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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西域)의 지리적 위치

  • 국가
    서역(西域)
서역(西域)은 효무(孝武) 주 001
각주 001)
孝武 : 漢武帝(전141~전87). 本名 劉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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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처음으로 소통되기 시작하였다. 본시 36국주 002
각주 002)
三十六國 : 이 같은 표현은 張騫이 西域을 다녀온 武帝時에는 아직 사용되지 않았다. ‘三十六國’이라는 표현이 사료상 처음 등장한 것은 建平 4년(전3) 黃門侍郞 揚雄이 哀帝에게 올린 諫言이다(『漢書』 卷94下 「匈奴傳下」 ∶ “과거에 西域을 도모하고 車師를 견제하기 위해 城郭을 설치하여 ‘三十六國’을 都護하였습니다.”). 宣帝時인 神爵 2년(전59) 鄭吉을 西域都護로 임명하면서 漢의 서역진출과 경영이 본격화되었고, 흉노의 분열로 인해 呼韓邪單于가 漢에 入朝稱臣한 뒤 元帝 建昭 3년(전36)에는 흉노의 郅支單于가 西域都護 甘延壽와 副校尉 陳湯 등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어 서역의 정세가 一轉되면서, 서역의 여러 도시들이 漢에 복속하게 된 것이다. 西域都護는 이를 계기로 각 도시국가들의 土地․山川․王侯․戶數․道里․遠近 등을 상세하게 조사하였는데, ‘三十六國’은 바로 이때 정착된 용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리적으로 ‘三十六國’은 위의 본문에 “모두 흉노의 서쪽, 오손의 남쪽에 있다. 남북으로 큰 산이 있고 중앙에는 강이 있는데, 동서로 6천여 리이며 남북이 천여 리이다. 동쪽으로는 한나라와 접하고 옥문과 양관에 의해 막혀 있으며, 서쪽으로는 총령(葱嶺)으로 차단되어 있다.”는 설명이 보여주듯이 기본적으로는 타림분지 연변, 즉 東투르키스탄의 도시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三十六’이라는 숫자가 정확한 實數를 나타낸다고 보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後漢書』 卷115 「東夷傳」에 周의 穆王에게 복속한 陸地의 “三十有六國”, 卷116 「西南夷傳」에 降附한 “三十六種” 등의 표현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이 숫자가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三十六’은 占星術에서 律曆의 數인 360 및 36과 연관된 것으로, 고대 중국인들의 思惟世界 속에서는 ‘多數’․‘無數’ 등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던 숫자였다. 이에 관해서는 伊瀨仙太朗 (1955 : 21-37) 참조. 한편 『漢書』 「匈奴傳」에 묵특선우가 “樓蘭․烏孫․呼揭와 그 근방의 二十六國”을 정복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대체로 학자들은 ‘二十六國’을 ‘三十六國’의 오류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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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으나 그 뒤에 차츰 나뉘어져 50여 개가 되었는데,주 003
각주 003)
顔注∶“司馬彪가 『漢書』를 읽고 말하기를 ‘哀帝․平帝 때에 이르러 五十五國이 되었다’라고 했다.” 『後漢書』 卷88 「西域傳」∶“무제 때에 서역이 內屬했는데 三十六國이 있었다. 한나라는 使者校尉를 두어 領護토록 하였다. 宣帝가 이를 都護로 고쳤고, 元帝는 다시 戊己二校尉를 두어, 車師前王庭에 屯田을 실시했다. 哀帝․平帝 기간에 스스로 분할하여 五十五國이 되었다.” 哀帝의 치세는 전7~전1년, 平帝는 후1년~5년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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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흉노의 서쪽, 오손의 남쪽에 있다. 남북으로 큰 산이 있고 중앙에는 강이 있으며, [그 범위는] 동서로 6천여 리이며 남북이 천여 리이다.주 004
각주 004)
『漢書』는 여기서 ‘西域’의 지리적 개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남북의 큰 산’이란 북쪽의 천산산맥과 남쪽의 카라쿤룬[哈剌崑崙]․쿤룬[崑崙]․알친[阿爾金] 등의 산맥을 지칭하며, 중앙에 있는 강은 타클라마칸사막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흐르는 타림강을 가리키고, 葱嶺은 파미르고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서 ‘西域’은 천산산맥과 곤륜산맥, 그리고 파미르와 玉門關․陽關에 의해 둘러싸인 지역, 즉 타림분지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狹義의 西域’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西域傳」에는 파미르 以西의 여러 나라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廣義의 西域’은 玉門關 以西의 모든 지역을 포괄하는 개념인 셈이다. 돈황에서 파미르까지의 직선거리는 대체로 1,700km이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북 직선거리는 500km 정도된다. 따라서 동서 6,000리(2,400km), 남북 1,000여 리(400km)라는 기록은 실제 旅程의 거리를 측량할 때 거의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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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는 한나라와 접하고 옥문(玉門)주 005
