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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자치통감장편

거란의 공봉관(供奉官) 이신(李信)의 귀부(歸附)

  • 날짜
    1003년 7월 (음)(咸平 6年(1003) 7月 己酉)
  • 출전
    卷55 咸平 6年(1003) 7月 己酉
거란(요)의 공봉관(供奉官)주 001
각주 001)
供奉官 : 황제의 좌우에서 여러 임무를 담당하는 관료들을 가리키는 通稱이다. 唐代에는 侍中, 中書令, 散騎常侍, 黃門侍郎, 給事中, 起居郎 등을 통틀어 供奉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遼代에는 南面官의 門下省에 설치되어 東頭供奉班과 西頭供奉班 두 관서에 나누어 소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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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李信)주 002
각주 002)
李信 : 생몰년 미상. 거란(요)의 관인. 송에 귀부했다는 본문의 기록 외에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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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귀부했다. 이신이 그 나라 안의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거란(요) 군주의 아비 명기(明記)주 003
각주 003)
明記 : 거란(요) 경종의 이름이다. 경종의 小字인 明扆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경종 주해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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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호(號)가 경종(景宗)주 004
각주 004)
景宗 : 948∼982, 재위 969∼982. 거란(요)의 5대 황제. 이름은 耶律賢으로, 3대 황제 世宗 耶律阮의 차자이다. 969년에 4대 황제 목종 耶律璟이 피살되자 황제로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재위 중 적장자 계승 원칙을 세우고 등문고원을 두어 백성의 억울함을 풀도록 하였고, 관대한 형법을 시행하고, 漢人 관료를 중용하였다. 982년에 35세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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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황후 소씨(蕭氏)주 005
각주 005)
蕭氏 : 953∼1009, 거란(요)의 5대 황제 경종의 황후로, 이름은 蕭綽이며, 睿智皇后 혹은 承天皇太后로도 불린다. 경종 야율현과의 사이에서 6대 황제 聖宗 耶律隆绪를 포함해 3남을 낳았다. 특히 성종이 11세로 즉위하자 섭정을 하였고, 성종은 승천황태후라는 존호를 올렸다. 그녀는 송 태종의 북벌을 성공적으로 방어했고, 1004년에는 송 진종과 전연의 맹을 맺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녀의 섭정 시기 거란(요)은 최전성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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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협력(挾力)주 006
각주 006)
挾力 : ?∼970. 거란(요)의 관인. 承天皇太后인 睿智皇后의 아버지이다. 이름은 蕭思溫으로 거란(요) 태종의 딸과 혼인했다. 거란(요) 목종 시기에 南京留守가 되었고, 목종이 시해된 이후 경종을 옹립하는 데에 참여했다. 保寧 元年(969)에 北府宰相이 되었다. 이듬해에 경종과 함께 사냥을 갔다가 高勳과 蕭海只 등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여기에서 挾力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 지는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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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의 딸로 네 아들을 두었습니다. 장자는 이름이 융서(隆緒)주 007
각주 007)
隆緖 : 971∼1031, 재위 982∼1031. 거란(요)의 6대 황제로, 이름은 隆緖이다. 5대 황제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장남이다. 11세에 즉위하여 모친인 승천황태후가 섭정하였으며, 986, 987년에 정안국을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1004년에는 송과 전연의 맹을 맺었으며, 중앙아시아의 회홀 지역도 공략하였다. 특히 그의 재위 시기인 993, 1010, 1018년의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기도 하였으나, 고려를 복속시키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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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즉 거란(요) 군주이고, 둘째는 이름이 찬(贊)주 008
각주 008)
贊 : 973∼1016, 거란(요)의 황족. 5대 황제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2남으로, 이름은 耶律隆慶이고, 字는 燕隱이다. 8세에 恒王에 봉해졌고, 聖宗 統和 16年(998)에 梁王으로 진봉되고 南京留守가 되었다. 999, 1001년에 송을 공격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경종과 성종 시기에 侍中, 燕京管內處置使, 南京留守를 역임했고 政事令을 겸했으며 大元帥에 배수되기도 했다. 성종 開泰 元年(1012)에 秦晋國王에 봉해져 鐵券을 받고 守太師兼政事令이 더해졌다. 사망한 이후에 皇太弟로 추증되었다. 여기에서 이름을 贊이라고 부른 정확한 근거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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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양왕(梁王)주 009
