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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키노발해성

2. 크라스키노성 발굴 경과

크라스키노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1980년에 러시아과학원 극동지소 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의 V.I.볼딘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후 2018년까지 크라스키노성에서는 모두 53개의 발굴구역을 설정하여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도면 06). 발굴조사 지역은 크게 성 내의 서북지역, 중북지역, 중남지역 광장 일대, 동문지 일대로 각각 구분된다. 서북지역과 중북지역은 다시 서북지역 북부 사찰구역,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 서북지역 동부 일대, 서북지역 동북부 일대, 서북지역 서부 도로구역, 중북지역 도로-주거구역, 중북지역 북부 일대로 세분된다(도면 07; 08).
도면 06 | 크라스키노성 평면도
도면 07 | 크라스키노성 서북지역과 중북지역 구획도
도면 08 | 크라스키노성 서북-중북지역 전체 평면도
발굴조사는 먼저 서북지역의 동북부 일대와 사찰구역에서 시작되었다. 크라스키노성의 서북지역에서 처음 발굴조사가 시작된 것은 이곳에 나지막한 둔덕이 형성되어 있어 성의 내부와 외부가 다 잘 조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이곳에서는 1980년에 처음 설정한 서북지역 동북부 일대의 제1구역과 제2구역에서 1호 가마가 조사되었고, 또 서북지역 사찰구역에 설정한 시굴피트(제3구역)에서 다량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곳에 크라스키노성에서 매우 중요한 시설들이 위치하였다는 사실이 파악되었고 이후의 발굴조사는 기와가 다량으로 확인된 사찰구역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1981년에는 작은 시굴피트로 된 제3구역을 포함하는 제5구역을 설정하여 위 생활면 금당지의 존재를 확인 후 조사하였다. 1981년에는 제1구역의 남쪽으로 확장을 한 제4구역도 조사하였다.
1983년에는 금당지 남쪽과 동북쪽에 각각 설정한 제6구역과 제7구역을 조사하였다.
1990년에는 금당지의 동쪽에 설정한 제8구역을 조사하였다.
1994년에는 다시 금당지의 남동쪽과 남서쪽에 제9구역과 제10구역을 각각 설정하여 조사하였다. 제9구역에서는 전각지, 1994-1호 가마(나중에 2호 가마로 개칭), 1994-2호 가마(나중에 3호 가마로 개칭) 등의 유구가, 제10구역에서는 석축담장과 담장 내 중문지가 각각 발굴되었다.
1995년과 1996년에는 금당지 남쪽에 설정한 제11구역과 남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설정한 제12구역에서 각각 조사를 실시하였다. 제12구역에서는 석축담장 서서북쪽의 나머지 부분이 발굴되었다.
1997년에는 금당지를 기준으로 하여 남서쪽과 서쪽에 제13, 제14, 제15구역을 설정하였다. 제14구역에서는 성벽에 대한 절개조사가 실시되었고, 제15구역에서는 우물, 4호 가마, 중간 생활면 금당지 담장의 남쪽부분이 각각 조사되었다.
1998년에는 금당지의 서쪽과 서북쪽에 제16구역과 제17구역을, 남쪽 조금 떨어진 곳에 제18구역을 각각 설정하였다. 제16구역에서는 5호 가마, 6호 가마, 7호 가마, 8호 가마, 9호 가마, 19호 가마, 노(爐)를 조사하였고, 또한 제16구역과 제17구역에서는 중간 생활면 금당지 담장의 북쪽 부분을 노출시켰다. 또한 제15구역의 우물에 대한 발굴조사를 마무리 하였고, 제14구역의 성벽 부분에서 배수로를 추가로 조사하였다.
1998년에는 또한 성의 동벽과 동문지에 제19구역과 제20구역을 각각 설정하여 동문지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작하였다.
1999년에는 금당지의 북쪽으로 제21구역과 제22구역을 설정하여 중간생활면 금당지를 노출시켰다.
1999년에는 또한 사찰구역의 남쪽으로 제23구역을 설정하여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작하였다. 다만 제23구역에서는 따로 유구가 노출되지는 못하였다.
1999년에는 또한 동벽에 설정한 제19구역의 서쪽 성 내에 설정한 제24구역을 조사하였다.
