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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사호(史戶; 후미히토베)

사호(史戶; 후미히토베)
 한성(漢城) 사람 한씨등덕(韓氏鄧德)의 후손이다.
 
【주석】
1. 사호(史戶)
사호의 씨명은 『일본서기』 웅략기(雄略紀) 2년(458) 10월조에 ‘치사호(置史戶)’라고 하여 사호의 설치 기사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유래한다.
『일본서기집해(日本書紀集解)』, 『일본서기통석(日本書紀通釋)』 에는 사호(史戶)와 사부(史部)를 같은 것으로 보고 조정의 사관(史官)으로 추정하지만, 먼저 호와 부는 서로 통용되지 않는다. 비조호(飛鳥戶)와 춘일호(春日戶)의 경우와 같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집단을 호로 편성하여 일정한 지역에 거주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지명을 사용하지 않은 점에서 이들 중에서 사관인 사부로 발탁하였을 수 있다. 사부는 사호를 자양(資養)하는 부민으로, 사호의 호(戶)는 도래인 집단을 호로서 파악한 것으로부터 유래한다. 『주서』백제전에는 호구의 작성, 징발 등 호적의 관리를 담당한 점구부(點口部)라는 관부가 존재하고 있었다. 백제에서 호구와 관련된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구수왕(仇首王) 9년(222)조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우두진에 들어가 민호를 약탈하였다”, 아신왕 8년(399)조에 “백성들이 전역에 시달려 신라로 많이 도망하니 호구가 줄었다”, 문주왕 2년(476)조에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한북(漢北)의 민호들을 이주시켰다” 등에서 ‘민호(民戶)’, ‘호구(戶口)’의 사례가 보인다.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 4년(543) 11월조에도 6세기 대 백제의 지방관으로서 군령(郡令), 성주(城主)의 관직이 확인되고 있어 주민 지배의 말단 조직인 호도 편재되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출토된 횡선으로 상하 4단으로 구분하여 인명을 묵서한 목간은 인력을 파악·관리한 형태이며 부여 궁남지에서 출토된 목간에도 ‘정(丁)’, ‘중구(中口)’, ‘소구(小口)’ 등의 문자가 확인되고 있어, 연령 구분에 의해 호구를 파악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천황의 시위(侍衛)와 궁중의 잡무를 담당하는 사인(舍人)은 천황이나 지명을 관칭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상기 하상사인부(河上舍人部)의 하상은 지명일 것이다. 하상(河上, 川上)이라는 지명은 대화(大和), 근강(近江), 월중(越中) 등 여러 곳에 있다.
2. 한성(漢城)
한성에 대해서는 백제의 한성인지 중국의 어느 지명에서 유래된 것인지 알 수 없다.
3. 한씨등덕(韓氏鄧德)
한씨등덕에 대해서는 기타의 사료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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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호(史戶; 후미히토베) 자료번호 : ss.k_0003_0010_0030_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