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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열도의 불교수용

4. 일본열도의 불교수용

일본의 불교는 552년(혹은 538년이라는 설도 있음)에 백제를 통해서 처음 전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일본 킨메이[欽明] 천황위키백과 때에 백제의 성명왕(聖明王, 聖王을 가리킴)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한국사DB이 불상과 경전한국사DB을 보내면서 처음 불교에 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전래는 국가 차원의 상층부를 향한 공식적인 전래이고 민간에서는 불교가 이미 알려지고 신앙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渡來人)RISSRISS 즉 이주민들 중에 불교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6세기 후반 일본에는 고구려 출신 환속승려들의 존재가 사료에 나타나고 있다.
백제로부터 왕실에 불교가 전해졌지만 곧바로 공식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기존 토착신앙을 중시하는 일부 귀족들이 외부에서 전해진 불교에 대한 신앙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한반도 등에서 건너온 도래계(渡來系)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는 개인적 차원의 신앙만이 인정되었고,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에는 불교를 받아들인 때문이라며 법당과 불상을 파괴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점차 확대되어 갔다. 특히 한반도 출신의 이주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최고 귀족 소가(蘇我)씨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토착귀족들을 억압하고 왕권의 우월성을 확립하려 했던 왕실 역시 불교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587년 병석에 있던 요메이[用明] 천황고전적종합DB위키백과의 불교 귀의를 계기로 발생한 불교수용파와 배척파의 대립은 무력대결로 확대되었는데, 왕실과 결합한 소가씨가 반대파의 모노노베[物部]씨 등을 토벌함으로써 불교를 반대하는 세력은 사라지고 불교가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수용되게 되었다(587년고전적종합DB).
불교 공인 이후 왕실과 소가씨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동시에 이를 기초로 국가체제의 정비를 추진하였다. 소가씨는 자신의 근거지인 아스카에 일본 최초의 정식 사찰 호코지[法興寺]한국사DB위키백과위치를 건립하였고, 불교 공인 직후 즉위한 스이코[推古] 천황위키백과고전적종합DB은 불법(佛法)을 흥륭하라는 왕명을 내리며 법흥사 건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594년고전적종합DB). 세 개의 금당과 사리를 봉안한 대형 목탑을 갖춘 법흥사의 건립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기술자들이 참여하였으며, 처음으로 이 사찰에 주석한국사DB하게 된 승려도 고구려와 백제에서 초빙된 혜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한국사DB와 혜총(慧聰)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사DB이었다. 요메이 천황의 아들이자 스이코[推古] 천황의 조카로서 왕실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던 쇼오토쿠[聖德] 태자위키백과고전적종합DB도 자신의 근거지에 사리탑을 갖춘 대형 사찰을 건립하였고[호류지(法隆寺)위키백과호류지위치의 전신], 스이코 천황을 이은 죠메이[舒明] 천황위키백과고전적종합DB은 새로운 궁전을 건축하면서 그 곁에 왕실 사찰인 구다라타이지[百濟大寺]위키백과한국사DB고전적종합DB위치를 건립하였다. 스이코 천황과 사이메이[齊明] 천황위키백과고전적종합DB은 자신의 궁궐 남쪽에 불교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을 의미하는 수미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불교사전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초기의 불교계는 고구려와 백제 출신 승려들의 지도하에 운영되었다. 고구려와 백제에서 다수의 승려들이 건너와 왕실과 도래계 씨족이 지은 사찰에 머무르며 불교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고, 왕실도 이들을 특별히 우대하였다. 624년 승려들을 총괄하는 승정(僧正)불교사전고전적종합DB, 승도(僧都) 등의 승관제도가 정비되었을 때 최초의 승정으로 임명된 사람은 602년 백제에서 건너 온 관륵(觀勒)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한국사DB고전적종합DB이었고, 다음 해 2대 승정에 임명된 인물은 그해에 고구려에서 온 혜관(慧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한국사DB고전적종합DB이었다. 하지만 점차 일본 승려들이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한반도 출신 승려들의 영향력은 축소되어 갔다. 특히 7세기초 이후 다수의 승려들이 중국 유학을 다녀오면서 이들이 불교계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초기 일본 승려의 대부분은 도래계 씨족 출신이었고, 이들은 한반도 출신 승려들로부터 기본적 소양을 익힌 후 중국 유학을 통해 독자적으로 불교교단을 운영해 갈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도래계 씨족 중심으로 신앙되던 불교가 도래계 씨족 이외의 일반인들에게까지 확대되는 데에는 쇼오토쿠 태자의 활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일찍부터 불교를 적극적으로 신앙하였던 태자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승려들의 지도를 받으며 불교교리를 깊이 있게 연구하였고, 이를 토대로 『유마경』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불교사전고려대장경지식베이스 『법화경』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불교사전고려대장경지식베이스 『승만경』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위키백과불교사전고려대장경지식베이스 등의 대승경전에 대해 강설하였다. 그가 일본 고대국가체제의 이념적 기반으로 제시한 〈헌법 17조〉위키백과고전적종합DB에도 불교사상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태자는 7세기 후반부터 법왕(法王) 혹은 성인(聖人)으로 일컬어지면서 일본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받들어졌고, 그가 신앙했던 불교도 일본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일본 국가체제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서 쇼오토쿠 태자에 대한 존숭이 심화되면서 불교도 일본 고대국가체제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의 활동에 대한 내용들 전부 혹은 일부에 대해 불교신앙을 고취하기 위해 후대 불교측에서 만들어낸 것이라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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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열도의 불교수용 자료번호 : edeah.d_0002_0020_003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