2000년에는 금당지에서 동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설정한 제25구역을 조사하였다.
2001년에는 제25구역에서 11호 가마, 12호 가마, 추정가마자리 등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제29구역은 제25구역에 바로 인접하여 동쪽에 설정한 것이다.
제26구역과 제27구역은 사찰구역 석축담장의 남쪽에 있는 제23구역의 서쪽과 남쪽에 각각 설정한 것이다. 제28구역은 전각지의 남동쪽에 설정한 것이다.
2002년에는 금당지 동북쪽에 해당하는 곳에 제30구역을 설정하였다.
2003년과 2004년에는 제30구역의 남쪽에 설정한 제31구역에서 와실유구를 조사하였다. 이곳은 금당지의 동쪽에 해당된다.
2005년에는 사찰구역의 남동쪽과 북동쪽에 각각 제32구역(혹은 제33a구역)과 36구역을 설정하여 조사를 하였다. 제33a구역에서는 초석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2005년에는 또한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에 제34구역을 조사하기 시작하여 1호 주거지와 2호 주거지를 노출시켰다.
2006년에는 제33a구역에서 초석 건물지를 계속 조사하였다. (이곳은 2005년에 제32구역으로 지칭하였고, 또 2005년에 제33구역의 확장이라고 하였지만, 2005년도 도면에는 33a구역으로 표시되어 있고, 또 2006년도에 제33a구역이라 하였다).
2006년에 제34구역에서는 제3생활면에 속하는 3호 주거지와 4호 주거지, 그리고 5호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2006년에는 또한 중북지역 북부 일대에 제35구역을 설정하여 조사하였다. 제35구역에서는 적석유구가 조사되었다.
2007년에는 제34구역, 제37구역, 제38구역을 조사하였다. 제34구역에서는 제5생활면에서 6호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제37구역은 초석 건물지의 동쪽에 위치한다. 제37구역과 그 동쪽의 발굴구역들에서 조사된 유구들은 사실상 서북지역 북부 사찰구역과는 다른 양상이다. 이곳은 서북지역 동부 일대로 따로 구분하기로 한다.
제38구역은 중북지역 북쪽 일대에 설정된 제35구역을 동쪽으로 확장한 것이다.
2008년에는 제37구역, 제40구역, 제41구역을 조사하였다. 제40구역은 제34구역의 남쪽에 위치한다. 제41구역은 제37구역의 북쪽에 위치한다. 제41구역에서는 7호와 8호 주거지 등이 조사되었다. 제40구역에서는 제2생활면에서 9호 주거지가, 제3생활면에서 10호, 11호, 14호, 15호 주거지 등이 조사되었다.
2009년에는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에 위치하는 제40구역과 서북지역 동부 일대에 위치하는 제41구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하였다. 그 외에도 2009년에는 중남지역(남문지 북쪽) 광장 일대에 설정한 제42구역도 조사를 하였다.
2010년에는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에 위치하는 제44구역과 서북지역 동부 일대에 위치하는 제45구역을 조사하였다.
2011년에는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의 제48구역, 서북지역 동부 일대의 제45구역, 그리고 중북지역의 제47구역에서 조사를 하였다.
2012년에는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의 제44구역과 제48구역, 중북지역의 제47구역을 조사하였다.
2013년에는 제44구역과 제47구역을 조사하였다.
2014년에는 제44구역과 중북지역의 제49구역을 조사하였다.
2015년에는 제44구역, 사찰구역 남서쪽의 제51구역, 중북지역의 제50구역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2016년에는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의 제48구역에 대해 조사를 하였다.
2017년과 2018년에는 서북지역 사찰구역 석축담장 남서쪽의 제51구역과 중북지역의 제53구역에서 조사를 하였다.
