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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원귀미( 元貴靡) 대신 니미(泥靡)가 왕위에 오르자 한나라가 공주를 불러 돌아오도록 함

  • 국가
    오손국(烏孫國)
원강(元康) 2년(전64) 오손곤미상혜를 통해서 글을 올렸다. “원컨대 한나라의 외손자인 원귀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고, 그도 역시 한나라 공주를 부인으로 맞아 혼인관계를 더욱 두터이 하며, 흉노에 대해서는 이반하여 [그 관계를] 끊고자 합니다. [그래서] 말과 노새를 각 1천 필씩 빙재로 드리고자 합니다.” [천자께서는] 공경들에게 의논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대홍로(大鴻臚)주 001
각주 001)
大鴻臚 : 중국 고대의 관직명. 秦代에는 典客이라 칭해졌으나 漢 景帝 때에 大行令으로 改名했다가, 武帝 太初 元年에 大鴻臚로 이름을 바꾸었다. 九卿에 속했으며, ‘蠻夷’에 관한 事務, 특히 外國使節과 賓客들의 朝見事務를 관장했으며, 行人․譯官․別火令․郡邸長丞(여러 郡國이 長安에 설치한 賓館을 관리하는 인원) 등의 下屬들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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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던 소망지(蕭望之) 주 002
각주 002)
蕭望之 : 『漢書』 卷78에 立傳. 字는 長倩, 東海 蘭陵人. 「蕭望之傳」에 따르면 그는 元康 2년(전64) 직책을 少府에서 左馮翊으로 옮겼으며 3년간 근무한 뒤 大鴻臚가 되었는데, 사실 본문에서 일어난 사건은 大鴻臚가 되기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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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오손은 아주 먼 곳에 있기 때문에 변고가 일어난다면 [그 충성을] 보장할 수 없으니, [혼인을]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장했다. 주상께서는 오손이 새롭게 큰 공을 세운 것을 가상하게 여겼고 더구나 과거의 관계[故業]를 끊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여,주 003
각주 003)
顔注 : “重은 어렵다는 뜻. 故業은 전에 烏孫과 맺었던 婚親관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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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을 오손으로 보내어 먼저 빙재를 맞이해 오도록 하였다. 곤미와 태자, 좌우대장과 도위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니 대저 300여 명이 한나라로 들어와 공주[少主]를 모시러 왔다. 이에 주상께서는 오손공주주 004
각주 004)
원문은 ‘烏孫主’라고 되어 있지만 ‘烏孫公主’의 오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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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의 남동생의 자식주 005
각주 005)
원문은 ‘弟子’이지만 동생의 ‘아들’이 아니라 ‘자식(弟弟的兒子)’으로 해석되어야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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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부(相夫)를 공주로 삼고, 관속과 시중드는 사람 100여 명을 마련해 주었다. 상림원(上林)주 006
각주 006)
上林 : 上林苑. 秦代의 舊苑이었으나 漢初에 荒廢해졌다가 武帝 建元 2년(전138)에 이르러 重建․擴張되었다. 그 규모는 크고 많은 宮室들을 포함했으며 다양한 기능과 오락을 할 수 있었다. 현재 그 자취는 찾아볼 수 없으나, 범위는 長安․咸寧․周至․户县․蓝田 五縣을 포괄하였고 縱橫이 300里에 미쳤다고 한다. 霸․産․涇․渭․豊․鎬․牢․橘 등 8개의 하천이 그 안을 통과했으며, 황제는 귀족들과 함께 계절에 따라 정기적으로 수렵을 하였다. 『關中記』에 따르면 上林苑 안에는 三十六苑, 十二宮, 三十五觀이 있었다. 三十六苑 가운데에는 휴게소의 기능을 하는 宜春苑, 供御人들이 숙박을 하는 御宿苑, 太子가 손님들을 초청하기 위해서 만든 思賢苑․博望苑 등이 있었다. 또한 大型 宮城인 建章宮을 위시하여, 歌舞를 즐기는 곳인 宣曲宮, 狗․馬의 경주나 魚鳥를 감상하는 곳인 犬台宮․走狗觀․走馬觀․魚鳥觀, 코끼리와 흰 사슴을 감상하는 觀象觀과 白鹿觀이 있었다. 西域의 포도를 심는 葡萄宮, 南方의 진기한 花木을 기르는 扶荔宮, 씨름(角抵)이 벌어지는 平樂觀 등이 있었다. 또한 상림원 안에는 昆明池를 위시하여 다수의 연못과 소택도 만들어졌다. 특히 곤명지는 元狩 4년(전119)에 굴착된 것으로 장안 서남쪽에 위치, 둘레가 40里에 이르는 상당한 규모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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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거처를 정해 주고 오손의 말을 배우게 하였다. 천자께서는 스스로 평락관(平樂觀)주 007
