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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동산동벽화분

  • 저필자
    이규호(동국대학교)
  • 시대
    고구려
  • 원소장처
    평양직할시 낙랑구역 통일거리
  • 시대
    고구려
  • 유형
    무덤
입지
평양시 낙랑구역 동산동 일대의 제일 높은 동산에서 동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구릉 위에 위치해 있다. 낙랑구역 일대에는 고구려 석실봉토분 뿐만 아니라 낙랑의 전실묘를 비롯한 많은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벽화분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동명왕릉이 위치한다.
유적개관
동산동 벽화분은 묘도, 연도, 양측실이 있는 전실, 용도, 현실로 이루어진 이실묘이다. 고분 위에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었던 관계로 북쪽 부분만 남아있고 상당부분이 파괴된 상태이다. 전실은 동서 2.04m, 남북 2.1m, 높이 3.3m이다. 천장은 궁륭삼각천장이다. 현실은 동서 3.36m, 남북 3.28m이고, 잔고는 3.4m이다. 벽화는 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렸는데, 주제는 생활풍속이다. 행렬도, 문지기 역사, 기둥, 장식무늬 등이 일부만 남아있다. 동산동 고구려 벽화분은 낙랑구역 일대에서 처음 발견된 고분으로, 평양 천도 이전 시기에 평양 일대에 축조된 가장 크고 독특한 벽화분이다.
출토유물
* 인골 3개체, 금제 꽃잎형 장식품, 반구형 장식품, 은제형 장식품, 은못, 관못, 호랑이 모양 청자기, 토기, 오수전 등
참고문헌
「옥도리 고구려 벽화무덤」, 2011
해설
낙랑구역 통일거리 일대에서 진행되는 ‘10만세대 살림집 건설’ 현장 가운데 물탱크를 해체하고 기초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천장이 허물어지면서 발견되었다. 2009년에 조선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 의해 발굴되었고, 고분은 평양시 낙랑구역 동산동 일대의 제일 높은 동산에서 동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구릉 위에 있다. 낙랑구역 일대에는 고구려 석실봉토분 뿐만 아니라 낙랑의 앞방[전실(前室)]묘를 비롯한 다양한 고분이 분포하고 있으며, 동남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동명왕릉이 위치한다.
동산동 벽화분은 묘도, 널길[연도(羨道)], 양 측실이 있는 앞방, 용도(甬道), 널방으로 이루어진 이실묘이다. 고분 위에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었던 관계로 북쪽 부분만 남아있고 상당부분이 파괴된 상태이다. 묘도는 바닥에 돌을 깔고 그 위에 회(灰)를 발랐다. 안길 입구에는 나무문을 닫았던 흔적이 있고 천장에 2개의 문확자리가 있다. 앞방은 긴 장방형으로 동서 2.04m, 남북 2.1m, 높이 3.3m으로 궁륭삼각천장이다. 앞방의 두 측실 크기는 동일한데 동서 0.8m, 남북 0.72m, 높이 1.15m이며 평행삼각고임천장이다. 용도(甬道)는 동쪽으로 치우쳐 있다. 널방은 정방형(正方形)에 가까운데 동서 3.36m, 남북 3.28m이고, 현재 높이는 3.4m이다.
무덤에서 3인분의 뼈가 나왔는데 주인공과 처첩(妻妾)의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순금으로 만든 꽃잎형 장식품, 반구형 장식품들과 관못, 청자기, 도기류, 오수전(五銖錢) 등이 출토되었다.
벽화는 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렸는데, 현재는 오랜 시간이 흐르고 석회수가 흘러내리는 상황으로 인하여 벽화내용을 제대로 알기가 어렵다. 주제는 생활풍속이다. 행렬도, 문지기 역사, 기둥, 장식무늬 등이 일부만 남아있다. 동산동 고구려 벽화분은 낙랑구역 일대에서 처음 발견된 고분으로, 그 구조는 처음 나타나는 형식이라 가치가 높다. 구조의 특징으로 볼 때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축조된 무덤으로 추정되며, 왕릉급은 아니지만 높은 신분의 인물이 주인이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동산동 벽화고분은 평양 천도 이전에 평양 일대에 축조된 가장 크고 독특한 무덤으로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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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산동벽화분 자료번호 : isea.d_0002_0040_001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