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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국내성

國內城
  • 저필자
    권순홍(성균관대학교 박물관)
  • 시대
    고구려/발해/요금
  • 위치
  • 원소장처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吉林省 通化市 集安市)
  • 시대
    고구려
  • 유형
규모
둘레: 2,686m
입지
통구하에 인접하여 위치
유적개관
고구려 도성으로, 석축 평지성이다. 6개의 문지가 있으며, 치가 14개이다. 평면 형태는 방형이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성벽이 잘 남아있었으나, 1980년대 이후 많이 훼손되었다. 세계문화유산 지정 전후로 하여 복원작업을 진행한 끝에, 현재는 전체 성벽을 모두 노출 및 일부 복원하였다.
유물개관
문자기와, 연화문와당, 토기 철기 등
참고문헌
「國內城」, 2004
해설
압록강 우안의 통구분지에 위치했다. 통구분지는 남쪽으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만포시와 마주보며, 북쪽으로는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노령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동서 길이 10km, 남북 폭 2~4km로서 압록강 중류일대에서 가장 넓은 분지이다. 또한 압록강 중상류의 수로망을 총괄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국내성은 집안시 경내에 위치한 평면형태 방형의 석축 평지성으로, 통구분지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서쪽으로는 통구하가 흐르고 있어 자연해자를 이루며, 북쪽 1km 즈음에서 우산이 자연방어벽을 형성하고 있다. 동쪽 6km에 용산, 서쪽으로 통구하를 건너 1.5km 거리에 칠성산이 있다. 이 주변에 고구려 시기의 적석총과 석실봉토묘 등 1만 2천여기의 고분이 조성되어 있고 광개토왕비와 집안고구려비 등 고구려 시기의 유적, 유물들이 무수히 분포되어, 북쪽 2.5km 거리의 산성자산성과 함께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을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까지 국내성지는 금(金)의 황성으로 인식되어 왔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고구려 도성으로 비정되곤 했지만, 추정에 지나지 않았다. 20세기 전반에 와서야 일본학자들이 국내성지를 여러 차례 조사하며 실측 도면과 사진 자료를 많이 남기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네 성벽이 모두 잘 남아 있었고, 각루(角樓)와 치, 성가퀴 등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나 1920~1930년대에 중화민국 정부가 성곽을 수리하고 성문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으며, 1949년 중국정부 수립 이후 현대식 시가지를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동벽과 남벽이 없어지는 등 성곽이 많이 파괴되었다. 1960년대부터 시가지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본격적인 조사 및 발굴이 시작되면서 여러 건물지들을 발견하긴 했지만, 성곽이 많이 파괴되었고 특히 동벽은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북벽 바깥에도 해자가 있었지만 모두 매립되고 그 위에는 현대식 건물이 세워졌다. 1975~1977년에는 집안현문물보관소가 성벽 10곳을 절단하여 성곽전체를 정밀 조사하였고, 1980년 봄에 성벽의 제원을 다시 실측하였다. 이후 건설공사 와중에 고구려 시기의 여러 건물지를 발견하였다. 1990년에는 길림성 문물고고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북벽 치를 발굴조사 하였고, 특히 2000~2003년에 중국 정부는 국내성지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조사·발굴하고, 성벽 주변의 민가를 철거하여 원상을 복원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조사와 발굴을 통해 국내성지의 축조과정을 해명할 자료를 다수 확보했으며, 건물지도 많이 발견하였다. 2004년에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에는 2008년부터 동벽과 남벽을 발굴 및 조사하였다. 한편 2000년경까지만 하더라도 서벽 안팎에 민가가 밀집하여 성벽의 모습을 보기 어려웠으나 2002년 이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이제는 전혀 모습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다. 또한 남벽의 경우도 성벽 안팎뿐 아니라 위에까지 민가가 밀집하여 성벽 자체를 볼 수 없었으나 2006년 이래 민가를 철거하여 성벽을 복원하여 현재는 동벽 일부 구간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은 정비가 완료된 상태이다.
국내성지는 잘 다듬은 쐐기형 돌로 성벽을 축조했다.
현재 성 내부는 집안 시가지의 중심부로서 현대식 건물로 가득 차 있다. 국내성지의 평면은 네모꼴로서 동벽 554.7m, 서벽 702m, 남벽 751.5m, 북벽 730m로서 총 둘레는 2,738m에 달한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대략 세 종류로 나뉜다. 먼저 잘 다듬은 쐐기형 돌로 가지런하게 쌓은 부분인데, 고구려 시기 성벽으로 하단부에 많이 남아 있다. 북벽 하단부에 퇴물림 방식으로 축조한 고구려 시기 성벽이 잘 남아 있다. 다음으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성돌로 불규칙하게 쌓은 부분인데, 20세기 초에 개축한 성벽으로 중간이나 상단부에 많이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크기나 석질이 다른 성돌을 무질서하게 쌓은 부분인데, 만주국이나 중국 내전기에 수리한 성벽이다.