각주 007)
平樂觀 : 上林苑 안에 두어진 觀名으로 平樂館, 平樂苑으로도 불렸다. 漢 高祖가 처음 지었으나 武帝가 增修했다. 『漢書』 「武帝本紀」에는 “元封 六年 여름, 京師의 백성들이 上林의 平樂觀에서 씨름(角觝)을 관람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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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납시어 흉노의 사신과 외국의 군장들을 알현하고, 큰 씨름[大角抵]주 008
각주 008)
角抵 : 「大宛列傳」의 譯註 참조. 角抵의 가장 이른 형태는 고대 冀州지역에서 행해지던 소위 ‘蚩尤戱’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두세 사람이 머리에 牛角을 쓰고 서로 겨루는 技藝였다고 한다. 秦의 통일과 함께 민간에서 武器의 소지가 금지됨에 따라 손을 이용하여 힘을 겨루는 角抵가 유행하게 되고, 『史記』 「李斯列傳」에는 秦二世가 甘泉宫에서 角抵 俳優들의 놀이를 관람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漢代에 들어가면 두 사람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힘겨루기 놀이를 보이는 공연이 유행하게 되었고 이는 ‘角抵百戱’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1970년대에 들어와 산동성 임흔의 金雀山 漢墓 안에서 한 폭의 漢代 帛畵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두 사람이 팔을 크게 벌리고 눈을 부릅뜨면서 힘을 겨루는 角抵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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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음악을 베푼 뒤에 그들을 보냈다. 장라후이며 광록대부(光祿大夫)인 상혜를 부사(副使)로 임명하고,주 009
각주 009)
누가 正使였는지, 혹은 常惠가 무슨 연유로 正使가 아니라 副使로 임명되어 파견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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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을 갖는 사람 4명과 함께 공주를 돈황까지 배웅토록 하였다.주 010
각주 010)
『漢書』 卷78 「蕭望之傳」에 따르면 神爵 2년(전60)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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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아직 [변경의] 관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오손의 곤미인 옹귀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오손의 귀족들은 모두 본래의 약속에 따라 잠취의 아들인 니미를 후계자로 삼아 곤미로 추대하였는데 ‘광왕’(狂王)이라 불리웠다.주 011
각주 011)
이는 그의 특징을 보여주는 중국식 別稱이며, 그의 숙부인 翁歸靡가 ‘肥王’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것과 유사하다. 오손왕가의 계보는 부록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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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혜가 글을 올려, “원컨대 공주를 돈황에 머무르게 하고 상혜 [저]는 오손으로 말을 달려가서 원귀미를 곤미로 추대하지 않은 것을 질책한 뒤 돌아와서 공주를 모시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건의했다. 이 문제를 공경들에게 논의토록 하니, 소망지가 다시 “오손은 [과 흉노] 양쪽에 모두 걸치고 있어서 결맹을 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전에 공주가 오손에 40여 년 머물렀고, [한나라오손을] 은애로써 대했음에도 [양국관계는] 친밀해지지 않았으며 변경도 평안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과거의 일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지금 원귀미가 즉위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주를 되돌아오게 하는 것은 이적에 대해서 신뢰를 어기는 것이 아니며 중국의 입장에서는 복입니다. 만약 공주가 [가는 것을] 중지시키지 않는다면 장차 요역이 일어날 터인데, 그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천자께서는 그 의견에 따라서 공주를 불러들여 오도록 하였다.주 012