각주 005)
玉門 : 漢武帝 때에 처음 두어진 관문이며, 西域에서 玉을 들여왔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그 故址는 현재의 감숙성 돈황시 서북의 小方盤城에 해당된다. 서남쪽에 위치한 陽關과 더불어 서역으로 통하는 兩大 關門이었다. 玉門關을 나서면 北道로 이어지고, 陽關을 나서면 南道로 연결되었다. 東漢 建武 말년에 폐지되었다가, 永平 17년(74) 伊吾(=哈密)를 경유하는 소위 ‘新道’가 개척되면서 현재의 安西의 동쪽 南橋子鄕 西北의 馬圈村 西에 위치한 小古城 자리에 復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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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양관(陽關)에 의해 막혀 있으며,주 006
각주 006)
‘阸’ : 顔注 : “阸은 塞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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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는 총령(葱嶺)으로 차단되어 있다.주 007
각주 007)
葱嶺은 파미르(Pamir). 顔注 : “『西河舊事』에 ‘葱嶺이라는 산은 높고 크며, 위에는 모든 것이 생육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西河舊事』는 현재 逸失된 책이다. 그런데 『水經注』(河水二)는 이 서적을 인용하면서 ‘上悉生’이 아니라 ‘上葱生’이라고 썼다. 즉 산 위에 파(葱)가 자라기 때문에 葱嶺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파미르’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타직(Tajik)語로 ‘세계의 기둥(pa-i mir)’이라는 설, 고대 페르시어아로 ‘太陽神의 寶座(pa-i mihr)’라는 설 등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한국어 ‘파’와 ‘파미르’와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나 입증하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파미르’라는 이름이 한문자료에 처음 등장한 것은 玄奘의 『대당서역기』에 보이는 ‘波謎羅川’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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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의 남산주 008
각주 008)
其南山 : 이는 ‘漢南山’과 구별된 표현으로, 앞서 언급한 西域을 남북으로 둘러싼 양대 산맥 가운데 남쪽의 산맥, 즉 곤륜에서 알친으로 이어지는 山系를 지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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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동쪽에 금성(金城) 주 009
각주 009)
金城 : 전81년에 初置된 金城郡을 지칭하며 현재 甘肅省 蘭州․西寧 지방에 해당된다. 治所는 允吾로, 감숙성 皐蘭縣 西北 黃河 北岸에 위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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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뻗어나와 한나라의 남산(南山)주 010
각주 010)
南山 : 당시 長安 근교의 終南山을 가리킨다. 西域의 ‘南山’인 쿤룬산맥과 알친산맥은 동쪽으로 뻗어 기련산맥과 연결되며, 그것은 다시 秦嶺으로 이어져 장안 남쪽의 終南山까지 연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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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맞닿아[屬]주 011
각주 011)
‘屬’ : 顔注 : “屬은 聯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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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그 강은 두 개의 원천이 있는데, 하나는 총령에서 나오며 또 하나는 우전(于闐) 주 012
각주 012)
「大宛列傳」의 ‘우전(于窴)’에 관한 譯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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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나온다. 우전은 남산 아래에 있으며 그 강은 북쪽으로 흘러 총령하(葱嶺河) 주 013
각주 013)