크라스키노성에서의 발굴조사는 대한민국과 러시아의 공동발굴조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몇 개의 단계로 구분이 된다. 제1기에는 러시아에서 단독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1980~1981년, 1983년, 1990년의 발굴조사가 이 단계에 해당한다. 제2기는 1994년부터 2003년까지로서 대한민국의 대륙연구소(1994년), 한국미술사연구소(1998년), 그리고 고구려연구회(2001~2002년)가 각각 공동으로 발굴조사를 수행하기도 하고 또는 러시아가 단독(1995년, 1997년, 2003년)으로 발굴조사를 수행하기도 한 시기이다. 제3기는 2004년부터 2006년까지 고구려연구재단이 공동으로 발굴조사를 수행한 시기이다. 제4기는 2007년부터 2010년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동북아역사재단이 부경대학교와 함께 러시아와 공동으로 발굴조사를 수행하였다. 제5기는 2011년부터 2018년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동북아역사재단이 한국전통문화대학교와 함께 러시아와 공동으로 발굴조사를 수행하였다.
제1기에는 제1구역~제8구역이 조사되었다. 1980년에 가장 먼저 발굴조사가 시작된 지점은 서북지역 동북부 일대로서 이곳의 제1구역과 제2구역에서 1호 가마가 발굴되었다. 당시 제3구역으로 설정한 곳에서 금당지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1981년에 이곳에 제5구역을 설정하여 위생활면 금당지를 발굴하였다. 1983년과 1990년의 발굴조사는 금당지의 주변으로 남서쪽 및 동쪽으로 확장조사를 한 것이었다. 이곳은 서북지역 사찰구역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제2기에는 서북지역 사찰구역인 제9구역~31구역을 조사하였다. 1994년에 대륙연구소와의 공동조사에서 제9구역에서는 전각지와 함께 2기의 가마가, 제10구역에서는 사찰구역의 석축담장 동남쪽 부분 및 중문지가 각각 발굴되었다. 1995년과 1996년에는 제12구역에서 사찰구역 석축담장의 북서쪽 부분과 성벽 일부 그리고 도로 일부를 각각 조사하였다. 1997년에는 사찰구역 석축담장과 서쪽으로 인접하는 제14구역에서 성벽 단면조사를 하였고, 그 외에도 제15구역에서 겹 놓인 상태의 가마들과 함께 우물도 조사를 하였다. 이때 제15구역에서는 중간 생활면 금당지의 석축담장 남서쪽 끝부분 일부가 노출되었다1. 998년에 한국미술사연구소와 공동으로 조사할 때에는 제16구역과 제17구역에서 가마들과 함께 중간생활면 금당지의 석축담장 중간 및 북동쪽 부분을 노출시켰다. 1999년에는 제21구역에서 중간생활면 금당지를, 사찰구역 석축담장의 남쪽에 설정한 제23구역을 각각 조사하였다. 2001년과 2002년에 고구려연구회와 공동으로 발굴조사를 할 때에는 금당지의 북동쪽으로 제25구역, 제29구역, 제30구역을, 그리고 사찰구역 석축담장의 남쪽으로 제26구역과 제27구역을 각각 설정하여 조사를 하였다. 2003년에는 제31구역에서 와실유구를 조사하였다.
제3기는 고구려연구재단과 공동발굴조사를 수행한 시기이다. 2004년에는 제31구역에서 와실유구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하였다. 2005년에는 서북지역 북부 사찰구역과 석축담장 남쪽의 주거구역에서 동시에 조사를 진행하였다. 서북지역 북부 사찰구역에서는 제32구역과 제33a구역에서 장방형 초석 건물지를 조사하였다.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에서는 제34구역을 설정하여 구들이 시설되어 있는 1호 주거지와 2호 주거지를 노출시켰다. 2006년에는 제33a구역에서 초석 건물지를 계속 조사하였고, 또한 제34구역에서는 제3생활면에 속하는 3호, 4호, 5호 주거지를 조사하였다.
