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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姑句)와 당두(唐兜)가 흉노에 투항하자 왕망이 이들을 참수함

  • 국가
    흉노·서역(匈奴·西域)
또한 거호래왕 당두(唐兜) 주 001
각주 001)
唐兜(d’ang-təu) : 去胡來王에 대해서는 前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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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나라가 큰 종족인 적수강(赤水羌)과 가까워서주 002
각주 002)
國比大種赤水羌 : 顔注에 따르면 “比는 近”의 뜻이다. 赤水羌은 羌族의 일종으로 오늘날 靑海 서부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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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차례 노략을 당했고, 이를 당해낼 수 없어서 도호에게 급하게 보고하였다. 도호 단흠(但欽) 주 003
각주 003)
但欽 : 元始 元年(후1)부터 王莽의 始建國 5년(후13)까지 西域都護를 역임한 인물이다. 宣帝 때부터 王莽에 이르기까지 西域都護를 역임한 사람은 모두 18명이었는데, 韓宣부터 시작해서 但欽 이전까지 모두 3年1更의 원칙이 지켜졌고, 다만 段會宗만 2차례 연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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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때에 구원해 주지 못하자, 당두는 궁지에 몰려 단흠을 원망하면서 동쪽의 옥문관으로 가서 피신하려고 했다. 그러나 옥문관에서 들여보내주지 않자 그는 곧 처자와 백성 천여 명을 데리고 l{흉노}로 투항했다. 흉노는 그를 받아들였고 또한 [한나라로] 사신을 보내서 상황을 알리는 글을 올렸다. 이때 신도후(新都侯) 왕망(王莽) 주 004
각주 004)
新都侯 王莽 : 新王朝의 창건자인 王莽은 魏郡 元城(현재 河北 大名縣 東) 사람이었고, 元帝의 皇后 王政君의 侄이었다. 成帝 때인 전22년에 黄門侍郎을 初任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永始 元年(전16)에 新都侯․騎都尉․光禄大夫侍中에 봉해졌다. 전1년 哀帝가 자식이 없이 사망하자, 王政君은 傳國의 玉璽를 장악하고 王莽을 大司馬로 임명하고 平帝를 옹립하였다. 王莽은 기원후 1년 安漢公의 작위를 받았고 자신의 딸을 平帝의 황후로 들였다. 5년에는 平帝를 독살하고 두 살짜리 ‘皇太子’를 세운 뒤 ‘假皇帝’ 혹은 ‘攝皇帝’라는 이름으로 섭정을 하다가, 마침내 9년에 ‘禪讓’을 받아 稱帝建元하며 新朝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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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권을 장악하고 중랑장 왕창(王昌) 주 005
각주 005)
王昌 : 다른 자료에서는 확인이 안 되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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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흉노에 사신으로 보냈다.주 006
각주 006)
『漢書』 卷94下 「匈奴傳下」에는 “西域의 車師後王 姑句와 去胡來王 唐兜가 모두 都護校尉를 원망하여 妻子와 人民을 데리고 匈奴로 투항하였는데, 이는 「西域傳」에 나와 있다. 單于가 그들을 받아들여 左谷蠡王의 땅에 두고, 사신을 보내 上書하여 말하기를 ‘臣이 삼가 이미 받았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詔勅으로 中郎將 韓隆, 王昌, 副校尉 甄阜, 侍中謁者 帛敞, 長水校尉 王歙 등을 匈奴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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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선우에게 통고하기를, 서역은 [한나라에] 내속(內屬)했으니 마땅히 [투항자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주 007
각주 007)
內屬 : 漢代에는 외국과 관계를 가질 때 內臣과 外臣을 구분했는데, 전자는 納質內屬한 西域 36국과 같은 경우이고, 후자는 重譯貢獻하는 파미르 이서의 遠邦의 경우였다. 이 같은 구분은 『後漢書』 「西域傳․叙」에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 內臣과 外臣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①邊關을 除去하느냐, ②漢조정이 任官權을 장악하느냐, ③漢法을 시행하느냐의 여부에 있었다. 또한 內臣이 되면 수행해야 할 의무로는 ①質子를 보내고, ②土物을 貢獻하며, ③出兵助戰하여, ④漢軍에게 軍糧을 제공하고, ⑤天子의 詔書가 없이는 함부로 兵馬를 발동하지 못하며, ⑥다른 屬部로부터 人質을 받아서는 안 되며, ⑦漢人 및 다른 屬部의 逃民과 叛臣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점 등이 꼽히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한나라가 中郞將 王昌을 흉노에게 보내서 去胡來王 唐兜의 투항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도, 바로 匈奴가 漢의 內臣․屬部로서의 의무를 수행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漢代 屬部의 지위와 의무에 대해서는 賈叢江(200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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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가 사죄하며 두 왕 [고구당두]를 붙잡아 사신에게 붙여주었다. 왕망은 중랑(中郎)주 008
각주 008)
中郎 : 中郞將과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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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맹(王萌) 주 009
각주 009)
王萌 : 『漢書』 卷99中 「王莽傳」에 따르면 그는 始建國 2년(후10) 十二月 王莽의 명령을 받고 ‘平狄將軍’이라는 직함을 갖고 代郡을 나서서 흉노로 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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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파견하여 서역의 오도노(惡都奴)주 010
각주 010)
惡都奴 : 顔師古는 服虔을 인용하여 “西域의 계곡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西域傳」에 보이는 伊吾盧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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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미리 가서 받아들이도록 하였다.주 011
각주 011)
逢受 : 顔注 : “逢受는 먼저 가서 마중한다는 뜻이다. 즉 逢見하여 受取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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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가 사신을 호송하여 보내면서 그의 죄를 [사면해 달라고] 청했고, 사신이 이를 보고했으나 왕망은 듣지 않았다. 그는 서역 여러 나라의 왕들에게 모이라고 조칙을 내리고, 군대의 사열식에서 고구당두를 참수하여 시범을 보였다.

