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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방(夏方) 등이 일남 구진군에서의 반란을 잠재우니 다시 완서 공물을 헌상함

  • 국가
    남월(南越)
건강(建康) 원년(144, 後漢 沖帝)주 001
각주 001)
『後漢書』 권6 「孝順孝沖孝質帝紀」에 따르면 日南의 蠻夷가 반란을 일으키고 夏方이 이를 토벌한 것은 建康 원년 겨울 10월의 일로 되어있다. 順帝 19년(144) 여름 4월 황자인 ‘炳’을 황태자로 세우면서 建康으로 개원하고 4달 만인 가을 8월에 順帝는 붕어한다. 어린 황태자가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충제인데, 선황이 붕어하고 난 직후이므로 改元하지 못하고 선황의 연호인 建康을 그대로 답습하여 쓴 것이다. 따라서, 日南夷의 반란과 평정은 시기상으로는 順帝 建康연간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沖帝 즉위 이후에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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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남의 만이 천여 인이 다시 현읍(縣邑)을 공격하여 불지르고, 끝내는 구진군까지 선동하여 서로 결탁하였다. 교지자사 구강인(九江人) 하방(夏方)이 은혜를 베풀고 회유하니 적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이때 양태후(梁太后) 주 002
각주 002)
梁太后: 順帝가 붕어했을 때 황태자의 나이가 겨우 2살이었으므로 순제의 황후가 황태후가 되어 섭정을 하게 된 것이다. 『後漢書』 권10하 황후기 제10하에 따르면 順帝의 妃로서 永建 3년(순제 3년, 128) 입궁하여 貴人이 되었고, 陽嘉 원년(132) 황후로 책봉되었다. 순제가 붕어하자 나이 어린 충제를 대신하여 정사를 보았는데, 冲帝마저 일찍 붕어하자 質帝를 세우고 전과 같이 섭정을 계속하였다. 당시 양주와 서주에서 도적떼가 들끓고 서강, 선비, 일남의 만이가 변경을 침략하자 청렴하고 강직한 관리들을 등용하는 한편, 부패한 관리들을 척결하여 조정의 기강을 일신하니 천하가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오빠인 대장군 梁冀가 질제를 시해하고 충직한 관리들을 모략하니 마침내 그의 꾀임에 빠져 桓帝를 세우고 그들을 숙청하였다. 또한 환관을 총해하여 천하의 인심을 잃게 되었다. 和平 원년(환제 4년, 150) 정권을 황제에게 반납하고 얼마 있다가 병으로 서거하였는데, 당시 45세였고 황후, 황태후의 자리에 19년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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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정사를 돌보고 있었는데, 하방의 공을 칭찬하여 계양(桂陽) 태수로 바꿔 주었다.주 003
각주 003)
『後漢書』 이 부분의 기록은 약간의 착오가 있다. 交趾刺史 夏方이 공이 있어 梁太后가 桂陽太守로 전임시켰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延熹 3년에 夏方을 交趾刺史로 임명한 것을 보면, 夏方이 원래 交趾刺史였다는 기록은 착오인 것으로 보인다. 日南의 蠻夷가 縣邑을 공격하자 夏方이 잘 회유하여 적이 항복하였다는 것을 보면, 당시 夏方의 관위는 縣令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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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제(桓帝) 영수(永壽) 3년(157) 거풍령(居風令)이 탐욕스럽고 포악하기가 도를 넘어, 현인(縣人) 주달(朱達)이 만이와 서로 모여 현령을 공격하여 살해하니, 무리들이 4,5천에 이르고, 계속해서 구진군을 공격하여, 구진 태수 아식(兒式)이 전사하였다.주 004
각주 004)
『後漢書』 권7 「孝桓帝紀」에 따르면 九眞郡의 반란은 永壽 3년 여름 4월의 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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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를 내려 60만 전을 사여하고 아들 두 명을 랑(郞)으로 배수하였다. 구진도위 위랑(魏朗) 주 005
각주 005)
魏朗: 『後漢書』 권67 「黨錮列傳」에 따르면 魏朗은 會稽 출신으로 어려서 현의 관리가 되었는데, 형이 마을 사람에 의해 살해당하자 원수를 사사로이 죽인 일로 망명생활을 하였다. 春秋圖緯를 익혔고 太學에서는 五經을 익혔는데, 당시 淸議파의 우두머리인 李膺의 무리들이 그를 따랐다. 처음에 司徒府의 속관이 되었다가 彭城縣의 縣令이 되었다. 당시 고관의 자제들이 군국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온갖 불법을 자행하였는데, 魏朗이 이 사실을 적극 고발하여 고관들의 미움을 샀다. 그리하여 그를 해하려고 하던 중 마침 九眞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모두가 그를 추천하여 九眞都尉를 삼았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는 관리와 군대를 적극 격려하여 적을 쳐부수고 승리를 거두었다. 桓帝가 그의 공로를 가상하게 여겨 議郞을 삼았으며 나중에 尙書가 되었다. 지방으로 나와서는 河內太守가 되었는데, 그의 정치가 河內, 河東, 河南에서 으뜸이었다. 중앙으로 다시 들어와 상서가 되었다가 黨議가 일어나자 면직당하고 낙향하였다. 성품이 근엄하여 집안을 조용히 하고 가지런히 법도를 지켜 집안사람들조차도 그의 나태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나중에 淸議派의 영수인 竇武가 宦官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자 그도 청의파라는 이유로 소환되었는데 소환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저서가 여러 편이 있는데 『魏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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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내 토벌하여 2천여 명을 참수하였으나, 우두머리는 여전히 일남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그 무리는 점점 강성해졌다. 연희(延熹) 3년(160) 조를 내려 하방을 다시 교지자사로 배수하였다. 하방의 위엄과 은혜가 본래 유명하였기 때문에 일남의 오래 된 적들이 이를 듣고 2만여 명이 계속 하방에게 와서 항복하였다.주 006