와실유구 혹은 기와벽실 유구는 기와로 벽을 쌓은 반지하형의 정방형 건축물이다. 이 속에서는 고누판, 고누알(놀이알), 원숭이 조각상, 낫, 삽 등 철제유물, 머리핀 등 청동유물, 수레바퀴 차축과 비녀못 등 주철제 유물, 각 종토기, 항아리 등이 출토되었다. 와실유구는 염주성 발해인의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타임캡슐이었다. 와실유구에서 수습한 목탄의 AMS측정결과 보정연대 A.D.840이 검출되었는데 이것은 와실유구가 해동성국 발해의 문화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유구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특히 고누판은 출토 당시에는 단지 사암제 판석(砂岩製板石) 정도로 이해했지만, 와실유구에서 출토한 고누판을 통해 ‘고누 문화’가 10세기 전후시기에 제주도, 한반도, 연해주, 중원, 그리고 몽골지역까지 연결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은국은 이러한 분석 결과를 통해 염주성을 중심으로 한 ‘고누의 길’을 설정한 바 있다.주 001
각주 001)
김은국(2014), 「한-몽 발해유적과 ‘고누 길’」, 『역사민속학』 46집, 한국역사민속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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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인 제34구역에서 조사된 1호 주거지 온돌은 발해시기 난방문화의 연해주 확산을 증명하였다. 이 온돌은 지금까지 발굴된 발해 온돌 시설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주거지의 전체 규모는 9×6.4m, 총면적은 약 57㎡이다. 또 온돌은 두 고래 ‘ㄷ’ 자형 구조이며, 온돌의 북서구간은 길이5 m, 남동 구간은 길이 4.4m, 고래의 폭은 평균 22~30㎝, 온돌의 폭은 남동, 북서 구간 모두 1.2m이다. 그 외에 아궁이 2기와 굴뚝, 거주지 입구 등을 발굴하였다. 이곳은 성내에서 가장 높은 서북지역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성내 핵심 지역에 온돌 시설인 고래를 설치한 주거지의 확인은 바로 염주성의 위상을 강조하기 충분한 것이다. 2005년도에는 목탄의 AMS측정 보정연대가 2건 검출되었는데 A.D.540과 A.D.620이었다. 이 연대는 크라스키노성에서의 주민들의 거주시기가 발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갈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2006년에 제33a구역에서 조사를 완료한 장방형 초석 건물지는 초석이1 6개인 3칸×5칸 크기의 건물이다. 이 건물의 성격은 발해 사원의 부속 건물로 파악하였다.
제4기인 2007년부터 2010년까지는 동북아역사재단이 부경대학교와 함께 러시아와 공동으로 발굴조사를 수행하였다. 2007년에는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의 제34구역, 서북지역 동부 일대의 제37구역, 중북지역 북부 일대의 제38구역을 각각 조사하였다. 2007년에는 태풍 등 악천후로 인해 발굴조사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중요한 성과 중의 하나는 제34구역에서 발해 문화의 이른 단계에 해당하는 제5생활면에서 6호 주거지를 조사한 것이다. 2007년도 조사에서 채취한 목탄시료에서 690AD, 640AD, 740AD, 680AD 등의 AMS 연대가 검출되었는데 7세기 중반~8세기전반 대에 해당된다. 2005년 이후 러시아 측은 지구 물리학적 조사를 실시하는 등 크라스키노성에 대한 다양한 각도에서의 자연과학적 분석을 실시하고 있다.주 002
각주 002)
E.I.겔만 / 정석배 역, 2010, 「러시아 연해주 발해유적 발굴의 현황과 의의」, 『高句麗渤海硏究』 第38輯, 高句麗渤海學會. E.A. Bessonova, 2007, “Application of micromagnatic mapping for defining geological and anthropogenic heterogeneities in recent coastal sediments of the Ekspeditsii Bay” Russian Journal of Pacific Geology vol.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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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는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의 제40구역, 서북지역 동부 일대의 제37구역과 제41구역에서 각각 발굴조사를 하였다. 제40구역에서는 제2생활면에 속하는 9호 주거지와 제3생활면에 속하는 10호, 11호, 14호, 15호 주거지가, 제41구역에서는 7호와 8호 주거지가 각각 조사되었다.
2009년에는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의 제40구역, 서북지역 동부 일대의 제41구역, 그리고 남문지 북쪽 광장구역의 제42구역에서 각각 발굴조사를 하였다. 남문지 북쪽 광장구역에 대한 발굴조사는 처음 실시한 것이다. 발굴조사지점은 지구 물리학적 탐사결과를 토대로 선정하였다. 4×16m 크기로 설정한 제42구역에서는 1m 깊이까지만 발굴을 하였고 그 아래는 지하수의 분출로 인해 발굴을 하지 못하였다. 이곳에서는 도로의 흔적으로 보이는 유구가 확인되었고 수레바퀴 자국의 존재가 제기되었다. 하지만 크라스키노성 중북지역에서 조사된 돌을 깔은 도로의 존재로 볼 때에 이곳의 도로로 추정된 유구는 도로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이곳에서는 각종 동물 뼈, 패각, 토제 및 철제 유물, 토기편 등등이 출토되었다. 이곳의 발굴조사는 기존의 서북지역 중심의 발굴조사에서 벗어난 것이었으나, 지하수가 지속적으로 분출되는 저지대인 관계로 발굴조사가 쉽지 않았다.