  • 각주 001)
    唐兜(d’ang-təu) : 去胡來王에 대해서는 前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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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國比大種赤水羌 : 顔注에 따르면 “比는 近”의 뜻이다. 赤水羌은 羌族의 일종으로 오늘날 靑海 서부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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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但欽 : 元始 元年(후1)부터 王莽의 始建國 5년(후13)까지 西域都護를 역임한 인물이다. 宣帝 때부터 王莽에 이르기까지 西域都護를 역임한 사람은 모두 18명이었는데, 韓宣부터 시작해서 但欽 이전까지 모두 3年1更의 원칙이 지켜졌고, 다만 段會宗만 2차례 연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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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新都侯 王莽 : 新王朝의 창건자인 王莽은 魏郡 元城(현재 河北 大名縣 東) 사람이었고, 元帝의 皇后 王政君의 侄이었다. 成帝 때인 전22년에 黄門侍郎을 初任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永始 元年(전16)에 新都侯․騎都尉․光禄大夫侍中에 봉해졌다. 전1년 哀帝가 자식이 없이 사망하자, 王政君은 傳國의 玉璽를 장악하고 王莽을 大司馬로 임명하고 平帝를 옹립하였다. 王莽은 기원후 1년 安漢公의 작위를 받았고 자신의 딸을 平帝의 황후로 들였다. 5년에는 平帝를 독살하고 두 살짜리 ‘皇太子’를 세운 뒤 ‘假皇帝’ 혹은 ‘攝皇帝’라는 이름으로 섭정을 하다가, 마침내 9년에 ‘禪讓’을 받아 稱帝建元하며 新朝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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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王昌 : 다른 자료에서는 확인이 안 되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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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漢書』 卷94下 「匈奴傳下」에는 “西域의 車師後王 姑句와 去胡來王 唐兜가 모두 都護校尉를 원망하여 妻子와 人民을 데리고 匈奴로 투항하였는데, 이는 「西域傳」에 나와 있다. 單于가 그들을 받아들여 左谷蠡王의 땅에 두고, 사신을 보내 上書하여 말하기를 ‘臣이 삼가 이미 받았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詔勅으로 中郎將 韓隆, 王昌, 副校尉 甄阜, 侍中謁者 帛敞, 長水校尉 王歙 등을 匈奴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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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內屬 : 漢代에는 외국과 관계를 가질 때 內臣과 外臣을 구분했는데, 전자는 納質內屬한 西域 36국과 같은 경우이고, 후자는 重譯貢獻하는 파미르 이서의 遠邦의 경우였다. 이 같은 구분은 『後漢書』 「西域傳․叙」에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 內臣과 外臣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①邊關을 除去하느냐, ②漢조정이 任官權을 장악하느냐, ③漢法을 시행하느냐의 여부에 있었다. 또한 內臣이 되면 수행해야 할 의무로는 ①質子를 보내고, ②土物을 貢獻하며, ③出兵助戰하여, ④漢軍에게 軍糧을 제공하고, ⑤天子의 詔書가 없이는 함부로 兵馬를 발동하지 못하며, ⑥다른 屬部로부터 人質을 받아서는 안 되며, ⑦漢人 및 다른 屬部의 逃民과 叛臣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점 등이 꼽히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한나라가 中郞將 王昌을 흉노에게 보내서 去胡來王 唐兜의 투항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도, 바로 匈奴가 漢의 內臣․屬部로서의 의무를 수행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漢代 屬部의 지위와 의무에 대해서는 賈叢江(200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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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中郎 : 中郞將과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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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王萌 : 『漢書』 卷99中 「王莽傳」에 따르면 그는 始建國 2년(후10) 十二月 王莽의 명령을 받고 ‘平狄將軍’이라는 직함을 갖고 代郡을 나서서 흉노로 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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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惡都奴 : 顔師古는 服虔을 인용하여 “西域의 계곡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西域傳」에 보이는 伊吾盧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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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逢受 : 顔注 : “逢受는 먼저 가서 마중한다는 뜻이다. 즉 逢見하여 受取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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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당두(唐兜), 단흠(但欽), 당두, 단흠, 신도후(新都侯), 왕망(王莽), 왕창(王昌), 고구, 당두, 왕망, 왕맹(王萌), 왕망, 고구, 당두
지명
한나라,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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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姑句)와 당두(唐兜)가 흉노에 투항하자 왕망이 이들을 참수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6_054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