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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토포리 고분군 조사

토포리(土浦里) 제1호분(1936)

토포리(土浦里) 고분군(古墳群)은 대성산성에서 동쪽으로 4km 정도 떨어져 위치하는데, 대동강 북안에 형성된 비교적 넓은 평지를 내려다보는 나지막한 야산의 남쪽 사면에 해당한다. 서쪽으로는 내리(內里) 고분군(古墳群)이 있고 동쪽으로는 남경리와 호남리 고분군이 연접한다. 이 일대는 대성산성과 안학궁지로 이어지는 구릉지를 포함하여 평양지역에서 고구려 고분이 비교적 많이 조영된 지역으로 당시 일본인 조사자들은 이를 집안의 고구려 고분과 유사한 분위기라고 하였다.
토포리 고분군은 전고에서 소개한 것처럼 이미 1916년에 부분적으로 조사한 것이다. 당시 조사된 고분 중에서 토포리 대총과 남총이 보고되었는데, 전자는 조사과정에서 토포리 1호, 후자는 토포리 4호로 불리었던 것이다. 당시 지점을 달리하는 호남리 사신총마저도 토포리 고분에 포함시켰는데, 조사과정에는 이를 토포리 5호라 불렸다. 호남리 금사총도 조사 당시에는 토포리 6호라 하였으나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는 이름을 조정하였다.
1936년에는 불당동의 남쪽 평야에 남북으로 형성된 20여 기의 고분군 중앙에 위치하는 대형분을 골라서 모두 4기를 굴착조사 하였는데, 이를 각각 1~3호, 6호라 한다. 그런데 이것은 1916년에 조사된 토포리 1호(대총)와는 분명 별개의 고분이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토포리 1호(1936)는 1916년에 조사된 토포리 남총에서 북으로 100m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2호(1936)는 토포리 대총에서 남으로 30m정도 떨어져 위치한다.
1호는 고분군 중에서 가장 대형인데 평면 방대형으로 한변의 길이가 21.2m이고 높이가 약 5m에 이른다. 봉분 기저부의 각 변은 대개 동서남북의 방향과 일치한다. 조사가 시작될 당시엔 이미 남쪽 사면의 중앙부근에 직경 4.5m, 깊이 1.9m의 도굴갱이 형성되어 있었다.
조사는 일반적인 고구려 고분의 구조를 고려하여 입구를 찾기 위해 분구 남쪽 면의 중앙을 중심으로 굴착하여 첫날 고분의 표면 아래 2.6m 부근까지를 조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봉분 아래쪽으로 연속되는 회반죽된 돌무더기를 발견하였다. 다음 날 발굴 구덩이를 약간 동쪽으로 넓혀 남쪽으로 길게 뻗은 할석(割石)의 퇴적을 발견하였고, 이를 참고하여 연도의 입구를 확인했다. 연도 폐쇄석은 교란되었으나 연도부는 원래의 형태를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었다. 연도와 현실 사이를 넓은 판석으로 막았는데, 상반(上半)이 파괴된 상태로 확인되었다. 현실 앞부분에는 토사가 경사를 이루면서 퇴적되어 있었는데, 이를 제거하면서 유물을 탐색하였으나 발견되지 않았다. 현실과 연도를 조사하고 연도의 서쪽에 존재하는 벽면을 노출시키는 과정에서 서쪽에 또 하나의 석실 미석(楣石)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토포리 1호가 동일 봉토 아래에 매장주체부가 둘인 고분임이 분명해졌는데, 석실 간의 거리는 고작 1.5m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각각 동실(東室)과 서실(西室)로 구분하여 명명하기로 한다.
토포리 고분군 분포도
토포리 고분군 전경 1
토포리 고분군 전경 2
토포리 제1호분 평면도(아리미쓰(有光)작도)
- 1936년도 조사 『昭和十一年度 古蹟調査報告』에서 전재 이하동일
토포리 제1호분 서실 단면도