2010년에는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의 제44구역과 서북지역 동부 일대의 제45구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각각 시작하였다. 제44구역에서는 2008년의 돌담유구와 연장선상으로 돌담유구의 서쪽 모서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출토유물은 청동제 판, 철판, 철촉, 철도, 철고리, 철못 등이 있다. 제44구역에서는 2호 건물지의 초석도 확인되었다. 이 초석 주변에서 다량의 와편, 수레바퀴 관련 부속품, 철제 못, 토기와 기와로 만든 놀이 알 등이 출토되었다. 제45구역에서는 주거지 2기와 수혈유구 5기가 확인되었다. 그중 16호 주거지와 관련되어 화구와 온돌시설이 확인되었다. 온돌은 2고래로 확인되었지만 정형하게 잘 남아 있지는 않았다. 이 주거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철제 못, 삽 손잡이, 고리, 화살촉, 청동제품의 편, 자기편, 토기편과 기와로 제작된 놀이 알 등이 확인되었다.
제5기인 2011년부터 2018년까지는 동북아역사재단이 한국전통문화대학교와 함께 러시아와 공동으로 발굴조사를 수행하였다. 제5기에는 동북아역사재단과 러시아과학원 극동지소 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와의 한・러 공동발굴조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이 있었다. 그것은 그 이전까지는 러시아와 한국의 발굴조사단이 모두 함께 크라스키노성 내의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왔다면, 2011년부터는 발굴조사를 이원화하여 러시아 발굴조사단은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한국 발굴조사단은 중북지역을 중심으로 각각 발굴조사를 수행한 것이다.
발굴조사지역에 중북지역을 포함하게 된 계기는 E.A.베쏘노바가 지자기탐사를 통해 제시한 크라스키노성 내에 고구려시기로 추정되는 내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었다주 003
각주 003)
E.A. Bessonova, 2007, “Application of micromagnatic mapping for defining geological and anthropogenic heterogeneities in recent coastal sediments of the Ekspeditsii Bay” Russian Journal of Pacific Geology vol.1, no.6, pp.537~549 : 베스손노바 E.A., 이블리예프 A.L., 겔만 E.I., 「고고학 과제들의 해결을 위한 염주 성에서의 지질-지구물리학적 및 지구화학적 방법의 적용」 『발해: 역사와 고고학- 』염주 성 고고학조사 시작 3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발표문(노문), 블라디보스토크, 2010, 20~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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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문에 2011년에 중북지역에 처음 설정한 발굴구역인 제47구역은 추정 내성의 서벽과 직교하는 방향이 되게 남동-북서 방향으로4× 35m 크기로 구획을 한 것이었다. 나중에 2013년에는 다시 남동쪽으로 21m를 더 확장하여 결과적으로 2011년과 2013년에 전체 길이 56m까지 내성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E.A.베쏘노바가 제기한 내성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중북지역에서는 돌을 깔은 도로가 동서방향 및 남북방향으로 노출되었는데 아마도 이 도로의 일부가 지자기탐사에서 내성 성벽의 일부로 해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중북지역에서의 발굴조사는 새로운 많은 성과를 주었다.
2011년에는 중북지역에 설정한 제47구역에서 18호 주거지와 석축담장 기초의 일부가 발굴되었고, 남북 방향 도로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제47구역의 섹터 3에서 확인된 도로는 너비가 약 6m이며, 상면에 자갈과 모래를 깔았다. 18호 주거지에서는 2줄 고래의 구들을 시설하였고 할석과 강돌을 사용하여 고래 둑을 조성한 것이 확인되었다.
2011년에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에서는 제48구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작하였다. 또한 사찰구역 동부 일대에 설정한 제45구역에서의 발굴조사를 마무리하였다.
