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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자치통감장편

고려의 조공이 빈번하여 비용이 많이 든다는 지항주(知杭州) 소식(蘇軾)의 상언

  • 날짜
    1089년 11월 (음)(元祐 4年(1089) 11月 甲午)
  • 출전
    卷431, 元祐 4年(1089) 11月 甲午
항주의 승려 정원(凈源)이라는 자는 예전부터 바닷가에 살며 상인과 교류하여 이익을 탐했고, 선박을 가진 상인이 고려에 가서 (그의) 명성을 높였다. 원풍 말년에 고려의 왕자 의천이 와서 조회하였기 때문에 (정원도) 와서 배례하였다. 이제 정원이 죽자 그 무리가 (정원의) 화상을 훔쳐서 선박을 가진 상인의 편에 주어 고려에 가서 알리게 하니, 의천이 또한 자신의 무리 수개(壽介) 등을 보내 상선 편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 제사가 끝나고는 이어서 국모가 금탑 두 기로 황제와 태황태후의 장수를 축원한다고 말하였다.
지항주(知杭州) 소식(蘇軾)이 받지 않고 갖추어 말하기를, “희녕(熙寧) 연간이래 고려가 여러 차례 들어와 조공하여 원풍(元豐) 말에 이르기까지 6, 70년 사이에 객관의 접대와 사여하는 비용을 이루 셀 수 없습니다. 양절(兩浙), 회남(淮南), 경동(京東)의 3로 지방은 성을 쌓고 배를 만들며 사신이 머물 객관을 세우고 농민과 공인(工人)을 징발하고 상인을 해쳐 (객관이) 있는 곳마다 소란스러우니 공사가 모두 병들 지경입니다. 조정은 털끝만한 이익도 없으나 먼 곳의 오랑캐는 헤아릴 수 없는 이익을 얻습니다. 사신이 가는 곳마다 산천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며 서적을 구입합니다. 여론은 (고려가) 사여받은 것의 태반을 거란에 돌려준다고 여기나, 비록 그 허실을 밝힐 수는 없지만 거란의 강함은 충분히 고려의 화복을 결정할 만하니 만약 몰래 서로 계책을 맺지 않았다면 고려가 어찌 감히 공공연히 (송에) 입조하였겠습니까? 중국의 양식있는 사대부가 깊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두 황제께서 차례로 제위를 이은 이래로 고려가 몇 년째 오지 않아 회, 절, 경동의 관리와 백성이 잠시나마 숨을 돌려 기뻐하고 있는데, 오직 복건(福建) 1로만은 해상(海商)을 업으로 삼은 이가 많아 그 사이에 흉험한 사람이 오히려 왕래하며 달라붙어 많은 이익을 바라고 있습니다. 신이 조금 그 일에 대해 들어서 바야흐로 사람을 보내 가서 살피고자 하며, 그리고 수개(壽介) 등은 실로 천주 상인 서전(徐戩)의 배를 얻어 타고서 여기에 온 것입니다. 또 고려는 오랫동안 입공하지 않아 사여해주는 많은 이익을 잃었으니, 저들의 뜻은 내조를 오래하고자 할 것이고 조정이 대우하는 것이 후하거나 박한 이유를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에 사망한 승려를 제사지내고 축수의 예를 행한다고 하고서 예의는 매우 조악하니 도리어 볼만 합니다. 만약 저들의 요청을 받고서 답하지 않으면 먼 곳의 오랑캐가 원망하거나 화를 낼지 모르며, 그대로 후히 사여하게 되면 바로 저들의 계략에 빠지는 것입니다. 신은 조정이 마땅히 사여하거나 맡지 말고서 주군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할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졸렬한 승려와 간사한 상인이 함부로 외부의 오랑캐를 불러 많은 이익을 요구하여 국가에 사단을 일으키는 것이 점점 늘어날 수 없게 하려면 마땅히 통렬하게 징벌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서를 내려 모두 따랐다.
얼마 후, 고려의 사신이 과연 다다르니 소식이 관례를 살펴서 사신이 다다르는 곳으로 오월(吳越) 등 7주는 모두 24,000여 민(緡)의 비용이 들었으나 민간의 비용은 이 수에 있지 않으니, 이에 모든 군으로 하여금 일을 헤아려서 덜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민간에서 교역의 이익을 얻으면서 백성을 침해하거나 소란스럽게 하는 폐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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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조공이 빈번하여 비용이 많이 든다는 지항주(知杭州) 소식(蘇軾)의 상언 자료번호 : jt.k_0006_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