각주 009)
梁王 : 경종의 2남인 耶律隆慶의 封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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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봉해지고 지금 31세이며, 셋째는 이름이 고칠(高七)주 010
각주 010)
高七 : 979∼1012, 거란(요)의 황족. 5대 황제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3남으로, 이름은 耶律隆祐 또는 隆裕라고 하며, 거란식 이름은 高七 또는 胡都堇이다. 경종 시기에 鄭王에 봉해졌으며, 聖宗 統和 16年(998)에 吳國王, 19年(1001)에는 楚國王으로 고쳐 봉해졌다. 특히 統和 28年(1010)에 성종이 고려를 親征하였을 때에는 수도를 留守하였다. 성종 開泰 元年(1012)에는 齊國王으로 봉해지고 東京遼陽府를 유수하다가 그해 8월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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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오왕(吳王)주 011
각주 011)
吳王 : 高七의 封號인데, 1003년의 시점에서는 초(국)왕이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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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봉해지고 25세이며, 넷째는 이름이 정가(鄭哥)주 012
각주 012)
鄭哥 : 거란(요)의 황족. 위 기록에서는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4남으로, 8개월 만에 죽었다고 되어 있지만 『遼史』에는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에는 3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경종에게는 藥師奴라는 이름의 넷째 아들이 있었지만, 누구의 소생인지는 알 수 없다는 기록이 보인다. 『遼史』에 藥師奴가 일찍 죽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鄭哥가 바로 藥師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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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8개월 만에 죽었습니다. 또한 세 딸을 두었습니다. 장녀는 연가(燕哥)주 013
각주 013)
燕哥 : 燕哥는 거란(요) 聖宗의 長女의 이름이다. 거란(요)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장녀의 이름은 『遼史』에 觀音女(975∼1045)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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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고 34세이고 소씨의 동생 북재상(北宰相)주 014
각주 014)
北宰相 : 거란(요)의 관직. 北府宰相의 약칭으로, 北宰相府의 長官이다. 遙輦氏 부락 연맹의 阻午可汗 시기에 설치되었다. 야율아보기가 거란국을 세운 이후에는 거란 등 유목 부족의 군대를 통제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太祖 4年(910)에 蕭敵魯가 北府宰相이 된 이후부터는 后族인 蕭氏에서 선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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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가(留住哥)주 015
각주 015)
留住哥 : 생몰년 미상. 거란(요)의 北府宰相이었다. 거란(요)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장녀인 觀音女가 蕭繼先에게 시집을 갔는데, 蕭繼先의 字는 楊隱이었고 小字가 留只哥였다. 留住哥는 곧 留只哥를 지칭하는 것이다. 觀音女와 혼인한 이후에 駙馬都尉에 배수되었고, 統和 4年(986)에 송과의 전쟁에서 공적이 많다고 하여 北府宰相에 임명되었다. 上京留守, 同政事門下平章事, 檢校太師兼中書令을 역임했다. 사망 했을 때의 나이는 58세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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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시집갔는데 (유주가는) 부마도위(駙馬都尉)주 016
각주 016)
駙馬都尉 : 駙馬를 가리키는 것이다. 前漢 武帝 시기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이때에는 近侍官의 한 종류였다. 魏晉 이후가 되면서 황제의 사위에게 주어지게 되었고, 實官은 아니었다. 거란(요)에서도 이 제도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金代에는 駙馬都尉를 正4品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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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임명되었습니다. 둘째는 장수노(長壽奴)주 017
각주 017)
長壽奴 : ?∼1017.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차녀이다. 『遼史』에는 長壽女로 기록되어 있다. 吳國公主에 봉해졌다가 統和 초기에 衛國公主로 進封되었고 이후에는 魏國長公主로 다시 봉해졌다. 蕭排押과 혼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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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고 29세이며 소씨의 조카 동경유수(東京留守)주 018
각주 018)
東京留守 : 거란(요)의 관직. 東京留守司를 관할하는 직함으로, 東京의 행정 사무를 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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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야(悖野)주 019