2012년에는 중북지역에서는 제47구역 북서쪽 섹터 1과 섹터 1’에서 확인된 석축담장 기초의 남쪽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그 남쪽으로 섹터 4와 섹터 5를 설정하여 확장조사를 하였다. 이곳에서는 석축담장 기초가 마무리되는 곳에 바로 인접하여 19호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2줄 고래의 구들이 있는 이 주거지에서는 다른 많은 유물들과 함께 크라스키노성에서는 처음으로 철제 창이 3점이나 출토되었다. 또한 그 외에도 발해유적 전체에서 처음으로 다듬잇돌도 출토되었다.
2012년에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에서는 제44구역과 제48구역에서 계속해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제48구역에서는 쌍봉낙타의 뼈가 출토되었는데 이것도 발해유적 전체에서 처음 발견된 유물이다. 쌍봉낙타의 뼈는 발해가 서역과 직접 교류하였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유물이자 동시에 크라스키노성이 발해시기 교통로의 한 거점이었음을 실증적으로 증명하는 유물이다.
2013년에는 중북지역에서는 제47구역의 남동쪽으로 섹터 6, 섹터 7, 섹터 8을 설정하여 확장조사를 하였다. 2013년도 발굴조사 기간은 크라스키노성 발굴조사에서 최악의 악천후를 기록한 때였다. 장기간에 걸친 태풍과 심한 강수량으로 인해 발굴조사 현장만 침수된 것이 아니라 강물이 범람하였고 발굴조사단의 캠프까지도 함께 침수되었다. 때문에 발굴조사단은 일정기간 캠프에서 크라스키노 마을의 체육관으로 철수를 하였고, 비가 그친 다음에는 오랫동안 멀리 마을의 철길을 돌아 발굴현장으로 내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섹터8에서 동서방향의 도로의 존재를 확인하였고, 또 섹터6 에서 방형의 청동거울을 출토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발해유적에서는 아직 청동거울이 매우 드물게 발견된다. 크라스키노성을 제외하고는 홍준어장 고분군,주 004
각주 004)
黒龍江省文物考古研究所 編著(2009), 『寧安虹鱒魚場: 1992~ 1995年度渤海墓地考古発掘報告 上下』文物出版社, 圖版 138 및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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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 고분군,주 005
각주 005)
魏存成(2008), 『渤海考古』, 文物出版社, 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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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 용해고분군주 006
각주 006)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ㆍ延邊朝鮮族自治州文物管理委員會辦公室, 「吉林和龍市龍海渤海王室古墓葬發掘簡報」, 『考古』 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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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서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그 외 상경성, 육정산고분군, 니꼴라예브까2 성, 오매리탑터 1호 건축지 등에서도 거울이 출토된 것이 있다. 제47구역 섹터 8에서 확인된 동서방향 도로의 존재는 2011년에 제47구역 섹터 3에서 확인된 남북방향의 도로와 직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2013년에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에서는 제44구역에 대한 발굴조사에 집중하였다.
2014년에는 중북지역에 제49구역을 설정하여 남북방향 및 동서방향으로 직교하는 도로의 존재를 밝혀내었다. 이곳에서 남북 도로는 16.3m, 동서 도로는 29m가 노출되었다. 도로에는 작은 돌과 자갈이 깔렸고, 잘게 깨트린 토기편과 와편, 동물 뼈, 고누 알, 공기놀이 돌, 철제와 청동제 유물 등이 발견되었다. 정연한 도로망에 의한 도시구획은 지금까지 발해유적에서는 발해 상경도성 이외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동서, 남북 방향의 도로와 교차로는 발해의 지방성들에도 정연한 도시구획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여 주는 것이다. 도로에서 입방체 구조를 가진 토제 탑 모형이 1점 발견된 것이 있다.
이 입방체 토제 탑 모형은 원추형이며 높이는 14.2㎝이다. 이 형태의 탑 모형은 발해유적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이 유물은 정상 부분을 포함하여 모두9 층인 탑의 형태를 연상시킨다. 이 토제 탑 모형은2 004년 와실유구에서 출토된 사원 형태를 한 유물과 비교될 수 있겠고, 발해의 불탑과 발해의 종교문화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이다.
