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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한원

견융이 맹렬히 변란을 일으켜, 반호의 공적을 펼칠 수 있었고, 황제의 딸을 시집보내, 이에 만방의 시작을 얽었다.

견융이 맹렬히 변란을 일으켜, 반호의 공적을 펼칠 수 있었고, 황제의 딸을 시집보내, 이에 만방의 시작을 얽었다.
범엽의 『후한서』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옛날 고신씨 때에 견융의 침입이 있었다. 황제가 그 침략의 난폭함을 걱정하여 그들을 정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천하에서 [인물을] 모집하고 구하여, 견융의 장수인 오장군의 머리를 가져올 수 있는 자에게 황금 1천 일과 읍 1만 가, 그리고 [황제의] 어린 딸을 처로 삼는 것을 현상으로 내걸었다. 이때 황제가 키우던 개가 있었는데, 그 털이 오색을 띠고 있어 이름을 반호라 하였다. 명령을 내린 후, 반호가 마침내 사람 머리를 물고 궐 아래에 이르렀다. 여러 신하들이 괴이하게 여기며 그것을 살펴보니 바로 오장군의 머리였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였으나, 반호에게 딸을 처로 삼게 할 수도 없고, 또한 봉작할 방법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면서도] 보답을 주고자 논의하였으나 마땅한 바를 알지 못했다. 딸이 그것을 듣고, 황제가 엄숙히 내린 명령은 신의를 어겨서는 안된다고 여기고, 이로 인하여 행할 것을 청하니, 황제가 마지못해 딸을 반호의 배필로 삼았다. 반호가 딸을 얻어 엎고서 달려가 남산의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거처하는 곳이 험준하여 인적이 이르지 못했다. 이에 딸은 옷을 벗어 버리고 복감주 001
각주 001)
李賢의 주석 이래로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覃聖敏의 壯族語 연구를 통해 ‘僕鑒’이 ‘동굴 속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됨이 밝혀졌다(동북아역사재단 편, 『後漢書 外國傳 譯註』 上, 2009, 51쪽, 주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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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상투를 하고 독력의 옷을 입었다주 002
각주 002)
동북아역사재단 편, 『後漢書 外國傳 譯註』 上, 2009, 51쪽, 각주 11)에서는 “동굴에서 사는 사람들이 하는 모양으로 머리를 묶고 어린애와 같은 (蠻夷의 짧은) 옷을 입었다”로 해석할 수 있으나, 언어학적 기원과 계승의 문제가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고 단어 역시 발음에 따른 추정에 의한 것이라 확정할 수 없다고 보고, 본문 해석은 “복감식으로 머리를 묶고 독력의 옷을 입었다”로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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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가 슬퍼하고 그리워하며 사신을 보내어 찾게 하였으나 번번이 비바람과 천둥과 어둠을 만나주 003
각주 003)
죽내본처럼 「辰」으로 교감하여 해석할 경우는 ‘날이 어두어지다’로, 길림본·탕천본·『後漢書』와 같이 「震」으로 교감하여 해석할 경우는 ‘천둥과 어두움’으로 해석하면 되므로 큰 차이는 없다. 여기에서는 ‘천둥과 어둠을 만나’로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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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가 나아가지 못하였다. 해가 지나 자[녀] 열둘을 낳았으니, 6남 6녀였다. 반호가 죽은 뒤, 곧 서로 남편과 아내가 되었다. [이들은] 나무껍질로 직조하고, 풀 열매로 염색하였다. 오색 의복을 좋아하며, 옷을 만들 때 모두 꼬리 형상이 있었다. 그 어미가 후에 돌아와 상황을 황제에게 아뢰니, 이내 여러 자[녀]들을 불러 맞이하도록 하였다. 의상은 화려하고 찬란하였으며, 언어는 의미가 통하지 않았다주 004
각주 004)
동북아역사재단 편, 『後漢書 外國傳 譯註』 上, 2009, 51쪽, 주 12)에서 ‘侏離’는 蠻夷 언어의 발음이 잘 구분되지 않아 알아듣기 힘든 것을 설명하는 의성어라 함. 이에 따라 ‘언어는 의미가 통하지 않았다’로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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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산골짜기를 좋아하였고, 평평하고 넓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황제가 그 뜻을 따라서 이름난 산과 넓은 늪지를 하사하였다. 그 후에 점점 뻗어나가 만이라 불렀다.”
 
• 참고
『後漢書』 卷86 南蠻西南夷列傳76 昔高辛氏有犬戎之寇 帝患其侵暴 而征伐不剋 乃訪募天下 有能得犬戎之將吳將軍頭者 購黃金千鎰 邑萬家 又妻以少女 時帝有畜狗 其毛五采 名曰槃瓠 下令之後 槃瓠遂銜人頭造闕下 羣臣怪而診之 乃吳將軍首也 帝大喜 而計槃瓠不可妻之以女 又無封爵之道 議欲有報而未知所宜 女聞之 以爲帝皇下令 不可違信 因請行 帝不得已 乃以女配槃瓠 槃瓠得女 負而走入南山 止石室中 所處險絕 人跡不至 於是女解去衣裳 爲僕鑒之結 著獨力之衣 帝悲思之 遣使尋求 輒遇風雨震晦 使者不得進 經三年 生子一十二人 六男六女 槃瓠死後 因自相夫妻 織績木皮 染以草實 好五色衣服 製裁皆有尾形 其母後歸 以狀白帝於是使迎致諸子 衣裳班蘭 語言侏離 好入山壑 不樂平曠 帝順其意 賜以名山廣澤 其後滋蔓 號曰蠻夷

  • 각주 001)
    李賢의 주석 이래로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覃聖敏의 壯族語 연구를 통해 ‘僕鑒’이 ‘동굴 속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됨이 밝혀졌다(동북아역사재단 편, 『後漢書 外國傳 譯註』 上, 2009, 51쪽, 주 11). 바로가기
  • 각주 002)
    동북아역사재단 편, 『後漢書 外國傳 譯註』 上, 2009, 51쪽, 각주 11)에서는 “동굴에서 사는 사람들이 하는 모양으로 머리를 묶고 어린애와 같은 (蠻夷의 짧은) 옷을 입었다”로 해석할 수 있으나, 언어학적 기원과 계승의 문제가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고 단어 역시 발음에 따른 추정에 의한 것이라 확정할 수 없다고 보고, 본문 해석은 “복감식으로 머리를 묶고 독력의 옷을 입었다”로 해석하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죽내본처럼 「辰」으로 교감하여 해석할 경우는 ‘날이 어두어지다’로, 길림본·탕천본·『後漢書』와 같이 「震」으로 교감하여 해석할 경우는 ‘천둥과 어두움’으로 해석하면 되므로 큰 차이는 없다. 여기에서는 ‘천둥과 어둠을 만나’로 해석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4)
    동북아역사재단 편, 『後漢書 外國傳 譯註』 上, 2009, 51쪽, 주 12)에서 ‘侏離’는 蠻夷 언어의 발음이 잘 구분되지 않아 알아듣기 힘든 것을 설명하는 의성어라 함. 이에 따라 ‘언어는 의미가 통하지 않았다’로 해석하였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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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융이 맹렬히 변란을 일으켜, 반호의 공적을 펼칠 수 있었고, 황제의 딸을 시집보내, 이에 만방의 시작을 얽었다. 자료번호 : hw.k_0002_01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