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속자치통감장편

사사로이 신라와 거래하는 경우 처벌한다는 황제의 비답(批答)

  • 날짜
    1078년 7월 (음)(元豐 元年(1078) 7月 庚子)
  • 출전
    卷290, 元豐 元年(1078) 7月 庚子
여공저(呂公著)주 001
각주 001)
呂公著 : 1018~1089. 북송의 관인. 북송 壽州(현재 安徽省 鳳臺) 사람으로 字는 晦叔이다. 呂夷簡의 셋째 아들이다. 慶曆 2年(1042)에 진사가 되었다. 歐陽修와 함께 공부한 사이이고, 왕안석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신종이 즉위하면서 翰林學士로 불러들였고, 知開封府와 御史中丞을 역임했다. 왕안석의 新法에 반대하다가 知潁州로 폄출되었다. 元豐 元年(1078)에 同知樞密院事에 발탁되었다가 元豐 5年(1082)에 서하에 대한 전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知定州로 폄출되었다. 철종이 즉위하면서 곧 재상의 반열에 올라 왕안석의 신법을 폐지했다.
닫기
가 대면하여 마땅히 관각(館閣)의 선발을 증가해야한다며 아뢰기를, “신이 듣기로, ‘훌륭한 많은 선비들 덕에 문왕(文王)이 평안하였다’라 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주(周)의 흥성은 토저(兔罝)주 002
각주 002)
兔罝 : 『詩經』에서 등장했던 용어로 武人을 지칭하거나 혹은 재야에 있는 賢人을 비유하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닫기
의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주요 간성(干城)의 임무를 감당할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지금 삼관(三館)·비각(秘閣)의 직임이 조정(朝廷)의 영광스러운 선발[華選]이나, 전대(前代) 이래로 장상(將相)·명신(名臣)이 많이 배출되어 그 사이에 얻은 사람들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신이 황우(皇祐)·지화(至和) 연간에 있을 때에는 관각의 관원을 모두 갖추어 당시에는 (저와) 같은 무리였다가 후에는 종종 통현(通顯)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근자에 비록 사람을 간간히 선발하였으나[簡拔]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그중에는 혹은 힘써 나아가는 자들[勞進者]은 모두 외방에 보임되고[外補] 조정에서 평소에 등용하기 어려워 완급한 일에는 반드시 사령(使令)이 부족하니 근자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는데 이르기까지는 잘 선발하기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옛 말씀에, ‘선비가 소양이 없으면 국가를 중하게 할 수 없다.’라 하였습니다. 일에 임함에 창졸간에 구하는 것은 조정을 중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천하에 인재가 부족한 적은 일찍이 없었고, 그것을 구하나 늦어져서 그 쓰임을 뒤늦게 깨달을 뿐입니다. 신이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여러 논의를 살펴 성견(聖見)을 내리시어, 훌륭한 선비와 뜻이 통하는 인재를 다시 얻고 관각의 선발을 점차 늘려 평소 충분히 관대하게 독력하여 일의 정도에 따라서 인재를 적절히 사용하심으로써 조정을 중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 각주 001)
    呂公著 : 1018~1089. 북송의 관인. 북송 壽州(현재 安徽省 鳳臺) 사람으로 字는 晦叔이다. 呂夷簡의 셋째 아들이다. 慶曆 2年(1042)에 진사가 되었다. 歐陽修와 함께 공부한 사이이고, 왕안석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신종이 즉위하면서 翰林學士로 불러들였고, 知開封府와 御史中丞을 역임했다. 왕안석의 新法에 반대하다가 知潁州로 폄출되었다. 元豐 元年(1078)에 同知樞密院事에 발탁되었다가 元豐 5年(1082)에 서하에 대한 전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知定州로 폄출되었다. 철종이 즉위하면서 곧 재상의 반열에 올라 왕안석의 신법을 폐지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兔罝 : 『詩經』에서 등장했던 용어로 武人을 지칭하거나 혹은 재야에 있는 賢人을 비유하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사사로이 신라와 거래하는 경우 처벌한다는 황제의 비답(批答) 자료번호 : jt.k_0005_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