2014년에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에서는 계속해서 제44구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2015년에는 중북지역에서는 제50구역과 제47구역의 섹터 2에서 발굴조사를 하였다. 제50구역에서는 섹터 2와 섹터 3에서 동서방향의 도로가 노출되었는데 제47구역의 섹터 8 및 제49구역에서 노출된 동서방향 도로와 서로 연결되는 방향이었다. 따라서 중북지역의 동서방향 도로는 모두6 2.5m가 확인된 셈이다. 제50구역에서는 도로 이외에도 저장시설인 움이 4개 발굴되었다. 움에서는 동물 뼈, 대형 토기편, 부싯쇠, 방추차편, 철제 꺽쇠, 허리띠 과대장식, 다공입방체 유물편, 각종 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1호 움에서는 편병(扁甁)이 1점 출토되었는데 이 편병은 1997년에 우물에서 출토된 편병과 함께 발해와 신라가 바닷길을 통해서도 교류하였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제47구역의 섹터 2에서는 다른 많은 유물들과 함께 청동 낙타상이 1점 출토되었다. 쌍봉낙타를 주조하여 만든 것인데 크기는 1.8×1.9㎝이며, 낙타의 세부 특징들을 매우 자세하게 표현해 놓았다. 이 유물은20 12년에 출토된 쌍봉낙타의 뼈와 함께 염주성까지 서역의 상인들이 직접 왔을 가능성도 보여 준다.
2015년에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에서는 제44구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마무리하였다. 제44구역에서는 깊이 2.3m의 토층에서 모두 6개의 생활면이 확인되었다. 제44구역 서쪽 섹터의 서벽과 남벽에서는 각 생활면에 속하는 유구들이 층위에 의해 구분되었다. 제44구역의 북쪽에 위치하는 제40구역과 더 북쪽의 제34구역에서는 모두 5개의 생활면이 구분된 바 있는데주 007
각주 007)
E.I.겔만, 정석배 역, 「러시아 연해주 발해유적 발굴의 현황과 의의」, 『高句麗渤海硏究』 第38輯, 高句麗渤海學會, 2010, 268쪽 도면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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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 생활면은 크라스키노성에서의 생활이 발해 이전부터 있었을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는 것이었다. 제50구역의 서벽과 남벽에서는 토층의 구분이 분명한 상태에서 채취한 목탄시료들에서 다수의 방사성탄소연대가 확보되었다. 생활면의 구분과 방사성탄소연대들에 근거하여 가장 아래의 제6생활면은 발해 이전 고구려시기에 존속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또한 발해시기에 고구려 문화층 위로 성토다짐을 하여 서북지역에 축조할 건축물들을 위한 대지를 조성하였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2015년에는 그 외에도 서북지역 사찰구역 남서쪽의 제51구역에서 도로에 대한 조사를 다시 시작하였다. 제51구역은 1995~1996년에 설정한 제12구역과 일부 겹치며, 이곳 도로의 존재는 제12구역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제51구역을 새로 설정하여 이곳의 도로를 다시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북쪽으로 인접한 사찰구역 석축담장 및 서쪽으로 인접한 성벽과의 시간적 선후관계를 각각 밝히기 위함이었다.
2016년에는 러시아 발굴조사단이 단독으로 제48구역의 동쪽 섹터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2017년과 2018년에 중북지역에서는 제53구역에서 각각 발굴조사를 하였다. 제53구역에서는 26호, 25호, 27호 주거지가 조사되었는데 모두 구들 주거지이다. 그런데 제1생활면에 속하는 26호 주거지와 제2생활면에 속하는 25호 주거지는 서로 겹 놓인 상태로 노출되었다. 아래에 위치하는 25호 주거지는 26호 주거지에 의해 일부가 덮여 있다. 이 주거지들에 대해서는 발굴조사를 마무리하지 못하였는데 추가의 발굴조사가 필요하다. 또한 제53구역의 남서섹터에서는 19세기 말~20세기 초로 편년되는 저장구덩이들도 3기 조사되었다.