각주 006)
『後漢書』 「桓帝紀」에 따르면 永壽 3년 겨울 11월 日南의 蠻夷가 무리를 이끌고 군에 와서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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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제(靈帝) 건녕(建寧) 3년(170) 울림(鬱林) 태수 곡영(谷永)이 은혜와 신뢰로 오호인(烏滸人) 10여 만 명을 불러들여 내속시켰는데,주 007
각주 007)
『後漢書』 권8 「孝靈帝紀」에 따르면 建寧 3년 겨울에 鬱林 烏滸人이 부속민을 이끌로 귀속한 것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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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관직을 주어 7현을 처음 설치하였다. 희평(熹平) 2년(173) 겨울 12월 일남 요외의 나라들이 중역을 거쳐 조공을 바쳤다. 광화(光和) 원년(178) 교지합포의 오호만이 반란을 일으켜 구진일남을 회유하니 합해서 수만 인이 되어 군현을 공격하여 장악하였다. 4년(181) 자사 주준(朱儁) 주 008
각주 008)
朱儁: 『後漢書』 권71 「朱儁傳」에 따르면 會稽 上虞 출신으로, 蘭陵令으로 있다가 交趾로 파견되었다. 당시 交趾에서 도적떼가 일어났는데, 지방관리는 이것을 금할 수 없었다. 게다가 교지의 역적인 梁龍 등 만여 명은 남해 태수 孔芝와 반란을 일으켜 군현들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光和 원년 그를 交阯刺史로 임명하여 사병과 징발할 만한 군사를 모집하게 하니 도합 5천여 명이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주의 경계에서 사태를 관망하면서 적의 허실을 염탐하고 한편으로는 위엄과 덕을 드러내니 적들이 동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틈을 타서 7군의 군대와 함께 이들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梁龍을 목베니 항복하는 자가 수만 명이었으며 10개월 만에 완전히 평정할 수 있었다. 이 공으로 都亭侯에 봉해지고 중앙으로 불려와 諫議大夫가 되었다. 뒤에 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의 명을 받아 군대를 모집하여 이들을 토벌하는 데 앞장서면서, 중앙정계의 주요인물로 성장하였다. 주로 豪族들의 연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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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들을 격파하였다.주 009
각주 009)
『後漢書』 「孝靈帝紀」에 따르면 光和 4년 봄 2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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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183) 일남 요외의 나라에서 다시 와서 공물을 봉헌하였다.주 010
각주 010)
『後漢書』 「孝靈帝紀」에 따르면 光和 6년(183) 정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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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後漢書』 권6 「孝順孝沖孝質帝紀」에 따르면 日南의 蠻夷가 반란을 일으키고 夏方이 이를 토벌한 것은 建康 원년 겨울 10월의 일로 되어있다. 順帝 19년(144) 여름 4월 황자인 ‘炳’을 황태자로 세우면서 建康으로 개원하고 4달 만인 가을 8월에 順帝는 붕어한다. 어린 황태자가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충제인데, 선황이 붕어하고 난 직후이므로 改元하지 못하고 선황의 연호인 建康을 그대로 답습하여 쓴 것이다. 따라서, 日南夷의 반란과 평정은 시기상으로는 順帝 建康연간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沖帝 즉위 이후에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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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梁太后: 順帝가 붕어했을 때 황태자의 나이가 겨우 2살이었으므로 순제의 황후가 황태후가 되어 섭정을 하게 된 것이다. 『後漢書』 권10하 황후기 제10하에 따르면 順帝의 妃로서 永建 3년(순제 3년, 128) 입궁하여 貴人이 되었고, 陽嘉 원년(132) 황후로 책봉되었다. 순제가 붕어하자 나이 어린 충제를 대신하여 정사를 보았는데, 冲帝마저 일찍 붕어하자 質帝를 세우고 전과 같이 섭정을 계속하였다. 당시 양주와 서주에서 도적떼가 들끓고 서강, 선비, 일남의 만이가 변경을 침략하자 청렴하고 강직한 관리들을 등용하는 한편, 부패한 관리들을 척결하여 조정의 기강을 일신하니 천하가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오빠인 대장군 梁冀가 질제를 시해하고 충직한 관리들을 모략하니 마침내 그의 꾀임에 빠져 桓帝를 세우고 그들을 숙청하였다. 또한 환관을 총해하여 천하의 인심을 잃게 되었다. 和平 원년(환제 4년, 150) 정권을 황제에게 반납하고 얼마 있다가 병으로 서거하였는데, 당시 45세였고 황후, 황태후의 자리에 19년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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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後漢書』 이 부분의 기록은 약간의 착오가 있다. 交趾刺史 夏方이 공이 있어 梁太后가 桂陽太守로 전임시켰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延熹 3년에 夏方을 交趾刺史로 임명한 것을 보면, 夏方이 원래 交趾刺史였다는 기록은 착오인 것으로 보인다. 