葱嶺河 : 葱嶺에서 발원하는 강이 타림(Tarim) 강이고, 于闐에서 발원하는 강이 호탄(Khotan) 강이다. 타림 강은 葱嶺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本文에서는 ‘葱嶺河’라고 칭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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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만나서, 동쪽으로 흘러 포창해(蒲昌海)로 주입된다. 포창해는 일명 염택(鹽澤) 주 014
각주 014)
蒲昌海 즉 ‘鹽澤’은 오늘날 롭 노르(Lop Nor, 羅布泊)에 해당된다. 이 호수가 ‘鹽澤’이라 불렸던 까닭은 극도의 건조함으로 인해 수중에 염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롭 노르는 지하 하도의 변경으로 말미암아 1921년 호수의 위치가 변경되었는데, 바뀌어진 오늘날의 지점이 漢代 蒲昌海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현재 玉門․陽關에서 롭 노르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250km 정도이기 때문에 300리(120km)보다는 더 먼 거리이다. 『水經注』 「河水二」에 鹽澤에 대하여 “東去玉門․陽關千三百里”라는 구절이 있어 위의 본문의 ‘三百里’라는 구절 앞에 ‘千’이 누락된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1,300리일 경우 520km가 되므로 실제보다 2배 이상 먼 거리가 된다. 余太山(2005 : 62)은 『史記』 「大宛列傳」에 陽關에서 長安까지가 4,500리로 나와 있고, 『漢書』 「西域傳」에 鄯善國에서 長安까지 5,000리로 나와 있으므로, 鄯善國이 위치한 鹽澤에서 陽關까지는 500리가 되는 셈이며, 위 본문의 ‘三百里’는 ‘五百里’의 誤謬가 아닐까 추정하였다. 500리라면 200km가 되므로 실제의 거리에 상당히 부합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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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도 불리는 것이다. 옥문·양관에서 300여 리 떨어져 있으며, 넓이와 길이[廣袤]주 015
각주 015)
袤 : 顔注 : “袤는 長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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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300리이다. 그 물은 정지해 있으며, 겨울과 여름에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그 물이] 지하로 잠행하여 남쪽으로 적석(積石)에서 용출하여 중국의 황하가 된다고 여기고 있다.주 016
각주 016)
積石山 : 흔히 靑海 南境의 大積石과 甘肅省 臨夏縣 西北의 小積石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前者를 지칭한다. 소위 ‘黃河伏流重源說’에 관해서는 「大宛列傳」에서의 譯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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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孝武 : 漢武帝(전141~전87). 本名 劉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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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三十六國 : 이 같은 표현은 張騫이 西域을 다녀온 武帝時에는 아직 사용되지 않았다. ‘三十六國’이라는 표현이 사료상 처음 등장한 것은 建平 4년(전3) 黃門侍郞 揚雄이 哀帝에게 올린 諫言이다(『漢書』 卷94下 「匈奴傳下」 ∶ “과거에 西域을 도모하고 車師를 견제하기 위해 城郭을 설치하여 ‘三十六國’을 都護하였습니다.”). 宣帝時인 神爵 2년(전59) 鄭吉을 西域都護로 임명하면서 漢의 서역진출과 경영이 본격화되었고, 흉노의 분열로 인해 呼韓邪單于가 漢에 入朝稱臣한 뒤 元帝 建昭 3년(전36)에는 흉노의 郅支單于가 西域都護 甘延壽와 副校尉 陳湯 등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어 서역의 정세가 一轉되면서, 서역의 여러 도시들이 漢에 복속하게 된 것이다. 西域都護는 이를 계기로 각 도시국가들의 土地․山川․王侯․戶數․道里․遠近 등을 상세하게 조사하였는데, ‘三十六國’은 바로 이때 정착된 용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리적으로 ‘三十六國’은 위의 본문에 “모두 흉노의 서쪽, 오손의 남쪽에 있다. 남북으로 큰 산이 있고 중앙에는 강이 있는데, 동서로 6천여 리이며 남북이 천여 리이다. 동쪽으로는 한나라와 접하고 옥문과 양관에 의해 막혀 있으며, 서쪽으로는 총령(葱嶺)으로 차단되어 있다.”는 설명이 보여주듯이 기본적으로는 타림분지 연변, 즉 東투르키스탄의 도시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三十六’이라는 숫자가 정확한 實數를 나타낸다고 보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後漢書』 卷115 「東夷傳」에 周의 穆王에게 복속한 陸地의 “三十有六國”, 卷116 「西南夷傳」에 降附한 “三十六種” 등의 표현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이 숫자가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三十六’은 占星術에서 律曆의 數인 360 및 36과 연관된 것으로, 고대 중국인들의 思惟世界 속에서는 ‘多數’․‘無數’ 등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던 숫자였다. 