토포리 제1호분 동실 단면도
- 단면도(아리미쓰(有光)작도)
동실은 현실의 길이가 2.61m, 폭이 0.94m, 높이가 약 1m에 이르는 비교적 소형의 석실분이다. 반면 연도는 길이가 2.72m에 이르고 폭이 1.19m, 높이가 1.54m로 오히려 석실에 비해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다. 동실의 현실 벽은 각각 한 장의 매끈하게 가공된 돌로 이루어졌는데, 두께는 4~5cm로 얇다. 천장석 역시 두께가 8cm로 그렇게 두껍지 않은 판석이다. 시상석은 연도에 가까운 쪽에 두 장, 그 안쪽에 두 장을 깔았으며 두께는 약 6cm이며 균열이 생겨 세 조각으로 분리된 상태였다. 현실은 사각 기둥을 옆으로 뉘어 놓은 것처럼 좁고 긴 형태이다. 입구 쪽의 각 판석들은 안쪽으로 홈을 내서 층을 만들었는데, 이는 폐쇄석을 끼우기 위한 장치이다. 그리고 좌우 옆 벽의 끝부분의 벽들은 삼분되는데, 그 중앙부분에 움푹한 홈을 만들고 여기에 다른 한 장의 돌을 볼록하게 깨서 끼워 넣고 주변을 회로 두껍게 발라서 봉했다. 또한 이 밑변의 폭은 좁아서 회를 더 두껍게 바르고 단단하고 치밀하게 고정시켰다.
연도의 좌우 벽은 사암, 석회암 등의 할석으로 쌓아 올리고 그 표면엔 회칠하고 미장하였으나 천장은 3개의 거석을 옆으로 나란히 얹고 이음새에는 석회를 발랐다. 바닥에는 현실의 바닥돌과 비슷한 판석을 한 장 놓았다. 그 길이는 약 1m, 높이는 0.8m이며 앞쪽이 한 단 낮게 되어 있고 지면에는 회를 두껍게 칠했다. 지반은 앞쪽으로 약간 낮아지며 출구가 한층 깊게 파였고 깊이 30cm의 홈을 만들고 여기에 연도를 막는 두께 80cm의 넓은 폐쇄석을 세웠다. 폐쇄석은 현재 깨어져 상반이 없어졌으나 높이는 1.35m, 폭은 연도보다 약간 좁고 좌우에 다른 작은 할석들과 물려서 서 있다. 또한 폐쇄석 전면에는 폭 1.2m, 높이 1m, 두께 85cm의 거석을 괴어서 폐쇄판석을 고정 시켰다. 연도 내부의 충전석은 대형 할석이 회를 발라서 견고하게 고착시켰다. 도굴되면서 상반이 파괴되어 대략 70~80m 만이 남아 있다.
서실도 동실과 아주 흡사한 구조로 되어 있다. 연도입구의 폐쇄석은 높이 약 1.50m, 폭 약 1m, 두께 25cm의 커다란 한 장의 돌로 되어 있고 그 뒤에 몇 장의 대형할석을 기대어 눌렀으며 또 연도내부의 충전석층은 전면 가까이에 작은 모양의 돌을 사용하고 뒤쪽에 큰 돌을 쌓아올렸으며 하층에만 회를 먹였다. 연도의 상반은 폐쇄석과 함께 파괴되어 언제나 현실에 이룰수 있는 상태였다. 판상의 폐쇄석을 끼운 것은 동실과 같으며 왼쪽 모서리가 파손된 상태였다. 실내에는 3분의 1 깊이로 토사가 쌓여있었으며 부장품은 없었다.
토포리 제1호분 분구 외형
토포리 제1호분 서실연도 입구
토포리 제1호분 동·서실 연도입구 폐쇄석
토포리 제1호분 서실 연도부 충진석
토포리 제1호분 서실 입구 폐쇄상태
토포리 제1호분 서실 입구 폐쇄석 제거 후
토포리 제1호분 동실 연도부 입구
토포리 제1호분 동실 내부
토포리 제1호분 출토품
동·서실 모두 현실 내에 본래 부장품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도굴되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조사 중 서실 연도부에 남아 있던 받침돌 위의 내부토에서 관정 열개를 발견하였고 입구의 봉토 속에서 두 개를 채집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들어 조사자는 도굴자가 관정으로 결구된 목관을 연도부까지 꺼내서 뒤진 결과로 판단했다. 출토된 관정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삿갓형으로 머리 길이가 5cm에 이른다. 목질이 남아 있는 것도 있다. 고분의 평면도 및 석실내부의 실측도는 아리미쓰가 작성하였고 사진은 사와 쥰이치가 촬영한 것이다.

