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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덕흥리벽화분

德興里壁畵墳
  • 저필자
    이규호(동국대학교)
  • 시대
    고구려
  • 위치
  • 원소장처
    평안남도 남포특급시 강서구역 덕흥동
  • 시대
    고구려
  • 유형
    무덤
입지
평안남도 남포특급시 강서구역 덕흥동에 위치해 있다. 무학산 서쪽의 옥녀봉 남단 구릉 위에 위치해 있다. 무덤의 서쪽 1.8km 지점에 강서대묘가 위치하며, 수산리 벽화분, 약수리 벽화분, 보산리 벽화분, 가장리 벽화분 등도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 있다.
유적개관
1976~1977년에 발굴조사 되었는데, 연도, 전실, 용도, 후실로 이루어진 이실묘이다. 연도는 현실 남벽 중앙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있다. 전실에는 북벽 서측에 제단이 설치되었고, 후실에는 북벽에 기대어 동서로 긴 장방형 관대가 놓였다. 연도는 평천장 이며 전실과 후실 천장은 궁륭평행고임이다. 전실은 길이 2.97m, 너비 2.02m, 높이 2.85m이며, 후실은 길이 3.28m, 너비 3.28m, 높이 2.9m이다. 무덤 안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으며, 벽화의 주제는 생활풍속이다. 전실 북벽 상단에 14행 154자의 묘지명이 있으며, 장면마다 직명이나 설명문이 적혀있다. 덕흥리 벽화분의 무덤 주인인 유주자사 진에 대한 논란이 있다. 벽화 내에는 기마행렬도, 사냥장면, 주인이 평상 위에 앉아있는 장면 등과 함께 유주의 13군 태수가 자사 진에게 나아가 배례를 하는 장면, 60여개의 별자리 및 견우, 직녀를 비롯해 신화, 전설상의 존재로 가득한 천장 고임의 하늘세계 등이 특징적이다.
참고문헌
덕흥리고구려벽화무덤, 1981
해설
평양에서 20km 가량 떨어진 평안남도 남포특급시 강서구역 덕흥동의 무학산 서쪽 옥녀봉 남단 구릉 위에 위치해 있다. 고분은 널길[연도(羨道)], 앞방[전실(前室)], 용도(甬道), 널방[현실(玄室)]로 이루어진 이실묘이다. 널길[연도(羨道)]는 널방[현실(玄室)] 남벽 중앙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있다. 길이 1.54m, 폭 1.02m, 높이 1.43m이며 평천장이고 양 끝인 널길[연도(羨道)] 입구와 앞방[전실(前室)] 입구에는 문턱이 확인된다. 앞방[전실(前室)]은 동서 2.97.m, 남북 2.02m, 높이 2.85m이며 궁륭평행고임 천장이다. 북벽의 서쪽에는 묘주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데 그 아래에 길이 1m, 폭 0.5m, 높이 17cm 가량의 제대로 추정되는 받침이 있다. 널방[현실(玄室)]은 각 변 3.28m, 높이 2.9m이고 궁륭평행고임천장이다.
고분벽화의 주제는 생활풍속과 신선세계를 다루고 있다. 널길[연도(羨道)]의 양 벽에는 방상씨(方相氏)와 사자상, 연꽃이 그려져 있다. 앞방[전실(前室)]의 동쪽에는 출행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어져 있는 북벽 동쪽과 남벽 동쪽까지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졌다. 두 대의 수레를 비롯한 악대와, 개마무사 등이 등장한다. 앞방[전실(前室)] 서쪽에는 정사도(政事圖)가 그려져 있다. 묘주는 북벽 동쪽에 앉은 형태로 그려져 있고, 이를 향해 서벽의 13군 태수들이 상하 2단으로 나뉘어 그려져 있다. 남벽 서쪽에는 묘주가 거느린 막부관리들과 그에 대한 내용이 쓰여진 묵서가 남아 있다. 천장에는 천상세계를 그려 놓았다.
용도의 서벽과 동벽에는 묘주와 그 부인의 출타 장면을 그려 놓았다. 상하 두 단으로 나누어 위에는 묘주부부를, 아래에는 화개(華蓋)와 말을 그려 넣었다. 널방[현실(玄室)]은 방 전체를 집안처럼 꾸며놓았다. 북벽 오른쪽에는 장막 아래에 묘주가 앉아있고, 왼쪽은 빈 공간인데 아마 부인의 초상자리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장막 양 옆에는 시종과 말, 마차가 있다. 서벽은 4등분하여 창고, 말타기와 활쏘기, 나무 아래의 말과 마부가 그려져 있다. 남벽은 상하 두 단으로 나누어 외양간과 마구간을 그려 놓았다. 동벽도 4등분하여 연지와 칠보행사도를 묵서와 함께 그려두었다.
덕흥리고분은 560자 가량의 묵서로 인하여 묘주가 ‘□□진(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로 인해 그의 정체와 역할에 대해 오랜 시간 논쟁이 되어 왔다. 대체로 그가 고구려인인가 망명한 중국인인가 하는 문제와 그가 역임한 유주자사(幽州刺史)로서의 관할 구역인 유주(幽州)가 실제로 고구려의 영역이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나뉜다. 북한에서는 주로 그가 고구려인으로서 실제로 당시의 유주지역을 관할했다고 보며, 남한과 일본 및 중국에서는 그가 망명한 중국인이고 유주자사 직함과 당시의 유주는 관련이 없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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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흥리벽화분 자료번호 : isea.d_0002_0040_0020_0060_0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