이에 관해서는 伊瀨仙太朗 (1955 : 21-37) 참조. 한편 『漢書』 「匈奴傳」에 묵특선우가 “樓蘭․烏孫․呼揭와 그 근방의 二十六國”을 정복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대체로 학자들은 ‘二十六國’을 ‘三十六國’의 오류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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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顔注∶“司馬彪가 『漢書』를 읽고 말하기를 ‘哀帝․平帝 때에 이르러 五十五國이 되었다’라고 했다.” 『後漢書』 卷88 「西域傳」∶“무제 때에 서역이 內屬했는데 三十六國이 있었다. 한나라는 使者校尉를 두어 領護토록 하였다. 宣帝가 이를 都護로 고쳤고, 元帝는 다시 戊己二校尉를 두어, 車師前王庭에 屯田을 실시했다. 哀帝․平帝 기간에 스스로 분할하여 五十五國이 되었다.” 哀帝의 치세는 전7~전1년, 平帝는 후1년~5년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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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漢書』는 여기서 ‘西域’의 지리적 개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남북의 큰 산’이란 북쪽의 천산산맥과 남쪽의 카라쿤룬[哈剌崑崙]․쿤룬[崑崙]․알친[阿爾金] 등의 산맥을 지칭하며, 중앙에 있는 강은 타클라마칸사막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흐르는 타림강을 가리키고, 葱嶺은 파미르고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서 ‘西域’은 천산산맥과 곤륜산맥, 그리고 파미르와 玉門關․陽關에 의해 둘러싸인 지역, 즉 타림분지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狹義의 西域’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西域傳」에는 파미르 以西의 여러 나라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廣義의 西域’은 玉門關 以西의 모든 지역을 포괄하는 개념인 셈이다. 돈황에서 파미르까지의 직선거리는 대체로 1,700km이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북 직선거리는 500km 정도된다. 따라서 동서 6,000리(2,400km), 남북 1,000여 리(400km)라는 기록은 실제 旅程의 거리를 측량할 때 거의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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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玉門 : 漢武帝 때에 처음 두어진 관문이며, 西域에서 玉을 들여왔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그 故址는 현재의 감숙성 돈황시 서북의 小方盤城에 해당된다. 서남쪽에 위치한 陽關과 더불어 서역으로 통하는 兩大 關門이었다. 玉門關을 나서면 北道로 이어지고, 陽關을 나서면 南道로 연결되었다. 東漢 建武 말년에 폐지되었다가, 永平 17년(74) 伊吾(=哈密)를 경유하는 소위 ‘新道’가 개척되면서 현재의 安西의 동쪽 南橋子鄕 西北의 馬圈村 西에 위치한 小古城 자리에 復置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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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阸’ : 顔注 : “阸은 塞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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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葱嶺은 파미르(Pamir). 顔注 : “『西河舊事』에 ‘葱嶺이라는 산은 높고 크며, 위에는 모든 것이 생육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西河舊事』는 현재 逸失된 책이다. 그런데 『水經注』(河水二)는 이 서적을 인용하면서 ‘上悉生’이 아니라 ‘上葱生’이라고 썼다. 즉 산 위에 파(葱)가 자라기 때문에 葱嶺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파미르’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타직(Tajik)語로 ‘세계의 기둥(pa-i mir)’이라는 설, 고대 페르시어아로 ‘太陽神의 寶座(pa-i mihr)’라는 설 등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한국어 ‘파’와 ‘파미르’와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나 입증하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파미르’라는 이름이 한문자료에 처음 등장한 것은 玄奘의 『대당서역기』에 보이는 ‘波謎羅川’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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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其南山 : 이는 ‘漢南山’과 구별된 표현으로, 앞서 언급한 西域을 남북으로 둘러싼 양대 산맥 가운데 남쪽의 산맥, 즉 곤륜에서 알친으로 이어지는 山系를 지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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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金城 : 전81년에 初置된 金城郡을 지칭하며 현재 甘肅省 蘭州․西寧 지방에 해당된다. 