각주 019)
悖野 : ?∼1023. 거란(요)의 관인. 이는 거란(요)의 大臣인 蕭排押을 지칭하는 것이다. 字는 韓隱이고, 중국식 이름은 寧이었다. 統和 元年(983)에 左皮室詳穩이 되어 山西 지역의 땅을 탈환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 統和 7年(989)에 경종의 차녀와 혼인하여 駙馬都尉에 배수되었고, 同政事門下平章事의 직함이 더해졌다. 統和 13年(995)에는 北南院宣徽使를 역임했고, 統和 15年(997)에 北府宰相에 임명되었다. 고려를 정벌할 때에는 都統에 임명되어 開京에 침입했고, 이후 蘭陵郡王에 봉해졌다. 開泰 2年(1013)에는 知西南面招討使가 되었고, 開泰 5年(1016)에는 東平郡王으로 進封되었다. 開泰 7年(1018)에 다시 都統이 되어 고려를 침공했으나 패배하면서 免官되었다. 太平 3年(1023)에 西南面招討使가 되고 다시 豳王에 봉해졌다. 蕭排押은 東京留守가 되었던 적이 없었는데, 蕭排押의 동생인 蕭恒德(즉, 蕭遜寧)은 東京留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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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연수노(延壽奴)주 020
각주 020)
延壽奴 : ?∼996. 거란(요)의 황족.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3녀이다. 『遼史』에는 延壽女로 기록되어 있다. 越國公主에 봉해졌고, 사망 이후에 趙國公主로 追封되었다. 蕭排押의 동생인 蕭恒德과 혼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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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고 27세이고 패야의 동모제(同母弟) 긍두(肯頭)주 021
각주 021)
肯頭 : ?∼996. 거란(요)의 관인. 이는 蕭排押의 동생인 蕭恒德을 지칭하는 것이다. 字가 遜寧이어서 蕭遜寧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統和 元年(983)에 경종의 3녀와 혼인하여 駙馬都尉에 배수되었고, 南面林牙가 되었다가 곧 北面林牙가 되었다. 統和 10年(992)에 東京留守로서 병력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이듬해(993)에 고려가 화평을 청하자 거란(요) 聖宗의 명을 받들어 딸을 고려국왕에게 시집보냈다. 統和 12年(994)에는 兀惹部를 공격했다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功臣號가 삭제되었다. 승천황태후는 3녀 越國公主의 병을 걱정하여 宮人 賢釋을 보냈는데, 蕭恒德은 그녀와 私通했고 越國公主는 분노하여 사망했다. 이에 승천황태후는 蕭恒德을 賜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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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시집갔습니다. 연수노는 사냥을 나갔다가 사슴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소씨가 즉시 긍두를 교살하여 순장했습니다. 소씨는 누이가 둘 있습니다. 큰누이가 제왕(齊王)주 022
각주 022)
齊王 : ?∼972. 遼에는 많은 齊王이 존재하는데, 여기에서의 齊王은 거란(요) 太宗의 둘째아들인 耶律罨撒葛을 가리킨다. 耶律罨撒葛은 耶律撒葛이라 부르기도 한다. 太宗 會同 元年(938)에 太平王에 봉해졌다. 穆宗이 즉위하면서 그에게 국정을 맡겼는데, 난을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폄출되어 서북변으로 보내졌다. 景宗이 즉위한 이후 그를 소환하여 齊王에 봉하고 皇太叔의 존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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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시집갔는데 왕이 죽자 스스로 제비(齊妃)라 칭하고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서쪽 변방의 여구아하(驢駒兒河)주 023
각주 023)
驢駒兒河 : 강의 이름으로, 현재 몽골에 있는 케룰렌 강이다. 遼代에는 여기에 현재의 에르구네 강과 흑룡강 상류까지 포함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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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둔했습니다. 일찍이 말을 둘러보다가 번노(蕃奴) 달람아발(達覽阿鉢)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움을 보고 장막 안으로 불러들여 시중들게 했습니다. 소씨가 그 소식을 듣고 달람아발을 잡아매고 모래주머니로 400대 매질하여 그녀에게서 떨어지게 했습니다. 다음해 제비가 소씨에게 청하여 지아비로 삼기를 원한다고 하자 소씨가 허락하고 서쪽으로 달단(達靼)주 024
각주 024)
達靼 : 투르크어로 타타르(Tatar)라고 불렸던 민족으로 퀼 테긴 비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타타르는 여러 한문 사료에서 達怛, 韃靼, 塔坦, 塔塔, 達旦, 達達 등 다양한 표기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唐代 중기에 투르크 계통 부족의 泛稱이 室韋에서 達靼으로 변화하게 되면서 室韋를 達靼으로 칭하거나 室韋 계통이 아닌 부족들까지 達靼으로 칭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이에 達靼은 점점 북방 초원의 유목민족을 가리키는 泛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거란(요)에서는 몽골고원에 사는 達靼을 阻卜이라 칭하기도 했다. 達靼은 거란(요) 제국 내에서 비교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지만, 끊임없이 거란(요)에 대한 반항투쟁을 일으키면서 거란(요)의 서북 통치를 약화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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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방어하게 했는데 모두 항복하자 (제비는) 장수와 모의하여 그 무리가 골력찰국(骨歷扎國)주 025