성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치를 설치했는데, 1920년대만 하더라도 42기나 남아 있었다. 1975~1977년 조사시에 14기의 치를 확인했고, 1990년에도 북벽 중앙에서 치를 발견했다. 각 치의 크기는 8~10m, 너비 6~8m이며 거대한 화강암 석재로 기초부를 견고하게 축조했다. 또한 모서리마다 각루가 있었는데, 2000~2003년도에 동북과 서남 모서리에서 각루 유적을 발굴했다. 그리고 20세기 전반만 하더라도 성벽 위에 성가퀴가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국내성지 성문의 위치와 수는 조사 시점마다 조금씩 다르게 파악되었다. 가령 1913년에는 동문·남문 1개씩, 서문 2개 등 5개를 확인했지만, 1930년대에는 각 성벽마다 1개씩 모두 4개의 성문을 확인했다. 그리고 1975~1977년에는 동문·서문 2개씩, 남문과 북문 1개씩 모두 6개의 성문을 확인했고, 2000~2003년에는 동문 2개, 서문 1개, 북문 4개, 남문 2개 등 모두 9개의 성문을 확인했다. 조사 시기마다 성문의 위치와 수를 달리 파악함에 따라 간선 도로망도 다르게 설정되었다. 가령 1913년에는 동서도로 1개와 서로 엇갈린 남북도로 2개가 간선 도로망을 구성했다고 보았지만 1975~1977년에는 동서도로 2개와 남북도로 1개가 간선도로망을 구성했다고 파악했다. 반면 북문을 여러 개 확인한 2000~2003년에는 동서도로 2개와 남북조로 3개가 간선 도로망을 구성했다고 파악했다. 1913년에 남쪽 동문과 북쪽 서문 바깥에서 옹성(甕城)을 확인했지만, 그 뒤 성문을 신축하거나 시가지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모두 유실되었다. 또한 1913년에 남쪽 서문이 어긋문식 옹성으로 확인되었는데, 역시 1920년대에 성문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변형되었다가 2000~2003년 발굴시에 원형을 재확인했다. 또한 2000~2003년에 중앙 북문과 서쪽 북문 좌우에서 적대(성문 좌우의 치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한편 서벽 북단의 바깥쪽에서 동서방향으로 놓인 배수로가 발견되었다. 바닥에 판석을 깔고 2단으로 벽을 쌓은 다음, 커다란 판석으로 뚜껑을 덮었다. 현재 남아 있는 길이 16.25m, 너비 0.7~0.8m, 높이 1.9~2.1m이다. 현재 배수로는 서벽 북단의 바깥쪽에 위치해 있지만, 본래 배수로 위로 서벽이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배수로 안쪽에 위치한 현재의 서벽 북단이 본래 성벽이 아니라 개축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했는데, 이러한 서벽의 대대적인 개축은 고구려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국내성지 내부에서는 1960년대 이래 건물 신축과정에서 고구려 시기의 건물터가 여러 곳 발견되었다. 가령 1963년 대중목욕탕을 짓다가 고구려 시기 건물터를 발견했는데, ‘태녕(太寧) 4년(327)’명 권운문와당이 출토되어 축성시점과 관련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1970년대에는 국내성지 중앙인 당시 집안시 청사를 중심으로 그 좌우 일직선상에서 초석, 담장, 기와편 등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에 시청사, 임민대회당, 법원 일대가 왕궁의 중심지이고, 그 전후좌우에 부속 건물이 산재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2000~2003년도에는 성 내부를 대대적으로 조사·발굴하여 총 19곳에서 건물지나 그 흔적을 확인했다. 각 지점마다 약간 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지하 1~2m 깊이까지는 발굴했는데, 대체로 3~5층의 문화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4세기 이전으로 편년되는 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았는데, 국내성의 축조시기와 관련하여 매우 주목되는 현상이다. 또한 위쪽 문화층에서는 발해의 연화문와당이나 토기편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발해시기에도 국내성지가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중심부 조금 서쪽에 위치한 체육장 건물지의 규모가 가장 컸다. 이곳에 왕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 외 겹벽으로 이루어진 ‘회(回)’자형건물지도 3군데에서 발견되었다. 내부에는 별다른 바닥시설이나 난방시설이 없었고, 문의 흔적도 확인하지 못했다. 4세기경의 권운문와당이 출토되었고, 아래쪽 문화층의 구덩이에서는 동진시기 청자편이 대량으로 출토됨으로써, 4세기대 이후의 중요 건물지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체육장 북쪽의 유치원과 남쪽의 실험소학교에서 건물벽과 배수구로 이루어진 대형 건물지를 발견했는데, 체육장 건물지와 연관될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는 고국원왕 12년(342)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발굴조사를 통해 국내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축이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현재 국내성의 초축연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970년대 발굴조사에서는 석축 성벽의 아래에서 한대 토성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성벽 아래에서 폭 7~8m, 잔존 높이 1.7~2m 규모의 토축 다짐층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 등을 근거로 고구려 건국 이전에 축조된 한의 고구려현성으로 판단한 것이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해당 토축부를 중국의 군현성이 아닌 고구려 세력이 축조한 것으로 보거나, 전국시기 연 요동군의 국경 바깥 거점성 혹은 서개마현에 있던 토착 집단이 세운 개마국의 성으로 추정하는 견해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해당 토층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석기와 고구려 전기로 편년되는 토기도 함께 출토되었기 때문에, 국내성은 한대가 아닌 고구려 시기에 처음 축조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2004년 발굴조사에서도 북벽을 절개하여 조사하였으나, 70년대 당시의 토축부 흔적은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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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성 자료번호 : isea.d_0002_0010_0060_0040_1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