각주 012)
常惠 일행이 敦煌의 懸泉을 통과할 때 지급된 費用을 기록한 漢簡이 최근에 발견되었다. 소위 ‘懸泉漢簡’으로 알려진 이들 간독 자료 가운데 西域關係는 모두 300餘條가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元康五年 正月” (사실은 神爵元年)의 年月를 갖는 18個條의 소위 “(過)長羅侯費用簿”가 보고되었고, 烏孫과 관련된 것들은 모두 34條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費用簿”의 성격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엇갈리고 있는데, 하나는 常惠가 相夫를 공주로 삼아 오손으로 호송하다가 懸泉을 지나면서 제공받은 費用이라는 주장(張德芳 : 2000)이고, 또 하나는 常惠가 조정에서 부여받은 또 다른 임무, 즉 匈奴를 공격하고 둔전을 강화하여 서역 지배를 확고히 하려는 군사적 목적으로 구성된 일행에게 제공된 비용이라는 주장이다(袁延勝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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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大鴻臚 : 중국 고대의 관직명. 秦代에는 典客이라 칭해졌으나 漢 景帝 때에 大行令으로 改名했다가, 武帝 太初 元年에 大鴻臚로 이름을 바꾸었다. 九卿에 속했으며, ‘蠻夷’에 관한 事務, 특히 外國使節과 賓客들의 朝見事務를 관장했으며, 行人․譯官․別火令․郡邸長丞(여러 郡國이 長安에 설치한 賓館을 관리하는 인원) 등의 下屬들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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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蕭望之 : 『漢書』 卷78에 立傳. 字는 長倩, 東海 蘭陵人. 「蕭望之傳」에 따르면 그는 元康 2년(전64) 직책을 少府에서 左馮翊으로 옮겼으며 3년간 근무한 뒤 大鴻臚가 되었는데, 사실 본문에서 일어난 사건은 大鴻臚가 되기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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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顔注 : “重은 어렵다는 뜻. 故業은 전에 烏孫과 맺었던 婚親관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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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원문은 ‘烏孫主’라고 되어 있지만 ‘烏孫公主’의 오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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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원문은 ‘弟子’이지만 동생의 ‘아들’이 아니라 ‘자식(弟弟的兒子)’으로 해석되어야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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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上林 : 上林苑. 秦代의 舊苑이었으나 漢初에 荒廢해졌다가 武帝 建元 2년(전138)에 이르러 重建․擴張되었다. 그 규모는 크고 많은 宮室들을 포함했으며 다양한 기능과 오락을 할 수 있었다. 현재 그 자취는 찾아볼 수 없으나, 범위는 長安․咸寧․周至․户县․蓝田 五縣을 포괄하였고 縱橫이 300里에 미쳤다고 한다. 霸․産․涇․渭․豊․鎬․牢․橘 등 8개의 하천이 그 안을 통과했으며, 황제는 귀족들과 함께 계절에 따라 정기적으로 수렵을 하였다. 『關中記』에 따르면 上林苑 안에는 三十六苑, 十二宮, 三十五觀이 있었다. 三十六苑 가운데에는 휴게소의 기능을 하는 宜春苑, 供御人들이 숙박을 하는 御宿苑, 太子가 손님들을 초청하기 위해서 만든 思賢苑․博望苑 등이 있었다. 또한 大型 宮城인 建章宮을 위시하여, 歌舞를 즐기는 곳인 宣曲宮, 狗․馬의 경주나 魚鳥를 감상하는 곳인 犬台宮․走狗觀․走馬觀․魚鳥觀, 코끼리와 흰 사슴을 감상하는 觀象觀과 白鹿觀이 있었다. 西域의 포도를 심는 葡萄宮, 南方의 진기한 花木을 기르는 扶荔宮, 씨름(角抵)이 벌어지는 平樂觀 등이 있었다. 또한 상림원 안에는 昆明池를 위시하여 다수의 연못과 소택도 만들어졌다. 특히 곤명지는 元狩 4년(전119)에 굴착된 것으로 장안 서남쪽에 위치, 둘레가 40里에 이르는 상당한 규모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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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平樂觀 : 上林苑 안에 두어진 觀名으로 平樂館, 平樂苑으로도 불렸다. 