토포리 제2호분

토포리 2호분은 토포리 대총의 동남쪽에 인접한 방대형의 고분이다.
조사 당시 고분은 소나무 숲에 있었는데, 봉분 위에도 작은 소나무가 여럿 자라고 있었다. 봉분의 직경은 24m이고 높이는 약 3.5m이다. 매장주체부인 석실은 남쪽으로 연도가 열렸으며 그 길이는 3.5m, 폭 1.3m, 높이가 3.5m였다.
연도와 현실로 구성된 단실묘인데, 현실은 장방형이고 동서 2.56m, 남북 3.20m의 규모이다. 천장은 삼각모줄임으로 마무리되었다. 사진을 통해 관찰하면 2단의 평행모줄임과 2단의 삼각모줄임을 차례로 하고 그 위에 판석을 덮어서 마무리한 것으로 보인다. 벽면과 모줄임은 물론 천장부까지 석회로 깔끔하게 미장하여 그 안쪽의 석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알기 어려운 상황인데, 석회의 두께가 2cm에 이르는 곳도 있다. 바닥에는 상면이 말끔하게 가공된 사각형의 판석을 9장 빈틈없이 깔아두었는데, 조사 당시 뒷벽에 붙여서 깔아둔 판석은 사라진 상태였다. 연도의 상면은 현실보다 1단 낮게 연속되는데, 그 경계에는 두께를 달리하는 두 장의 판석을 나란히 세워 두고 석회로 현실 입구를 단단히 봉했다. 연도부에는 폐쇄석 바깥으로 2m 폭으로 할석을 쌓아 만든 폐쇄시설이 확인되는데, 석회를 발라서 매우 견고하다. 연도부의 천장은 길이가 2m를 넘는 돌 한 장을 덮어서 만들었다. 연도의 바닥은 묘도로 갈수록 낮아지는데, 가장 바깥은 천장보다 2m나 낮으며 전체 길이는 4m에 이른다. 현실의 남쪽 좌우에는 석회로 미장된 현문이 4각 기둥처럼 서있다. 현실내부에서는 벽화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특기할 만한 유물도 없었다. 다만 퇴적토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폐쇄석에 가까운 지점에서 금동으로 된 화판형의 장신구를 발견했다. 마찬가지로 입두형의 못과 관청도 발견되었다. 마지막으로 관대 받침으로 보이는 네모지게 가공된 석편이 원래 자리를 잃은 채 흩어져 있었다. 보고서에 실린 몇 장의 사진은 1호와 마찬가지로 사와 슌이치가 촬영한 것이다.
토포리 제2호분 분구 외형
토포리 제2호분 연도 입구
토포리 제2호분 현실 벽면
토포리 제2호분 천장
토포리 제2호분 현실 내부 시상
토포리 제2호분 출토품
토포리 제2호분 실측도(아리미쓰 교이치 작도)