각주 025)
骨歷扎國 : 『宋會要輯稿』에는 骨歷札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어떤 국가를 가리키는 것인지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遼의 서북변에 위치했던 阻卜 중의 한 국가(혹은 부족)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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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달아나 군사를 모아 소씨의 자리를 빼앗고자 했습니다. 소씨가 그 소식을 듣고 마침내 그 병력을 빼앗고 유주(幽州)주 026
각주 026)
幽州 : 거란(요)의 지명. 상고시대 “九州”의 하나로 현재 북경과 河北省 북부 및 遼寧省 일대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唐代에는 方鎭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는데, 先天 2年(713)에 幽州節度經略鎭守使가 설치되었고 그 치소가 幽州에 있었다. 위치는 현재 북경시 서남쪽이다. 天寶 元年(742)에는 范陽節度使로 이름을 고쳤다가 寶應 元年(762)에 다시 幽州로 바꾸었다. 당이 멸망한 이후에는 燕이라는 호칭을 쓰기 시작했다. 이른바 燕雲 16주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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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다스리라고 명했습니다. 작은누이는 조왕(趙王)주 027
각주 027)
趙王 : 10세기 후반에 거란(요)의 종실로서 趙王에 봉해진 적이 있었던 사람은 耶律喜隱이다. 保寧元年(969)에 宋王으로 改封되었다. 耶律喜隱은 거란(요) 太祖의 3남인 耶律李胡의 아들이다. 乾亨 3年(981)에 上京의 漢軍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耶律喜隱을 겁박하여 즉위시키려고 했지만 반란이 실패로 끝났고, 耶律喜隱은 이듬해(982)에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趙王이 耶律喜隱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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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시집갔는데 왕이 죽자 조비(趙妃)는 모임에서 소씨에게 독을 마시게 하려 했는데 노비가 그것을 발설하자 소씨는 그녀를 독살했습니다. 소씨는 현재 50세이고 경종이 죽었을 때부터 나랏일을 주관하고 스스로 태후라 칭했습니다. 나라 안에서 유주를 관할하는 한병(漢兵)은 신무(神武),주 028
각주 028)
神武 : 거란(요)의 군대 명칭이다. 侍位親軍 중의 한 부대로 漢軍에 속했다. 주로 京, 府, 州, 縣에 주둔했다. 左右神武軍이라 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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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控鶴),주 029
각주 029)
控鶴 : 거란(요)의 군대 명칭이다. 會同 元年(938)에 창설되어, 御前의 儀衛를 관할했다. 漢軍에 속한 禁衛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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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림(羽林),주 030
각주 030)
羽林 : 거란(요)의 군대 명칭이다. 侍位親軍 중의 한 부대로 漢軍에 속했다. 주로 京, 府, 州, 縣에 주둔했다. 左右羽林軍이라 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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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무(驍武)주 031
각주 031)
驍武 : 거란(요)의 군대 명칭이다. 『遼史』 등에는 이 군대와 관련된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續資治通鑑長編』 卷74 大中祥符 3年(1010) 10월 戊辰의 기사를 보면 “항상 경내에서 한인을 찾아 그 중 죄지은 자를 군대에 배속시키고 효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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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으로 불리는데 약 18,000여기로 장수에 임명되었고, 거란, 구여해(九女奚),주 032
각주 032)
九女奚 : 이름을 통해 추정하면 奚族의 한 지파였을 것으로 보인다. 『遼史』에는 九奚라는 용어가 보이는데, 이는 遙輦氏 연맹을 구성했던 아홉 부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金史』에는 九百奚라는 부족의 존재가 보인다. 거란(요)에 복속했던 奚族의 일파로 추정할 수 있을 뿐, 더 이상의 자세한 사항은 확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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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피실(南北皮室)주 033
각주 033)
南北皮室 : 거란(요)의 군대 중 하나로 皮室軍이 있었는데, 이는 左와 右로 나뉘어 있었다. 左皮室軍을 南皮室軍, 右皮室軍을 北皮室軍이라 부르기도 했다.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락에서 사람을 선발하여 御帳親軍을 두었고, 그 군대를 皮室이라 불렀다. 太宗은 전국의 정예병들을 선발하여 皮室 조직을 더욱 확충하여 그 수가 3만에 달했다. 대략 聖宗 이후가 되면, 皮室은 더 이상 行宮의 숙위를 맡지 않고 중앙에서 직할하는 기동부대가 되었으며 이후에는 거란(요)과 송의 경계에 배치되었다. 南北皮室 이외에 단일한 부락으로 皮室軍을 조직하기도 했는데, 그 예로 黃皮室軍과 敵烈皮室軍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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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당직사리(當直舍利),주 034
