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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오손의 왕위가 변경되는 와중에도 한나라 공주와의 혼인을 지속함

  • 국가
    오손국(烏孫國)
곤막이 늙어서 그 손자인 잠취로 하여금 공주를 맞기를 바랐다. 그러나 공주는 이를 듣지 않고 글을 올려서 상황을 보고했는데, 천자께서 대답하기를 “그 나라의 풍속을 따르라.주 001
각주 001)
從其國俗 : 여기서 ‘國俗’은 구체적으로 收繼婚을 지칭한다. 匈奴․烏孫을 비롯하여 과거 많은 유목민이 父死子繼․兄終弟及의 收繼婚을 행한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지만, 오손의 경우 劉細君이나 解憂가 收繼婚을 했던 예를 살펴보면 그것이 王位繼承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細君은 처음에 昆莫과 혼인했지만 그 왕위가 손자인 잠취에게로 넘어가면서 細君 역시 잠취에게 收繼되었고. 그녀가 사망한 뒤 한나라에서 보내온 잠취에게 시집온 解憂는 잠취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에게 收繼되지 않고, 잠취의 뒤를 이어 왕이 된 大祿의 아들, 즉 잠취와는 사촌간인 옹귀미에게 收繼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收繼婚은 일반적으로 ‘末子相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末子의 財産相續과는 별도의 원칙, 즉 父兄의 身分․地位의 계승과 함께 連動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분석은 武沐․王希隆(200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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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손과 함께 오랑캐[胡]를 멸하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잠취주 002
각주 002)
岑陬 : 「大宛列傳」에는 岑娶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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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공주를 맞아들였다. 곤막이 사망하자 잠취가 대신 즉위하였다.주 003
각주 003)
본문의 내용으로 볼 때 劉細君이 잠취에게 再嫁한 것은 곤막 엽교미가 사망하기 직전이다. 余太山(2005 : 159)은 그녀가 재가한 해가 전105년, 잠취 군수미가 신임 곤막이 된 해가 전104년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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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취라는 것은 관직명이고 [원래 그의] 이름은 군수미(軍須靡) 주 004
각주 004)
軍須靡(kiuən-siu-mjie) : Pulleyblank(1966 : 29)는 烏孫의 군주들의 이름이 모두 ‘靡’ 혹은 ‘彌’로 끝나는 것으로 보아, 이는 아마 토하라語(Tokharian)에서 王을 의미하는 wӓl(A방언) 혹은 walo(B방언)를 나타낸 것으로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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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곤막은 왕의 칭호이고 이름은 엽교미(獵驕靡) 주 005
각주 005)
獵驕靡’(liăp-kiӓu-mj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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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는데, 후에는 ‘곤미(昆彌)’라고 표기하였다. 잠취가 강도(江都)의 공주를 맞아들여 딸을 하나 나았는데 [그 이름은] 소부(少夫)였다. 공주가 사망하자 한나라는 다시 초왕[楚王] 무(戊) 주 006
각주 006)
楚王 戊 : 즉 劉戊. 전174년 楚王이 되었다가 漢 景帝 3년(전154) 劉邦의 조카인 吴王 劉濞가 주동이 된 吳楚七國의 亂에 동참했다가 敗戰하면서 自殺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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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손녀 해우(解憂)를 공주로 삼아 잠취에게 부인으로 주었다. 잠취가 오랑캐 처(胡婦)주 007
각주 007)
胡婦 : 잠취의 조부인 곤막의 경우처럼 흉노에서 보내온 妻일 것이다. 잠취와 ‘胡婦’ 사이에서 난 아들은 烏孫式 이름인 泥靡(niei-mjie)가 붙여졌고, 楚王 戊의 손녀인 解憂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은 少夫라는 중국식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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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서 낳은 아들 니미(泥靡)는 아직 어렸다. 잠취가 죽게 되자, 나라를 작은 아버지인 대록의 아들 옹귀미(翁歸靡) 주 008
각주 008)
翁歸靡’(ung-kjwei-mj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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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니미가 장성하면 나라를 그에게 돌려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 각주 001)
    從其國俗 : 여기서 ‘國俗’은 구체적으로 收繼婚을 지칭한다. 匈奴․烏孫을 비롯하여 과거 많은 유목민이 父死子繼․兄終弟及의 收繼婚을 행한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지만, 오손의 경우 劉細君이나 解憂가 收繼婚을 했던 예를 살펴보면 그것이 王位繼承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細君은 처음에 昆莫과 혼인했지만 그 왕위가 손자인 잠취에게로 넘어가면서 細君 역시 잠취에게 收繼되었고. 그녀가 사망한 뒤 한나라에서 보내온 잠취에게 시집온 解憂는 잠취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에게 收繼되지 않고, 잠취의 뒤를 이어 왕이 된 大祿의 아들, 즉 잠취와는 사촌간인 옹귀미에게 收繼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收繼婚은 일반적으로 ‘末子相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末子의 財産相續과는 별도의 원칙, 즉 父兄의 身分․地位의 계승과 함께 連動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분석은 武沐․王希隆(200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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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岑陬 : 「大宛列傳」에는 岑娶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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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본문의 내용으로 볼 때 劉細君이 잠취에게 再嫁한 것은 곤막 엽교미가 사망하기 직전이다. 余太山(2005 : 159)은 그녀가 재가한 해가 전105년, 잠취 군수미가 신임 곤막이 된 해가 전104년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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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軍須靡(kiuən-siu-mjie) : Pulleyblank(1966 : 29)는 烏孫의 군주들의 이름이 모두 ‘靡’ 혹은 ‘彌’로 끝나는 것으로 보아, 이는 아마 토하라語(Tokharian)에서 王을 의미하는 wӓl(A방언) 혹은 walo(B방언)를 나타낸 것으로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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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獵驕靡’(liăp-kiӓu-mj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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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楚王 戊 : 즉 劉戊. 전174년 楚王이 되었다가 漢 景帝 3년(전154) 劉邦의 조카인 吴王 劉濞가 주동이 된 吳楚七國의 亂에 동참했다가 敗戰하면서 自殺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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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胡婦 : 잠취의 조부인 곤막의 경우처럼 흉노에서 보내온 妻일 것이다. 잠취와 ‘胡婦’ 사이에서 난 아들은 烏孫式 이름인 泥靡(niei-mjie)가 붙여졌고, 楚王 戊의 손녀인 解憂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은 少夫라는 중국식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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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翁歸靡’(ung-kjwei-mj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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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군수미(軍須靡), 엽교미(獵驕靡), 소부(少夫), 무(戊), 해우(解憂), 니미(泥靡), 대록, 옹귀미(翁歸靡), 니미
지명
오손,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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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손의 왕위가 변경되는 와중에도 한나라 공주와의 혼인을 지속함 자료번호 : jo.k_0002_0096_0310_0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