소로 나누고 마지막에 建武라는 위계를 더하였다. 701년에 大寶律令의 시행과 더불어 位階制가 채택되면서 冠位는 폐지되고 官位制가 시행되기에 이른다(『國史大辭典』, 1993: 760∼761).
각주 031)
를 쓴다. 사람이 죽으면, 관주 032은 있으나 곽주 033은 없으며, 흙을 쌓아 무덤을 만든다.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모두 술을 좋아하고, 정세(正歲)주 034를 알지 못하며,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서, 대부분 80∼90세에 이르고, 혹은 100세에 이른다.주 035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어서, 귀한 자들은 4∼5명의 처를 두며, 천한 자라고 해도 2∼3명의 처를 둔다. 부인들은 음란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물건을 훔치지 않고, 쟁송(諍訟)이 적다. 만약 법을 어기면, 가벼운 경우는 그 처자를 몰수하고, 무거우면 그 종족을 멸한다.籩豆: 과일·건어 따위를 담는 데 쓰는 祭器인 籩과 고대 중국에서 음식물을 담는 데 사용한 받침대가 붙은 그릇인 豆를 말한다고 한다. 古代의 祭祀 및 宴會시에 항상 사용하는 두 종류의 예기를 지칭하며, 대나무로 만든 것을 籩이라 하였고, 나무로 만든 것은 豆라 하였다고 한다. 『漢書』 「地理志」 序에 “燕나라의 옛 땅에서는 시골 사람들이 식사에 籩豆를 사용한다.”는 말이 있다. 출토된 豆의 대부분은 靑銅製·陶製로서 제사음식을 담는 祭禮器라고 한다. 仰韶文化期까지 없었고 龍山文化期 이후에 비로소 나타나는데, 받침대에 透孔 장식이 있고 얄팍하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殷代의 두는 받침대가 굵고 그릇의 몸통 부분이 얕은 것이 많으며 활시위 모양의 무늬가 있다. 西周 시대에 들어오면 청동제가 출현하며, 평평한 몸통과 굵은 받침대 다리에 비늘무늬·구름무늬 등이 있다. 春秋時代 후기에는 뚜껑이 있는 청동제 두가 나타나는데, 몸통은 半球體에 가까우며 받침대 다리는 나팔 모양이고 손잡이가 있으며, 옆에 귀가 붙은 것도 많다. 이런 모양은 전국시대에 일반화하여 뚜껑이 있는 청동제 두를 모방한 도제의 두가 많이 나타난다. 이것은 盤豆라고 하는 것으로, 뚜껑이 없고 몸통이 얕으며 받침대 다리가 높다. 두는 漢代 이후에도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三國志』 「東夷傳」의 서문에서 東夷는 夷狄의 나라이기는 하지만, 희생을 올리는 俎나 豆와 같은 제기를 사용하는 의례가 남아있다고 하였다(『三國志』 卷30 「烏丸鮮卑東夷傳」: 840). 왜인조의 변두에 관한 기사도 東夷에는 箕子의 감화가 남아있다고 하는 전설적인 관념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여겨서 특별히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森浩一, 1985: 124).
- 각주 001)
-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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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帶方: 後漢 建安 연간에 公孫康이 樂浪郡의 남부를 쪼개어 설치하였고, 유주에 속하였다. 치소는 帶方縣(북한 황해북도 鳳山土城 안)에 두었다. 帶水(북한 황해도의 재령강)로 인해 이름을 지었다. 관할 구역은 현재의 북한 황해남북도와 경기도 및 강원도 북부 지역에 상당한다. 西晉 建興 元年(313) 고구려의 점령으로 棘城(遼寧省 義縣 서남)에 교치하였다. 北魏 延和 元年(432)에 폐지하였다. 공손강의 대방군 설치로 인해 낙랑군에 속해 있던 삼한과 왜는 대방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야마타이의 히미꼬 또한 대방군을 통해 공손씨 정권에 내속하였다(西嶋定生, 2002: 186).