日南의 蠻夷가 縣邑을 공격하자 夏方이 잘 회유하여 적이 항복하였다는 것을 보면, 당시 夏方의 관위는 縣令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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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後漢書』 권7 「孝桓帝紀」에 따르면 九眞郡의 반란은 永壽 3년 여름 4월의 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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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魏朗: 『後漢書』 권67 「黨錮列傳」에 따르면 魏朗은 會稽 출신으로 어려서 현의 관리가 되었는데, 형이 마을 사람에 의해 살해당하자 원수를 사사로이 죽인 일로 망명생활을 하였다. 春秋圖緯를 익혔고 太學에서는 五經을 익혔는데, 당시 淸議파의 우두머리인 李膺의 무리들이 그를 따랐다. 처음에 司徒府의 속관이 되었다가 彭城縣의 縣令이 되었다. 당시 고관의 자제들이 군국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온갖 불법을 자행하였는데, 魏朗이 이 사실을 적극 고발하여 고관들의 미움을 샀다. 그리하여 그를 해하려고 하던 중 마침 九眞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모두가 그를 추천하여 九眞都尉를 삼았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는 관리와 군대를 적극 격려하여 적을 쳐부수고 승리를 거두었다. 桓帝가 그의 공로를 가상하게 여겨 議郞을 삼았으며 나중에 尙書가 되었다. 지방으로 나와서는 河內太守가 되었는데, 그의 정치가 河內, 河東, 河南에서 으뜸이었다. 중앙으로 다시 들어와 상서가 되었다가 黨議가 일어나자 면직당하고 낙향하였다. 성품이 근엄하여 집안을 조용히 하고 가지런히 법도를 지켜 집안사람들조차도 그의 나태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나중에 淸議派의 영수인 竇武가 宦官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자 그도 청의파라는 이유로 소환되었는데 소환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저서가 여러 편이 있는데 『魏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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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後漢書』 「桓帝紀」에 따르면 永壽 3년 겨울 11월 日南의 蠻夷가 무리를 이끌고 군에 와서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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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後漢書』 권8 「孝靈帝紀」에 따르면 建寧 3년 겨울에 鬱林 烏滸人이 부속민을 이끌로 귀속한 것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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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朱儁: 『後漢書』 권71 「朱儁傳」에 따르면 會稽 上虞 출신으로, 蘭陵令으로 있다가 交趾로 파견되었다. 당시 交趾에서 도적떼가 일어났는데, 지방관리는 이것을 금할 수 없었다. 게다가 교지의 역적인 梁龍 등 만여 명은 남해 태수 孔芝와 반란을 일으켜 군현들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光和 원년 그를 交阯刺史로 임명하여 사병과 징발할 만한 군사를 모집하게 하니 도합 5천여 명이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주의 경계에서 사태를 관망하면서 적의 허실을 염탐하고 한편으로는 위엄과 덕을 드러내니 적들이 동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틈을 타서 7군의 군대와 함께 이들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梁龍을 목베니 항복하는 자가 수만 명이었으며 10개월 만에 완전히 평정할 수 있었다. 이 공으로 都亭侯에 봉해지고 중앙으로 불려와 諫議大夫가 되었다. 뒤에 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의 명을 받아 군대를 모집하여 이들을 토벌하는 데 앞장서면서, 중앙정계의 주요인물로 성장하였다. 주로 豪族들의 연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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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後漢書』 「孝靈帝紀」에 따르면 光和 4년 봄 2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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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後漢書』 「孝靈帝紀」에 따르면 光和 6년(183) 정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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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沖帝, 하방(夏方), 양태후(梁太后), 하방, 환제(桓帝), 주달(朱達), 아식(兒式), 위랑(魏朗), 하방, 하방, 하방, 영제(靈帝), 곡영(谷永), 주준(朱儁)
지명
後漢, 일남, 구진군, 교지, 구진군, 일남, 일남, 일남, 교지, 합포, 구진, 일남, 일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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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방(夏方) 등이 일남 구진군에서의 반란을 잠재우니 다시 완서 공물을 헌상함 자료번호 : jo.k_0003_0116_0020_0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