각주 034)
當直舍利 : 이름을 통해 추정하면 當直을 맡은 舍利로 볼 수 있다. 거란(요)에서 舍利는 일종의 尊號로 한자로는 郎君으로 번역되었다. 부족 연맹 시기에 이미 출현한 호칭이고, 귀족 자제들 중에 관직이 없는 사람에 대한 尊號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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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락사리(部落舍利),주 035
각주 035)
八部落舍利 : 이름을 통해 추정하면 8부락의 舍利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8부락은 거란(요)이 국가를 성립하기 이전의 연맹 시기부터 주축이 되었던 부족들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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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후(山後) 4진(鎭)주 036
각주 036)
山後四鎭 : 山後는 대략 지금의 太行山 북쪽과 燕山 북서쪽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山後四鎭은 거란(요)과 북송의 국경에서 가까운 곳에 설치된 거란(요)의 鎭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로 『遼史』에는 山後五州都管司라는 관청이 보이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5개의 주는 山西의 雲州, 應州, 朔州, 蔚州, 奉聖州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거란(요)과 북송이 맹약을 맺은 이후 山後五州都管司는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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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군은 약 108,000여기로 내부의 5,600은 항시 거란(요) 군주를 호위하고 나머지 93,950은 때에 따라 노략질을 하는 군대입니다. 그 국경은 유주에서 동쪽으로 550리 가면 평주(平州)주 037
각주 037)
平州 : 거란(요)의 지명. 北魏 天賜 4年(407)에 설치되었고, 唐 武德 초에 치소를 현재 河北 盧龍縣의 위치로 이동했다. 관할 영역은 현재 河北 陡河 동쪽과 장성 이남 지역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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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고 또 550리 가면 요양성(遼陽城)주 038
각주 038)
遼陽城 : 거란(요)의 지명. 거란(요) 시대에 설치된 遼陽縣으로, 遼陽府의 치소였다. 위치는 현재 중국 遼寧省 遼陽市의 老城에 해당된다. 거란(요) 시대 이후 금대에도 여전히 遼陽府의 치소였고, 원대가 되면 遼陽路의 치소가 되었다. 명대 초기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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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는데 즉 동경(東京)주 039
각주 039)
東京: 거란(요)의 지명. 거란(요)의 五京 가운데 하나이다. 거란(요) 天顯 13年(938)에 南京을 東京으로 개칭했다. 위치는 현재 중국 遼寧省 遼陽市의 老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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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또 동북으로 600리 가면 오야국(烏惹國)주 040
각주 040)
烏惹國: 烏惹는 遼代와 金代 동북 지방에 있던 부족의 명칭으로 兀惹를 가리킨다. 松花江 중류에서 黑龍江 입구에 이르는 지역과 우수리 강 및 牧丹江 일대 삼림에 주로 분포했다. 遼 초기에는 定安國을 통치하면서 바다를 건너 송과 교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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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는데 그 나라는 한문법(漢文法)을 사용하고 인장은 팔각이고 안에 원이 있습니다. 또한 동남쪽으로 고려와 접합니다. 또한 북쪽으로 여진(女眞)주 041
각주 041)
女眞 : 동부 滿洲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 女直이라고도 한다. 이 민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 춘추전국시대에는 肅愼, 한나라 때는 挹婁, 남북조시대에는 勿吉, 隋唐代에는 靺鞨로 불렸다. 10세기 초 송나라 때 처음으로 女眞이라 하여 명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나, 청나라 때는 滿洲族이라고 불렀다. 말갈족의 부족 가운데 粟末靺鞨과 白山靺鞨은 고구려에 복속하였다가 고구려가 멸망한 뒤 지금의 遼寧省 朝陽에 해당하는 營州로 이주하였고, 大祚榮이 고구려의 유민들을 이끌고 발해를 건국한 뒤 피지배층으로 복속되었다. 松花江과 黑龍江 하류 지역에 근거를 두고 발해에 대항하였던 黑水靺鞨은 발해가 멸망한 뒤 거란에 복속되어 여진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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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고 동쪽으로 압강(鴨江)주 042
각주 042)
鴨江 : 압록강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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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나는데 즉 신라(新羅)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신을 공봉관으로 삼고 기폐(器幣)와 관대(冠帶)를 내려주었다.

  • 각주 001)