- 각주 004)
-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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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6)
瀚海: 지금의 對馬海峽에 해당한다. 다른 중국 고대의 여러 漢文典籍에 기재된 瀚海는 원래 北海(北極海), 바이칼湖 그리고 몽골사막의 서북부 등을 가리켰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瀚海는 고유명사로 보기보다는 일반명사로서 ‘큰 바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史記』에서는 곽거병이 흉노 정벌시에 도착한 북쪽 경계를 한해라고 한 것처럼, 중국이 알고 있는 세계의 동쪽 끝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森浩一, 1985: 109∼110). 그러나 이 글에서는 澣海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므로, ‘큰 바다’라고 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 각주 007)
-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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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9)
伊都國: 현재의 福岡縣 糸島郡(이토시마군)의 深江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伊斗, 伊蘇, 伊覩라고 표기하기도 한다(末松保和, 1962: 23∼43 및 石原道博, 2005: 40∼41). 1974·1975년에 糸島郡 前原町 三雲 南小路에서 조사된 옹관묘에서는 前漢時代 銅鏡 22면, 비취곡옥 1개, 유리곡옥 12개, 유리제 목걸이 등이 발굴되었다. 인접한 옹관묘에서도 전한 동경 35면이 출토되어, 彌生時代와 古墳時代를 통틀어 가장 많은 동경이 발굴된 무덤이 되었다. 墓壙의 규모도 긴 변 5.2m, 짧은 변 4.2m로 彌生時代 분묘 최대 규모이다. 묘역 역시 폭 24m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옹관묘들이야말로 이도국의 국왕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森浩一, 1985: 20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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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00)
奴國: 지금의 福岡縣 博多 부근으로 과거에 이곳은 이전의 儺縣 및 那津으로 불렸다(石原道博, 2005: 40∼41). 1784년에 北九州 博多灣 志賀島에서 발견된 金印 ‘漢委奴國王’의 나라이다. 이 奴國은 甕棺, 箱式石棺, 돌멘 등을 특징으로 하는 北九州 연안에 있던 諸國 聯盟體의 盟主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後漢書』의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라는 기사 속에 奴國이 보인다. 福岡平野 남쪽에 위치한 春日市 岡本의 통칭 須玖岡本 유적에서는 역시 前漢鏡 30면 전후, 동검, 동모, 동과, 유리제 곡옥, 유리제 관옥 등이 수습되었는데, 이 유적은 바로 奴國의 국왕묘급으로 생각된다(森浩一, 1985: 207∼208).
- 각주 011)
- 각주 012)
- 각주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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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4)
邪馬臺國: 3세기 전반 일본열도에 있었던 나라로 伊都國 등의 여러 소국들을 통솔하였다고 한다. 여왕 卑彌呼가 주재하였던 나라로, 大和政權의 前身으로 보고 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九州說과 大和說이 현재까지도 대립하고 있으며, 이 나라가 九州에 있었다는 주장 내부에서도 日向이나 大隅 지역에 해당된다는 설과 薩摩나 豊前 지역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大和說에서도 瀨戶內海航行說과 東海(日本海) 航行說이 있다(末松保和, 1963: 23∼43; 石原道博, 1985: 41∼42, 55). 그리고 『後漢書』에서는 “其大倭王居邪馬臺國. 樂浪郡徼, 去其國萬二千里, 去其西北界拘邪韓國七千餘里(그 大倭王은 邪馬臺國에 거주하고 있다. 樂浪郡治에서 그 나라는 12,000리 떨어져 있고, 그 나라의 서북방에 있는 拘邪韓國에서는 7,000여 리 떨어져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 각주 015)
- 각주 016)
- 각주 017)
- 각주 018)
- 각주 019)
- 각주 101)
- 각주 021)
- 각주 022)
- 각주 023)
- 각주 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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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25)
儋耳: 옛 부족 이름. 둘이 있다. 하나는 북황에 있는데, 『呂氏春秋』 「任數」에 따르면, “북으로 儋耳를 품는다”라고 하였다. 『山海經』 「大荒北經」에서는, “儋耳의 國이 있는데, 성이 任씨이고 禺號의 자손으로 곡식을 먹고 산다. 北海의 모래섬 안에 신이 있다.”고 하였다. 郭璞은 주를 달기를, “그 사람들은 귀가 커서, 아래로 어깨 위까지 늘어뜨린다.”라고 하였다. 다른 하나는 현재의 海南島에 있었는데, 漢武帝 시에 이곳에 儋耳郡을 설치하였다. 『漢書』 「武帝本紀」에 대한 應劭의 주에 따르면, “儋耳라는 것은 種이 큰 귀를 가졌다는 것이다. 渠率 가운데 스스로 王이라 말하는 자들은 귀가 더욱 늘어져 있으며, 어깨 아래로 3촌이나 내려온다.”라고 하였다. 또 張晏은 주를 달아 말하기를, “儋耳라 이르는 것은 그 뺨에 쇠붙이 장식을 붙여서 위로 귀와 연결하여 잡는데, 나눈 것이 여러 갈래여서 모양이 닭의 창자와 흡사하며, 귀에 묶어서 아래로 늘어뜨린다.”라고 하였다. 담이는 그 곳의 사람들이 큰 귀고리를 한 까닭에 만들어진 말이며, 지금까지도 일부 黎族 부녀자들은 이러한 풍속을 유지하고 있다. 儋耳郡은 前漢 元封 元年(전110)에 설치되었으며, 治所는 儋耳縣(현재의 海南省 儋州市 西北의 南灘)에 두었다. 그 관할 지역은 현재 해남성의 해남도 서부 지역에 상당하였다. 始元 5년(전82)에 珠崖郡으로 편입되었다. 隋 大業 6년(610)에 주애군을 바꾸어 복치하였으며, 치소는 義倫縣(儋州市 서북 南灘. 수말에 현재의 儋州市 서북 中和鎭으로 옮김)에 두었다. 唐 武德 5년(622)에 고쳐서 儋州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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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26)
朱崖: 곧 珠崖郡. 前漢 元鼎 6년(전111)에 설치하였고, 治所는 瞫都縣(海南省 琼山市 동남 30里)에 두었다. 『漢書』 「武帝紀」 注에, 應劭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두 郡(담이군과 주애군)은 大海 가운데 벼랑가에의 가에 있어서 眞珠가 나는 까닭에 朱崖라고 하였다.” 관할 지역은 지금의 해남도 동북부 지구에 상당한다. 初元 3년(전46)에 폐지하였다. 隋 大業 6년(610)에 다시 설치하였으며, 치소는 舍城縣(현재의 琼山市 동남)에 두었다. 唐 武德 4년(621)에 崖州로 개치하였다. 天寶 元年(742)에 이름을 珠崖郡으로 바꾸었고, 乾元 元年(758)에 崖州로 이름을 되돌렸다.
