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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고산리고분

孤山里古墳
  • 저필자
    문수균(미래문화재연구원)
  • 날짜
    1937
  • 시대
    삼국
  • 위치
  • 원소장처
    평양시 대성구역 고산동
  • 시대
    상고사
  • 유형
    무덤
규모
높이: 50~60cm
유적개관
봉분은 없어지고 유물들은 50~60㎝ 깊이에 있었음.
출토유물
* 세형동검, 동주식동검, 청동자귀
해설
평양 고산동 고분군은 대성산의 소문봉 서남쪽 기슭에서 대동강 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구릉 기슭에 조성된 20여 기의 고구려시대 무덤들로 이루어졌다. 발굴조사된 고분 가운데 6개는 벽화고분이다. 이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한 차례 조사되었고 해방 이후 5차례의 대성구역 고구려 고분군 발굴을 통해 무덤의 구조와 벽화의 내용이 알려졌다.
고산동1호분은 발굴 당시 방대형인 봉토의 밑면 한 변 길이는 20m 가량이었다. 무덤칸은 반지하에 조성되었으며 무덤 방향은 서쪽으로 치우친 남향이다. 연도는 현실 남벽 동쪽에 치우쳐 설치되었다. 현실과 연도로 이루어진 단실묘(單室墓)로 무덤칸 상부의 파괴가 심하여 천장구조는 알 수 없다. 벽화의 주제는 생활풍속과 사신이며, 연대는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고산동 7호분 봉토의 외형은 방대형이며 무덤의 방향은 서쪽으로 치우친 남향이다. 연도와 측실이 있는 장방형의 전실(前室), 묘도(墓道), 현실(玄室)로 이루어진 이실묘(二室墓)이다. 앞방 서쪽 측실의 천장은 평행고임 위에 꺾음천장이 더하여진 이른바 배집천장이며, 동쪽 측실의 천장은 평행삼각고임이다. 벽화는 회벽이 대부분 떨어져 나가 내용을 자세히 알기 어렵다. 축조연대는 5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산동 9호분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발굴 당시 봉토의 외형은 방대형이었다. 무덤칸은 반지하에 조성되었으며 무덤 방향은 서쪽으로 치우친 남향이다. 연도와 좌우 측실이 있는 전실, 묘도, 현실로 이루어진 이실묘(二室墓)이다. 파괴가 심하여 천장구조는 알 수 없다. 회벽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현실 동벽의 밑 부분에 넓은 장식띠를 돌리고 그 위에 청룡을 그린 흔적이 남아있다. 축조는 5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산동 10호분 봉토의 외형은 방대형이며 무덤의 방향은 남향이다. 연도와 좌우 측실이 있는 장방형의 전실, 묘도, 현실로 이루어진 이실묘(二室墓)로 전실 좌우의 측실은 배집천장이며, 전실과 현실 천장은 파괴되어 그 구조를 알 수 없다. 회벽 위에 그림을 그렸으나 회벽이 심하게 떨어져 일부만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두 개의 측실을 지닌 전실과 정방형의 현실, 벽화구성 등으로 볼 때 고산동 10호분의 축조는 5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산동 15호분은 무덤칸의 파괴 정도가 심하여 구조와 축조방법을 파악하기 어렵다. 벽화는 생활풍속과 사신을 주제로 구성되었거나 단일 주제로서의 사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잔존상태, 벽화 내용 등으로 보아 고산동 15호분의 축조는 5세기 후반이나 이보다 늦은 시기에 이루어진 듯하다.
고산동 20호분의 무덤방향은 남향이다. 연도와 현실로 이루어진 단실묘(單室墓)로 연도는 현실 남벽의 동쪽에 치우쳐 축조되었다. 무덤칸은 반지하에 축조되었고, 무덤칸 천장부는 무너지고 벽체의 상당 부분도 파괴된 상태이다. 무덤의 구조, 벽화 내용으로 보아 고산동 20호분의 축조는 5세기 전반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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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리고분 자료번호 : isea.d_0001_0040_0070_006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