    供奉官 : 황제의 좌우에서 여러 임무를 담당하는 관료들을 가리키는 通稱이다. 唐代에는 侍中, 中書令, 散騎常侍, 黃門侍郎, 給事中, 起居郎 등을 통틀어 供奉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遼代에는 南面官의 門下省에 설치되어 東頭供奉班과 西頭供奉班 두 관서에 나누어 소속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李信 : 생몰년 미상. 거란(요)의 관인. 송에 귀부했다는 본문의 기록 외에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바로가기
  • 각주 003)
    明記 : 거란(요) 경종의 이름이다. 경종의 小字인 明扆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경종 주해 참고. 바로가기
  • 각주 004)
    景宗 : 948∼982, 재위 969∼982. 거란(요)의 5대 황제. 이름은 耶律賢으로, 3대 황제 世宗 耶律阮의 차자이다. 969년에 4대 황제 목종 耶律璟이 피살되자 황제로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재위 중 적장자 계승 원칙을 세우고 등문고원을 두어 백성의 억울함을 풀도록 하였고, 관대한 형법을 시행하고, 漢人 관료를 중용하였다. 982년에 35세로 사망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5)
    蕭氏 : 953∼1009, 거란(요)의 5대 황제 경종의 황후로, 이름은 蕭綽이며, 睿智皇后 혹은 承天皇太后로도 불린다. 경종 야율현과의 사이에서 6대 황제 聖宗 耶律隆绪를 포함해 3남을 낳았다. 특히 성종이 11세로 즉위하자 섭정을 하였고, 성종은 승천황태후라는 존호를 올렸다. 그녀는 송 태종의 북벌을 성공적으로 방어했고, 1004년에는 송 진종과 전연의 맹을 맺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녀의 섭정 시기 거란(요)은 최전성기를 누렸다. 바로가기
  • 각주 006)
    挾力 : ?∼970. 거란(요)의 관인. 承天皇太后인 睿智皇后의 아버지이다. 이름은 蕭思溫으로 거란(요) 태종의 딸과 혼인했다. 거란(요) 목종 시기에 南京留守가 되었고, 목종이 시해된 이후 경종을 옹립하는 데에 참여했다. 保寧 元年(969)에 北府宰相이 되었다. 이듬해에 경종과 함께 사냥을 갔다가 高勳과 蕭海只 등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여기에서 挾力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 지는 불분명하다. 바로가기
  • 각주 007)
    隆緖 : 971∼1031, 재위 982∼1031. 거란(요)의 6대 황제로, 이름은 隆緖이다. 5대 황제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장남이다. 11세에 즉위하여 모친인 승천황태후가 섭정하였으며, 986, 987년에 정안국을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1004년에는 송과 전연의 맹을 맺었으며, 중앙아시아의 회홀 지역도 공략하였다. 특히 그의 재위 시기인 993, 1010, 1018년의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기도 하였으나, 고려를 복속시키지는 못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8)
    贊 : 973∼1016, 거란(요)의 황족. 5대 황제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2남으로, 이름은 耶律隆慶이고, 字는 燕隱이다. 8세에 恒王에 봉해졌고, 聖宗 統和 16年(998)에 梁王으로 진봉되고 南京留守가 되었다. 999, 1001년에 송을 공격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경종과 성종 시기에 侍中, 燕京管內處置使, 南京留守를 역임했고 政事令을 겸했으며 大元帥에 배수되기도 했다. 성종 開泰 元年(1012)에 秦晋國王에 봉해져 鐵券을 받고 守太師兼政事令이 더해졌다. 사망한 이후에 皇太弟로 추증되었다. 여기에서 이름을 贊이라고 부른 정확한 근거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바로가기
  • 각주 009)
    梁王 : 경종의 2남인 耶律隆慶의 封號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0)
    高七 : 979∼1012, 거란(요)의 황족. 5대 황제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3남으로, 이름은 耶律隆祐 또는 隆裕라고 하며, 거란식 이름은 高七 또는 胡都堇이다. 경종 시기에 鄭王에 봉해졌으며, 聖宗 統和 16年(998)에 吳國王, 19年(1001)에는 楚國王으로 고쳐 봉해졌다. 특히 統和 28年(1010)에 성종이 고려를 親征하였을 때에는 수도를 留守하였다. 성종 開泰 元年(1012)에는 齊國王으로 봉해지고 東京遼陽府를 유수하다가 그해 8월에 세상을 떠났다. 바로가기
  • 각주 011)
    吳王 : 高七의 封號인데, 1003년의 시점에서는 초(국)왕이 정확하다. 바로가기
  • 각주 012)
    鄭哥 : 거란(요)의 황족. 위 기록에서는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4남으로, 8개월 만에 죽었다고 되어 있지만 『遼史』에는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에는 3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경종에게는 藥師奴라는 이름의 넷째 아들이 있었지만, 누구의 소생인지는 알 수 없다는 기록이 보인다. 『遼史』에 藥師奴가 일찍 죽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鄭哥가 바로 藥師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바로가기
  • 각주 013)
    燕哥 : 燕哥는 거란(요) 聖宗의 長女의 이름이다. 거란(요)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장녀의 이름은 『遼史』에 觀音女(975∼1045)로 기록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4)
    北宰相 : 거란(요)의 관직. 北府宰相의 약칭으로, 北宰相府의 長官이다. 遙輦氏 부락 연맹의 阻午可汗 시기에 설치되었다. 야율아보기가 거란국을 세운 이후에는 거란 등 유목 부족의 군대를 통제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太祖 4年(910)에 蕭敵魯가 北府宰相이 된 이후부터는 后族인 蕭氏에서 선발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5)