治所는 允吾로, 감숙성 皐蘭縣 西北 黃河 北岸에 위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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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南山 : 당시 長安 근교의 終南山을 가리킨다. 西域의 ‘南山’인 쿤룬산맥과 알친산맥은 동쪽으로 뻗어 기련산맥과 연결되며, 그것은 다시 秦嶺으로 이어져 장안 남쪽의 終南山까지 연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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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屬’ : 顔注 : “屬은 聯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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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大宛列傳」의 ‘우전(于窴)’에 관한 譯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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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葱嶺河 : 葱嶺에서 발원하는 강이 타림(Tarim) 강이고, 于闐에서 발원하는 강이 호탄(Khotan) 강이다. 타림 강은 葱嶺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本文에서는 ‘葱嶺河’라고 칭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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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蒲昌海 즉 ‘鹽澤’은 오늘날 롭 노르(Lop Nor, 羅布泊)에 해당된다. 이 호수가 ‘鹽澤’이라 불렸던 까닭은 극도의 건조함으로 인해 수중에 염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롭 노르는 지하 하도의 변경으로 말미암아 1921년 호수의 위치가 변경되었는데, 바뀌어진 오늘날의 지점이 漢代 蒲昌海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현재 玉門․陽關에서 롭 노르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250km 정도이기 때문에 300리(120km)보다는 더 먼 거리이다. 『水經注』 「河水二」에 鹽澤에 대하여 “東去玉門․陽關千三百里”라는 구절이 있어 위의 본문의 ‘三百里’라는 구절 앞에 ‘千’이 누락된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1,300리일 경우 520km가 되므로 실제보다 2배 이상 먼 거리가 된다. 余太山(2005 : 62)은 『史記』 「大宛列傳」에 陽關에서 長安까지가 4,500리로 나와 있고, 『漢書』 「西域傳」에 鄯善國에서 長安까지 5,000리로 나와 있으므로, 鄯善國이 위치한 鹽澤에서 陽關까지는 500리가 되는 셈이며, 위 본문의 ‘三百里’는 ‘五百里’의 誤謬가 아닐까 추정하였다. 500리라면 200km가 되므로 실제의 거리에 상당히 부합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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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袤 : 顔注 : “袤는 長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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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積石山 : 흔히 靑海 南境의 大積石과 甘肅省 臨夏縣 西北의 小積石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前者를 지칭한다. 소위 ‘黃河伏流重源說’에 관해서는 「大宛列傳」에서의 譯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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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효무(孝武)
지명
오손, 한나라, 총령(葱嶺), 금성(金城), 한나라, 총령, 우전(于闐), 우전, 총령하(葱嶺河), 포창해(蒲昌海), 포창해, 염택(鹽澤), 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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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西域)의 지리적 위치 자료번호 : jo.k_0002_0096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