漢 高祖가 처음 지었으나 武帝가 增修했다. 『漢書』 「武帝本紀」에는 “元封 六年 여름, 京師의 백성들이 上林의 平樂觀에서 씨름(角觝)을 관람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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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角抵 : 「大宛列傳」의 譯註 참조. 角抵의 가장 이른 형태는 고대 冀州지역에서 행해지던 소위 ‘蚩尤戱’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두세 사람이 머리에 牛角을 쓰고 서로 겨루는 技藝였다고 한다. 秦의 통일과 함께 민간에서 武器의 소지가 금지됨에 따라 손을 이용하여 힘을 겨루는 角抵가 유행하게 되고, 『史記』 「李斯列傳」에는 秦二世가 甘泉宫에서 角抵 俳優들의 놀이를 관람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漢代에 들어가면 두 사람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힘겨루기 놀이를 보이는 공연이 유행하게 되었고 이는 ‘角抵百戱’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1970년대에 들어와 산동성 임흔의 金雀山 漢墓 안에서 한 폭의 漢代 帛畵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두 사람이 팔을 크게 벌리고 눈을 부릅뜨면서 힘을 겨루는 角抵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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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누가 正使였는지, 혹은 常惠가 무슨 연유로 正使가 아니라 副使로 임명되어 파견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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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書』 卷78 「蕭望之傳」에 따르면 神爵 2년(전60)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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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이는 그의 특징을 보여주는 중국식 別稱이며, 그의 숙부인 翁歸靡가 ‘肥王’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것과 유사하다. 오손왕가의 계보는 부록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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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常惠 일행이 敦煌의 懸泉을 통과할 때 지급된 費用을 기록한 漢簡이 최근에 발견되었다. 소위 ‘懸泉漢簡’으로 알려진 이들 간독 자료 가운데 西域關係는 모두 300餘條가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元康五年 正月” (사실은 神爵元年)의 年月를 갖는 18個條의 소위 “(過)長羅侯費用簿”가 보고되었고, 烏孫과 관련된 것들은 모두 34條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費用簿”의 성격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엇갈리고 있는데, 하나는 常惠가 相夫를 공주로 삼아 오손으로 호송하다가 懸泉을 지나면서 제공받은 費用이라는 주장(張德芳 : 2000)이고, 또 하나는 常惠가 조정에서 부여받은 또 다른 임무, 즉 匈奴를 공격하고 둔전을 강화하여 서역 지배를 확고히 하려는 군사적 목적으로 구성된 일행에게 제공된 비용이라는 주장이다(袁延勝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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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곤미, 상혜, 원귀미, 소망지(蕭望之), 해우, 상부(相夫), 장라후, 상혜, 옹귀미, 니미, ‘광왕’(狂王), 상혜, 상혜, 원귀미, 소망지, 원귀미
지명
오손, 한나라, 한나라, 오손, 오손, 오손, 한나라, 오손, 돈황, 오손, 오손, 돈황, 오손, 오손, , 오손, 한나라, 오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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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귀미( 元貴靡) 대신 니미(泥靡)가 왕위에 오르자 한나라가 공주를 불러 돌아오도록 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6_0310_0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