    留住哥 : 생몰년 미상. 거란(요)의 北府宰相이었다. 거란(요)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장녀인 觀音女가 蕭繼先에게 시집을 갔는데, 蕭繼先의 字는 楊隱이었고 小字가 留只哥였다. 留住哥는 곧 留只哥를 지칭하는 것이다. 觀音女와 혼인한 이후에 駙馬都尉에 배수되었고, 統和 4年(986)에 송과의 전쟁에서 공적이 많다고 하여 北府宰相에 임명되었다. 上京留守, 同政事門下平章事, 檢校太師兼中書令을 역임했다. 사망 했을 때의 나이는 58세였다고 전해진다. 바로가기
  • 각주 016)
    駙馬都尉 : 駙馬를 가리키는 것이다. 前漢 武帝 시기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이때에는 近侍官의 한 종류였다. 魏晉 이후가 되면서 황제의 사위에게 주어지게 되었고, 實官은 아니었다. 거란(요)에서도 이 제도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金代에는 駙馬都尉를 正4品으로 정했다. 바로가기
  • 각주 017)
    長壽奴 : ?∼1017.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차녀이다. 『遼史』에는 長壽女로 기록되어 있다. 吳國公主에 봉해졌다가 統和 초기에 衛國公主로 進封되었고 이후에는 魏國長公主로 다시 봉해졌다. 蕭排押과 혼인했다. 바로가기
  • 각주 018)
    東京留守 : 거란(요)의 관직. 東京留守司를 관할하는 직함으로, 東京의 행정 사무를 관장했다. 바로가기
  • 각주 019)
    悖野 : ?∼1023. 거란(요)의 관인. 이는 거란(요)의 大臣인 蕭排押을 지칭하는 것이다. 字는 韓隱이고, 중국식 이름은 寧이었다. 統和 元年(983)에 左皮室詳穩이 되어 山西 지역의 땅을 탈환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 統和 7年(989)에 경종의 차녀와 혼인하여 駙馬都尉에 배수되었고, 同政事門下平章事의 직함이 더해졌다. 統和 13年(995)에는 北南院宣徽使를 역임했고, 統和 15年(997)에 北府宰相에 임명되었다. 고려를 정벌할 때에는 都統에 임명되어 開京에 침입했고, 이후 蘭陵郡王에 봉해졌다. 開泰 2年(1013)에는 知西南面招討使가 되었고, 開泰 5年(1016)에는 東平郡王으로 進封되었다. 開泰 7年(1018)에 다시 都統이 되어 고려를 침공했으나 패배하면서 免官되었다. 太平 3年(1023)에 西南面招討使가 되고 다시 豳王에 봉해졌다. 蕭排押은 東京留守가 되었던 적이 없었는데, 蕭排押의 동생인 蕭恒德(즉, 蕭遜寧)은 東京留守였다. 바로가기
  • 각주 020)
    延壽奴 : ?∼996. 거란(요)의 황족.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3녀이다. 『遼史』에는 延壽女로 기록되어 있다. 越國公主에 봉해졌고, 사망 이후에 趙國公主로 追封되었다. 蕭排押의 동생인 蕭恒德과 혼인했다. 바로가기
  • 각주 021)
    肯頭 : ?∼996. 거란(요)의 관인. 이는 蕭排押의 동생인 蕭恒德을 지칭하는 것이다. 字가 遜寧이어서 蕭遜寧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統和 元年(983)에 경종의 3녀와 혼인하여 駙馬都尉에 배수되었고, 南面林牙가 되었다가 곧 北面林牙가 되었다. 統和 10年(992)에 東京留守로서 병력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이듬해(993)에 고려가 화평을 청하자 거란(요) 聖宗의 명을 받들어 딸을 고려국왕에게 시집보냈다. 統和 12年(994)에는 兀惹部를 공격했다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功臣號가 삭제되었다. 승천황태후는 3녀 越國公主의 병을 걱정하여 宮人 賢釋을 보냈는데, 蕭恒德은 그녀와 私通했고 越國公主는 분노하여 사망했다. 이에 승천황태후는 蕭恒德을 賜死했다. 바로가기
  • 각주 022)
    齊王 : ?∼972. 遼에는 많은 齊王이 존재하는데, 여기에서의 齊王은 거란(요) 太宗의 둘째아들인 耶律罨撒葛을 가리킨다. 耶律罨撒葛은 耶律撒葛이라 부르기도 한다. 太宗 會同 元年(938)에 太平王에 봉해졌다. 穆宗이 즉위하면서 그에게 국정을 맡겼는데, 난을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폄출되어 서북변으로 보내졌다. 景宗이 즉위한 이후 그를 소환하여 齊王에 봉하고 皇太叔의 존호를 내렸다. 바로가기
  • 각주 023)
    驢駒兒河 : 강의 이름으로, 현재 몽골에 있는 케룰렌 강이다. 遼代에는 여기에 현재의 에르구네 강과 흑룡강 상류까지 포함시키기도 했다. 바로가기
  • 각주 024)
    達靼 : 투르크어로 타타르(Tatar)라고 불렸던 민족으로 퀼 테긴 비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타타르는 여러 한문 사료에서 達怛, 韃靼, 塔坦, 塔塔, 達旦, 達達 등 다양한 표기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唐代 중기에 투르크 계통 부족의 泛稱이 室韋에서 達靼으로 변화하게 되면서 室韋를 達靼으로 칭하거나 室韋 계통이 아닌 부족들까지 達靼으로 칭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이에 達靼은 점점 북방 초원의 유목민족을 가리키는 泛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거란(요)에서는 몽골고원에 사는 達靼을 阻卜이라 칭하기도 했다. 達靼은 거란(요) 제국 내에서 비교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지만, 끊임없이 거란(요)에 대한 반항투쟁을 일으키면서 거란(요)의 서북 통치를 약화시키기도 했다. 바로가기
  • 각주 025)
    骨歷扎國 : 『宋會要輯稿』에는 骨歷札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어떤 국가를 가리키는 것인지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遼의 서북변에 위치했던 阻卜 중의 한 국가(혹은 부족)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가기
  • 각주 026)
    幽州 : 거란(요)의 지명. 상고시대 “九州”의 하나로 현재 북경과 河北省 북부 및 遼寧省 일대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唐代에는 方鎭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는데, 先天 2年(713)에 幽州節度經略鎭守使가 설치되었고 그 치소가 幽州에 있었다. 위치는 현재 북경시 서남쪽이다. 天寶 元年(742)에는 范陽節度使로 이름을 고쳤다가 寶應 元年(762)에 다시 幽州로 바꾸었다. 당이 멸망한 이후에는 燕이라는 호칭을 쓰기 시작했다. 이른바 燕雲 16주 중의 하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27)
