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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천추총

千秋墓/JMM1000
  • 저필자
    권순홍(성균관대학교 박물관)
  • 시대
    고구려
  • 위치
  • 관련자료
  • 원소장처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마선향 마선촌(吉林省 通化市 集安市 麻線鄕 麻線村)
  • 시대
    고구려
  • 유형
    무덤
입지
압록강 오른쪽 기슭 대지 북쪽 가장자리 산등성이에 위치한다.
유적개관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라는 문자전의 출토로 인해 천추총이라 불려지게 된 고분으로, 계단적석총이다. 동변은 67m, 남변은 60.5m, 서변은 62.6m, 북변은 71m이다. 묘도가 서쪽을 향해 있으며, 서쪽면을 기준으로 고분의 높이는 약 11m이다. 고분은 축조 이전에 기초조성 공사를 하였으며, 치석된 석재를 이용하여 쌓아올렸다. 정상부 주위에는 매장주체부에 사용된 석곽의 석판들이 발견된다. 호석은 원래는 20개가 있어야 하지만, 서쪽면 5개, 남쪽면 2개, 동쪽면 2개만이 남아있다. 고분 주변으로는 배수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고분의 서남쪽에는 제사건축지가 남아있다.
유물개관
* 금기(금실, 요엽), 도금동기(관장식, 정, 갑옷 편 등), 동기(동령), 철기(철도, 환, 갑옷편 등), 금속기, 문자전(천추만세영고, 보고건곤상필(保固乾坤相畢)), 문자기와(왕(王), 상(上), 하(下), 전(前), 후(後), 조장군(趙將軍), 호장군(胡將軍), 장안(長安), 미미(美美), 고졸(固卒)), 와당 300여점(권운문, 연화문), 토기 등
참고문헌
「集安高句麗王陵」, 2004
해설
마선구고분군 남단에 위치한다. 고구려의 초대형 계단적석총이며 주체부는 석실이다. 국내성에서 서쪽으로 3.5km 떨어진 마선하 동쪽에 단독으로 자리하고 있다. 일찍이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 ‘보고건곤상필(保固乾坤相畢)’이라는 명문(銘文)이 찍힌 벽돌이 출토되어 ‘천추총’이라 불리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JMM1000호로 편호되어 있다. 압록강변 충적대지 북쪽 가장자리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데, 북쪽 800m에 마선구2100호, 서쪽 2km에 서대총이 있다. 고분이 위치한 언덕은 두께 8m 전후의 황토퇴적층으로 벽돌 제작을 위한 채토로 인해 동측과 북측이 많이 파괴되었고, 계단석도 많이 채취하여 갔다. 고분은 언덕 위의 평탄면에 계단상으로 축조하였다. 현재 각 변의 길이는 동변 67m, 남변 60.5m, 서변 62.6m, 북변 71m이지만, 본래 한 변 63m인 정방형이다. 먼저 땅을 파서 대형 석재를 놓아 반지하식 기초부를 조성한 다음, 가장 외곽에 거대한 화강암 장대석을 5단 쌓아 제1층 계단을 조성하고 내부를 강돌로 평평하게 채우고, 그 위에 다시 제2층 계단을 쌓고 내부를 강돌로 채우는 방식으로 고분을 축조했다. 계단을 쌓는데 사용되는 돌은 다듬은 흔적이 보이지 않도록 정밀하게 가공하였는데, 제1층 계단석의 크기는 보통 140cm이상인데 길이가 300cm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가장자리에 턱을 만들어 위쪽 계단석이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했다. 현재 5층 계단까지만 확인되지만 계단의 층수는 10층 이상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10.9m, 파괴가 심한 동쪽은 7.9m 정도이다. 무덤둘레를 돌아가면서 거대한 화강암을 버텨 놓았는데, 본래 각 변마다 5개씩 총 20개의 보호석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많이 유실되고 동·남·서변에 각각 2개씩 남아 있다. 또한 제2층 계단면에 석판을 기대어 세워 놓았는데, 제사의례와 관련된 상징물로 추정된다. 고분 정상부의 매장주체부는 많이 파괴되어 정확한 양상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다만 태왕릉의 가형석곽과 재질이나 형태가 유사한 판석, 천장석이나 문미석으로 추정되는 길이 2.3m의 판석 2개 등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가형석곽을 안치한 석실을 조영하고 부부를 안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정상부 중앙에 작은 강돌을 깐 석면이 동서 10m, 남북 7m 범위에서 확인되는데, 대체로 현실의 바닥으로 추정된다. 고분 남쪽 40m 거리에서 배수시설을 갖춘 담장과 남문지를 발견했는데, 능역 시설로 추정된다. 담장은 양쪽에서 돌을 쌓아 올렸으며, 아래가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져 단면은 사다리꼴이 된다. 담 안쪽으로 배수구가 있다. 고분 동쪽에는 종래 배장묘나 제대로 파악되던 적석부가 있고, 서북측에서 팔각형 초석도 발견되었다. 고분 서측 바닥에는 납작한 산돌을 깐 포석면이 확인되었는데 고분의 전면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시설이다. 또한 능역 외곽인 서남쪽으로 300m 떨어진 강변 대지에서 큰 석재로 조영한 담장이 확인되었는데, 제사용 건물터로 보인다. 유물로는 순금제 금실과 장식품 8건·금동제 관식과 장식품·못·갑편 38건·청동방울 3건·갑옷편을 비롯한 각종 철제품, 마노 등이 출토되었다. 무너진 분구에서는 다량의 벽돌과 기와, 와당이 출토되어서 원래는 무덤 정상부에 목조 구조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구조물이 고구려 왕릉의 표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명문 벽돌과 더불어 명문 기와도 많이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浪趙將軍---□未在永樂’이라는 명문기와는 광개토왕의 재위기간인 영락 연간에 천추총을 조영하거나 수리했고, 이때 낙랑출신의 조장군이 관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 밖의 명문기와로는 ‘年
胡將軍
村’, ‘長安’, ‘미(□+美)미(□+美)□’, ‘固卒’, ‘王’, ‘前’, ‘後’, ‘上’, ‘下’ 등이 있다. 계단석에서도 ‘井’자나 ‘工’자모양의 부호를 새긴 것이 확인되며, 서벽 제1층 계단 중앙의 4단 계단석에서는 음각한 용문도안이 발견되었다. 또한 연화문와당 수백건과 더불어 권운문와당 32건이 출토되었는데, 천추총의 조영연대나 피장자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천추총은 고분의 입지나 규모, 출토유물 등으로 보아 고구려 왕릉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종래 천추총의 연대나 피장자에 대해서는 적석총 축조기술의 전개양상을 근거로 대체로 천추총→태왕릉→장군총의 순서로 조영되었을 것으로 파악했지만, 연화문와당의 출토양상을 근거로 태왕릉→천추총→장군총이라는 순서를 상정하고 4세기말에 조영된 고국양왕릉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천추총에서 연화문와당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권운문와당이 다량 출토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천추총이 연화문와당만 출토된 태왕릉이나 장군총보다 먼저 조영되었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특히 천추총에서는 4세기 중반 이후로 편년되는 권운문와당의 변형 및 퇴화 형식이 매우 다양하게 출토되었으므로, 천추총은 권운문와당이 변형되고 퇴화한 360년대 직후에 조영된 고국원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 경우에 따라 소수림왕릉으로 비정될 가능성도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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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추총 자료번호 : isea.d_0002_0010_0060_0040_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