2017년과 2018년에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에서는 제48구역의 동쪽섹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마무리하였다. 서북지역 사찰구역 남서쪽 제51구역에서는 이곳의 도로에 대한 조사도 마무리하였다. 그 결과 제51구역의 도로는 모두 5개의 생활면으로 구분되었고, 인접한 사찰구역 석축담장과 성벽과의 상대적인 축조순서가 확인되었다. 도로 자체의 방향이 가장 아래의 도로 제5생활면과 제4생활면은 북동-남서 방향으로 곧게 사찰구역 석축담장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석축담장 아래로 나있었는데 이것은 도로 제5 및 제4생활면은 석축담장보다 이른 시기의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 위에 도로 제3생활면과 제2 및 제1생활면은 도로가 모두 석축담장과 거의 평행하는 동서방향이었다. 이 사실은 석축담장이 도로 제4생활면과 제3생활면 사이의 어느 순간에 조성되었음을 말한다. 제51구역에서는 도로와 함께 성벽의 내측 면석이 함께 노출되었다. 이곳에서 도로 제5생활면은 성벽의 면석 기단보다 더 아래에 위치하였고, 도로 제4생활면은 성벽 면석의 기단과 동일한 깊이이다. 이 사실은 도로 제4생활면에서 성벽을 쌓았음을 말한다. 가장 이른 단계에는 아직 성벽이 없었을 때에 도로 제5생활면이 이미 존재하였고, 그다음에 도로 제4생활면에서 성벽을 축조하였으며, 그다음 도로 제4생활면과 제3생활면 사이의 어느 순간에 사찰구역 석축담장을 쌓았던 것이다.
제51구역의 도로에서는 다른 많은 유물들과 함께 와당들도 편 상태이기는 하나 다수 출토되었다. 생활면이 구분되는 와당들의 존재는 발해 와당의 시기구분과 상대적 편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서북지역 남부 주거구역과 사찰구역, 중북지역 등등에서 출토된 토기들도 면밀한 층위관찰을 통해 상대적 시기구분과 편년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된다.
크라스키노성 발굴조사 제1기부터 제5기까지 발굴된 유구와 유물에 대한 내용은 이 책의 〈크라스키노성의 건축물〉 및 〈크라스키노성의 유물〉 부분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더 자세한 내용은 각 해당 연도의 발굴조사보고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 각주 001)
    김은국(2014), 「한-몽 발해유적과 ‘고누 길’」, 『역사민속학』 46집, 한국역사민속학회. 바로가기
  • 각주 002)
    E.I.겔만 / 정석배 역, 2010, 「러시아 연해주 발해유적 발굴의 현황과 의의」, 『高句麗渤海硏究』 第38輯, 高句麗渤海學會. E.A. Bessonova, 2007, “Application of micromagnatic mapping for defining geological and anthropogenic heterogeneities in recent coastal sediments of the Ekspeditsii Bay” Russian Journal of Pacific Geology vol.1, №.6. 바로가기
  • 각주 003)
    E.A. Bessonova, 2007, “Application of micromagnatic mapping for defining geological and anthropogenic heterogeneities in recent coastal sediments of the Ekspeditsii Bay” Russian Journal of Pacific Geology vol.1, no.6, pp.537~549 : 베스손노바 E.A., 이블리예프 A.L., 겔만 E.I., 「고고학 과제들의 해결을 위한 염주 성에서의 지질-지구물리학적 및 지구화학적 방법의 적용」 『발해: 역사와 고고학- 』염주 성 고고학조사 시작 3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발표문(노문), 블라디보스토크, 2010, 20~23쪽. 바로가기
  • 각주 004)
    黒龍江省文物考古研究所 編著(2009), 『寧安虹鱒魚場: 1992~ 1995年度渤海墓地考古発掘報告 上下』文物出版社, 圖版 138 및 139. 바로가기
  • 각주 005)
    魏存成(2008), 『渤海考古』, 文物出版社, 266쪽. 바로가기
  • 각주 006)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ㆍ延邊朝鮮族自治州文物管理委員會辦公室, 「吉林和龍市龍海渤海王室古墓葬發掘簡報」, 『考古』 6, 2009. 바로가기
  • 각주 007)
    E.I.겔만, 정석배 역, 「러시아 연해주 발해유적 발굴의 현황과 의의」, 『高句麗渤海硏究』 第38輯, 高句麗渤海學會, 2010, 268쪽 도면 12.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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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크라스키노성 발굴 경과 자료번호 : kr.d_0016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