    趙王 : 10세기 후반에 거란(요)의 종실로서 趙王에 봉해진 적이 있었던 사람은 耶律喜隱이다. 保寧元年(969)에 宋王으로 改封되었다. 耶律喜隱은 거란(요) 太祖의 3남인 耶律李胡의 아들이다. 乾亨 3年(981)에 上京의 漢軍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耶律喜隱을 겁박하여 즉위시키려고 했지만 반란이 실패로 끝났고, 耶律喜隱은 이듬해(982)에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趙王이 耶律喜隱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바로가기
  • 각주 028)
    神武 : 거란(요)의 군대 명칭이다. 侍位親軍 중의 한 부대로 漢軍에 속했다. 주로 京, 府, 州, 縣에 주둔했다. 左右神武軍이라 칭하기도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29)
    控鶴 : 거란(요)의 군대 명칭이다. 會同 元年(938)에 창설되어, 御前의 儀衛를 관할했다. 漢軍에 속한 禁衛兵이었다. 바로가기
  • 각주 030)
    羽林 : 거란(요)의 군대 명칭이다. 侍位親軍 중의 한 부대로 漢軍에 속했다. 주로 京, 府, 州, 縣에 주둔했다. 左右羽林軍이라 칭하기도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31)
    驍武 : 거란(요)의 군대 명칭이다. 『遼史』 등에는 이 군대와 관련된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續資治通鑑長編』 卷74 大中祥符 3年(1010) 10월 戊辰의 기사를 보면 “항상 경내에서 한인을 찾아 그 중 죄지은 자를 군대에 배속시키고 효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32)
    九女奚 : 이름을 통해 추정하면 奚族의 한 지파였을 것으로 보인다. 『遼史』에는 九奚라는 용어가 보이는데, 이는 遙輦氏 연맹을 구성했던 아홉 부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金史』에는 九百奚라는 부족의 존재가 보인다. 거란(요)에 복속했던 奚族의 일파로 추정할 수 있을 뿐, 더 이상의 자세한 사항은 확인하기 어렵다. 바로가기
  • 각주 033)
    南北皮室 : 거란(요)의 군대 중 하나로 皮室軍이 있었는데, 이는 左와 右로 나뉘어 있었다. 左皮室軍을 南皮室軍, 右皮室軍을 北皮室軍이라 부르기도 했다.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락에서 사람을 선발하여 御帳親軍을 두었고, 그 군대를 皮室이라 불렀다. 太宗은 전국의 정예병들을 선발하여 皮室 조직을 더욱 확충하여 그 수가 3만에 달했다. 대략 聖宗 이후가 되면, 皮室은 더 이상 行宮의 숙위를 맡지 않고 중앙에서 직할하는 기동부대가 되었으며 이후에는 거란(요)과 송의 경계에 배치되었다. 南北皮室 이외에 단일한 부락으로 皮室軍을 조직하기도 했는데, 그 예로 黃皮室軍과 敵烈皮室軍 등이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034)
    當直舍利 : 이름을 통해 추정하면 當直을 맡은 舍利로 볼 수 있다. 거란(요)에서 舍利는 일종의 尊號로 한자로는 郎君으로 번역되었다. 부족 연맹 시기에 이미 출현한 호칭이고, 귀족 자제들 중에 관직이 없는 사람에 대한 尊號였다. 바로가기
  • 각주 035)
    八部落舍利 : 이름을 통해 추정하면 8부락의 舍利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8부락은 거란(요)이 국가를 성립하기 이전의 연맹 시기부터 주축이 되었던 부족들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바로가기
  • 각주 036)
    山後四鎭 : 山後는 대략 지금의 太行山 북쪽과 燕山 북서쪽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山後四鎭은 거란(요)과 북송의 국경에서 가까운 곳에 설치된 거란(요)의 鎭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로 『遼史』에는 山後五州都管司라는 관청이 보이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5개의 주는 山西의 雲州, 應州, 朔州, 蔚州, 奉聖州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거란(요)과 북송이 맹약을 맺은 이후 山後五州都管司는 폐지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37)
    平州 : 거란(요)의 지명. 北魏 天賜 4年(407)에 설치되었고, 唐 武德 초에 치소를 현재 河北 盧龍縣의 위치로 이동했다. 관할 영역은 현재 河北 陡河 동쪽과 장성 이남 지역에 해당된다. 바로가기
  • 각주 038)
    遼陽城 : 거란(요)의 지명. 거란(요) 시대에 설치된 遼陽縣으로, 遼陽府의 치소였다. 위치는 현재 중국 遼寧省 遼陽市의 老城에 해당된다. 거란(요) 시대 이후 금대에도 여전히 遼陽府의 치소였고, 원대가 되면 遼陽路의 치소가 되었다. 명대 초기에 폐지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39)
    東京: 거란(요)의 지명. 거란(요)의 五京 가운데 하나이다. 거란(요) 天顯 13年(938)에 南京을 東京으로 개칭했다. 위치는 현재 중국 遼寧省 遼陽市의 老城이다. 바로가기
  • 각주 040)
    烏惹國: 烏惹는 遼代와 金代 동북 지방에 있던 부족의 명칭으로 兀惹를 가리킨다. 松花江 중류에서 黑龍江 입구에 이르는 지역과 우수리 강 및 牧丹江 일대 삼림에 주로 분포했다. 遼 초기에는 定安國을 통치하면서 바다를 건너 송과 교류하기도 했다. 바로가기
  • 각주 041)
    女眞 : 동부 滿洲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 女直이라고도 한다. 이 민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 춘추전국시대에는 肅愼, 한나라 때는 挹婁, 남북조시대에는 勿吉, 隋唐代에는 靺鞨로 불렸다. 10세기 초 송나라 때 처음으로 女眞이라 하여 명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나, 청나라 때는 滿洲族이라고 불렀다. 말갈족의 부족 가운데 粟末靺鞨과 白山靺鞨은 고구려에 복속하였다가 고구려가 멸망한 뒤 지금의 遼寧省 朝陽에 해당하는 營州로 이주하였고, 大祚榮이 고구려의 유민들을 이끌고 발해를 건국한 뒤 피지배층으로 복속되었다. 松花江과 黑龍江 하류 지역에 근거를 두고 발해에 대항하였던 黑水靺鞨은 발해가 멸망한 뒤 거란에 복속되어 여진이라 불렸다. 바로가기
  • 각주 042)
    鴨江 : 압록강을 지칭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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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공봉관(供奉官) 이신(李信)의 귀부(歸附) 자료번호 : jt.k_0003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