- 각주 027)
- 각주 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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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29)
帽: 帽는 원래 冠 안에 쓰는 內冠을 말하는 것이지만, 일본에서는 冠과 帽가 분리되어 발달하지 않고 冠만 사용하였고, 또한 冠의 크기가 작고 천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帽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冠位라고 하여 관인이 쓰는 관모로 그 지위를 나타내는 관행이 있었다. 603년에 聖德太子가 제정한 12계 冠位를 시작으로, 647년(大化 3년)에는 7色 13階制를 정하였다. 관의 재료와 색깔에 따라, 織·繡·紫·錦·靑·黑을 각각 대소로 나누고 마지막에 建武라는 위계를 더하였다. 701년에 大寶律令의 시행과 더불어 位階制가 채택되면서 冠位는 폐지되고 官位制가 시행되기에 이른다(『國史大辭典』, 1993: 760∼761).
- 각주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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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31)
籩豆: 과일·건어 따위를 담는 데 쓰는 祭器인 籩과 고대 중국에서 음식물을 담는 데 사용한 받침대가 붙은 그릇인 豆를 말한다고 한다. 古代의 祭祀 및 宴會시에 항상 사용하는 두 종류의 예기를 지칭하며, 대나무로 만든 것을 籩이라 하였고, 나무로 만든 것은 豆라 하였다고 한다. 『漢書』 「地理志」 序에 “燕나라의 옛 땅에서는 시골 사람들이 식사에 籩豆를 사용한다.”는 말이 있다. 출토된 豆의 대부분은 靑銅製·陶製로서 제사음식을 담는 祭禮器라고 한다. 仰韶文化期까지 없었고 龍山文化期 이후에 비로소 나타나는데, 받침대에 透孔 장식이 있고 얄팍하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殷代의 두는 받침대가 굵고 그릇의 몸통 부분이 얕은 것이 많으며 활시위 모양의 무늬가 있다. 西周 시대에 들어오면 청동제가 출현하며, 평평한 몸통과 굵은 받침대 다리에 비늘무늬·구름무늬 등이 있다. 春秋時代 후기에는 뚜껑이 있는 청동제 두가 나타나는데, 몸통은 半球體에 가까우며 받침대 다리는 나팔 모양이고 손잡이가 있으며, 옆에 귀가 붙은 것도 많다. 이런 모양은 전국시대에 일반화하여 뚜껑이 있는 청동제 두를 모방한 도제의 두가 많이 나타난다. 이것은 盤豆라고 하는 것으로, 뚜껑이 없고 몸통이 얕으며 받침대 다리가 높다. 두는 漢代 이후에도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三國志』 「東夷傳」의 서문에서 東夷는 夷狄의 나라이기는 하지만, 희생을 올리는 俎나 豆와 같은 제기를 사용하는 의례가 남아있다고 하였다(『三國志』 卷30 「烏丸鮮卑東夷傳」: 840). 왜인조의 변두에 관한 기사도 東夷에는 箕子의 감화가 남아있다고 하는 전설적인 관념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여겨서 특별히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森浩一, 1985: 124).
- 각주 032)
- 각주 033)
- 각주 034)
- 각주 035)
색인어
- 지명
- 왜, 태백(太伯), 대방(帶方), 회계(會稽), 대방(帶方), 왜, 한국(韓國), 한해(澣海), 일지국(一支國), 미로국(未盧國), 이도국(伊都國), 노국(奴國), 불미국(不彌國), 투마국(投馬國), 야마대국(邪馬臺國),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