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의 두 번째 질의서
두 번째 회답한 서계 가운데, ‘뜻하지 않게 귀국의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왔다.’는 말과 ‘귀국의 사람들이 우리 국경을 침범하였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삼가 살펴 보건대, 두 나라가 우호 관계를 맺은 이후 죽도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다 표류한 백성들을 귀국의 예조에서 서신과 함께 보내 준 것이 이번 일 이전에도 78년과 59년과 30년, 무릇 세 차례나 됩니다.주 001
각주 001)
그렇다면 우리나라 변방의 백성들이 그 섬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는 일이 어찌 귀국에서 익히 알고 있는 바가 아니었겠습니까? 재작년에 우리 백성들이 고기잡이를 하러 가서 국경을 넘어 경계를 침범하였다면, 이 앞의 세 차례의 서신에서는 무슨 까닭으로 그 국경을 넘어 경계를 침범하였다는 뜻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앞의 세 번의 서신에서는 일찍이 조금도 언급한 일이 없다가,주 002 전날의 회답 서계에서 갑자기 ‘마음대로 국경을 넘어 왔다’느니 ‘우리 국경을 침범하였다’느니 말한 것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분명하게 밝혀 주십시오.이것은 본 서한이 작성된 元祿 8년(1695) 시점에서 각각 약 78년 전(1618년), 59년 전(1637년), 30년 전(1666년)에 울릉도에 도항한 일본인이 조선에 표착하여 쓰시마번을 통해 일본으로 송환된 사건을 가리킨다.
1618년 이즈모노쿠니(出雲國: 시마네현) 미호노세키(三尾關: 美保關)의 주민 馬多伊 등 7명이 울릉도에서 어획하던 도중 풍파를 만나 조선에 표착하였는데, 1618년(萬曆 46), 예조참의 이명남(李命男)의 서계와 함께 표류민은 쓰시마번에 인도되었다(『通航一覽』第3, 609쪽. 『交隣知津錄』 「和漂民送來之例」, 『善隣通書』17).
1637년 돗토리번 요나고(米子)의 초닌(町人) 무라카와(村川)씨의 선박이 울릉도에 갔다가 울산에 표착하여 송환되었다. (宗家記錄, 「深見弾右衛門古帳之写」)
1666년에는 돗토리번 요나고의 초닌 오야(大谷)씨의 선박 2척이 울릉도에서 귀국 길에 조선에 표착, 쓰시마번을 통해 1667년에 귀향했다. (『因府年表』寬文 7년(1667) 3월 22일, 『竹島考』上卷, 「渡海之調艤並物産」)
1618년 이즈모노쿠니(出雲國: 시마네현) 미호노세키(三尾關: 美保關)의 주민 馬多伊 등 7명이 울릉도에서 어획하던 도중 풍파를 만나 조선에 표착하였는데, 1618년(萬曆 46), 예조참의 이명남(李命男)의 서계와 함께 표류민은 쓰시마번에 인도되었다(『通航一覽』第3, 609쪽. 『交隣知津錄』 「和漂民送來之例」, 『善隣通書』17).
1637년 돗토리번 요나고(米子)의 초닌(町人) 무라카와(村川)씨의 선박이 울릉도에 갔다가 울산에 표착하여 송환되었다. (宗家記錄, 「深見弾右衛門古帳之写」)
1666년에는 돗토리번 요나고의 초닌 오야(大谷)씨의 선박 2척이 울릉도에서 귀국 길에 조선에 표착, 쓰시마번을 통해 1667년에 귀향했다. (『因府年表』寬文 7년(1667) 3월 22일, 『竹島考』上卷, 「渡海之調艤並物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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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이것은 본 서한이 작성된 元祿 8년(1695) 시점에서 각각 약 78년 전(1618년), 59년 전(1637년), 30년 전(1666년)에 울릉도에 도항한 일본인이 조선에 표착하여 쓰시마번을 통해 일본으로 송환된 사건을 가리킨다.
1618년 이즈모노쿠니(出雲國: 시마네현) 미호노세키(三尾關: 美保關)의 주민 馬多伊 등 7명이 울릉도에서 어획하던 도중 풍파를 만나 조선에 표착하였는데, 1618년(萬曆 46), 예조참의 이명남(李命男)의 서계와 함께 표류민은 쓰시마번에 인도되었다(『通航一覽』第3, 609쪽. 『交隣知津錄』 「和漂民送來之例」, 『善隣通書』17).
1637년 돗토리번 요나고(米子)의 초닌(町人) 무라카와(村川)씨의 선박이 울릉도에 갔다가 울산에 표착하여 송환되었다. (宗家記錄, 「深見弾右衛門古帳之写」)
1666년에는 돗토리번 요나고의 초닌 오야(大谷)씨의 선박 2척이 울릉도에서 귀국 길에 조선에 표착, 쓰시마번을 통해 1667년에 귀향했다. (『因府年表』寬文 7년(1667) 3월 22일, 『竹島考』上卷, 「渡海之調艤並物産」) - 각주 002)
색인어
- 지명
- 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