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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양둔산성

楊屯山城
  • 저필자
    표영관
  • 시대
    고구려
  • 위치
  • 원소장처
    요녕성 단동시 봉성시 남기진 남기촌 양둔후(中國 遼寧省 丹東市 鳳城市 藍旗鎭 藍旗村 楊屯後)
  • 시대
    고구려
  • 유형
규모
둘레: 500m
입지
봉성시 람기진 람기촌 양둔 후둔 북쪽 1km 떨어진 산에 위치
유적개관
평면 형태 삼각형으로 주변 둘레는 500m이다. 남벽은 석축을 이용하였는데 잔존 길이 30m, 높이 2m이다. 동서 양측에 깊이 1m, 폭 2m가량의 환호가 있다.
참고문헌
「文物地圖集」
해설
단동시 중심에서 서북쪽 약 46km, 봉성시 중심에서 남서 방향 약 41km 거리에 위치한 남기촌 양둔후의 산성 유적이다. 황해(黃海)를 바라보는 산맥 끝자락 산정에 위치한다.
성의 규모는 둘레 약 500m라는 보고가 있으나, 1980년 조사 당시 120m 정도의 석축 성벽이 잔존했다고 한다. 2009년 보고서에 의하면 남쪽 벽 30m 정도만 잔존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잔존 성벽 동서 양측에 깊이 1m, 너비 2m의 해자(垓子/濠溝)의 흔적이 있다.
남쪽 벽에서 정형적이지는 않으나 고구려 축성의 특징 중 하나인 쐐기형 돌을 사용한 것이 확인되었고, 역사 지정학적 위치를 함께 고려했을 때 고구려의 방어시설로 판단된다.
단동은 요동반도의 동남부이자 압록강이 황해를 만나는 출해구(出海口) 지점에 위치한다. 현재는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의 신의주(新義州)와 국경지역이기도 하다. 단동시는 단동시를 축으로 서쪽 시계방향으로 현(縣)급도시인 동항시(東港市)와 봉성시(鳳城市) 그리고 관전만족자치현(寬甸滿族自治縣)이 위치한다.
단동 지역은 한(漢)이 요동군에 소속시킨 서안평(西安平/북안평)으로 비정되고 있다. 고래로부터 서안평은 요동지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바다를 통한 교섭과 무역의 창구이기도 했다. 때문에 고구려는 줄곧 서안평으로의 진출을 위해서 중국세력과 분쟁을 거듭하였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311년 마침내 서안평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또 서안평의 확보로 고구려는 압록강 남쪽, 한반도 내에 존재했던 중국의 한사군(漢四郡)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중국세력과 분리 고립시키고 이들을 공략할 수 있게 되었다. 서안평 확보는 고구려의 숙원인 ‘요동으로의 진출’에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기도 하다. 고구려 첫 도읍인 환인(桓仁)이나 집안(集安/국내성)에서는 험준한 산맥이 요동평원까지 중첩되어 있는데 비해, 단동에서는 비교적 완만한 지역을 지나 요하의 하구인 영구(營口)까지 진출하는 것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토 확장은 반대로 방어지역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구려가 한반도 내부의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단동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평양지역은 중국세력으로부터 물리적 거리는 늘어났지만, 바다를 통한 침입의 접근성은 오히려 용이해졌다. 때문에 고구려는 발해만 해안지역과 황해 연안에 육로 방어와 해양방어체계의 일환으로 방어용 시설들을 구축했는데, 주로 단동과 대련(大連) 지역의 교통로상 요지가 그 주축이 되었다.
장가산성의 앞을 흐르는 토우하(土牛河)는 서남쪽 10km 지점에서 대양하(大洋河)와 합류하여 남쪽으로 18km 흘러 황해와 만난다. 이러한 위치의 장가산성은 요동방면에서 육로로 진입하거나, 바다를 통해 진입하는 적들을 조망하는 전초기지로서, 압록강 하구의 넓은 충적평야 지대를 방어하는 고구려 방어체계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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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둔산성 자료번호 : isea.d_0002_0010_007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