토포리 제3호분

고분은 앞의 고분들과 마찬가지로 불당동에 있지만 그 위치는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보고서에 게재된 사진으로 보아 조사 전의 봉분에는 별다른 도굴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조사자들도 완전한 고분으로 기대하고 굴착하였으나 이미 오래전에 도굴된 고분으로 드러났다. 석실내부에는 흙이 가득 찬 상태였고 바닥에서 약간의 인골이 출토되었다. 발굴과정에서 도굴분인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그 구조가 특이했기 때문에 다른 고분과는 달리 매장주체부의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분구는 경사면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북쪽에서의 높이는 1.5m에 지나지 않았지만 연도가 달린 남쪽에서는 3.13m에 달하는 비교적 규모가 큰 고분이었다. 봉분의 직경은 14m 정도이다. 분구의 거의 중앙에 설치된 매장주체는 현실과 연도로 구성되는 단실분이다. 현실은 장방형이고 길이가 2.1m, 폭이 1.5m였다. 분구정상부에서 석실 바닥까지는 2.89m였다. 석실의 상부에는 장축방향으로만 내어쌓기가 이루어졌고 그 위에 2단의 삼각모줄임이 연속되는데, 일반적인 고구려의 모줄임 천장보다는 단순한 형태이다.
현실 4벽은 거의 가공되지 않은 막돌에 석회를 먹이면서 쌓아올리고 현실내부에서 보이는 벽면은 물론 천장에도 석회를 발라 미장하였다. 미장 벽면에서 벽화는 발견되지 않았다. 현실바닥에는 중앙에서 약간 서쪽으로 붙여서 두 개의 관대를 만들었는데, 서쪽의 것은 납작하게 가공된 판석 2장으로 구성되고 동쪽의 것은 1장이다. 관대는 길이가 1.75m 정도인데, 서쪽의 것은 폭이 0.64m이고 동쪽의 것은 0.6m이다. 관대의 아래에는 잔자갈을 깔아서 기초로 삼았다. 관대석이 벽면에 미치지 않는 남북 공간에는 점토를 두드려 굳혀서 관대와 높이를 맞추어둔 정황이 관찰된다.
연도는 우편재이며 따로 문주석이나 문턱이 설치되지 않았다. 문미석은 연도의 천장보다 크게 1단 낮추어 놓았고 그 턱에는 연도쪽에서 좌우 두 장의 판석을 세워두었다. 폐쇄판석은 상반이 도굴시에 파괴되었다. 연도부의 천장석은 문미석을 제외하고는 결실되었으며 좌우 벽면도 묘도 쪽에는 결실이 현저하고 미장 석회도 많이 박락되었다. 현문의 폐쇄석에서 1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2차 폐쇄용의 판석이 발견되었다. 조사자는 두 군데의 폐쇄석 사이에도 막돌을 쌓아두었을 가능성을 언급하였으나 조사 당시에는 발견되지 않았다.
개보에 실린 사진을 보면 묘도부와 가까운 연도부 천장에 비교적 두껍고 긴 천장석이 있으나 어찌된 일인지 도면에는 표현되지 않았다. 이 사진으로 보아 발굴은 봉분의 남쪽을 수직으로 굴착해서 연도 천장을 해체하고 현문에 공간을 확보하고 현실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연도부 상면이 노출된 사진으로 보아 조사시에 이미 연도부 천장석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토포리 제3호분 평면도(오바 쓰네키치 작도)
토포리 제3호분 측면도(오바 쓰네키치 작도)
토포리 제3호분 분구외형
토포리 제3호분 연도
토포리 3호의 도면은 오바 쓰네키치가 그린 것이 분명하며 사진은 사와 슌이치가 촬영하였다.

토포리 제6호분

토포리 불당동의 서쪽에 인접하는 구릉을 사이에 두고 두무동이라는 마을에 위치하는 고구려 고분군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 중에서 벽화를 보았다고 하는 고분이 있어 우선 그 고분의 남쪽 연도를 굴착하여 내부를 들여다보니 석회를 바른 2단의 평행 내어쌓기와 2단의 삼각모줄임이 연속되는 평범한 고구려 고분이어서 조사를 중단했다고 한다. 이 고분이 토포리 7호분이다.
조사단은 7호분의 서쪽에 인접하는 고분을 선정하여 다시 굴착작업을 실시하였다. 이 고분이 6호분인데 길을 사이에 두고 민가 가까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봉분은 여러 곳이 유실된 상태였지만 분명한 도굴 구덩이가 확인되지 않는 상태였다. 분구 기저에서 분정까지의 높이는 약 4.5m로 비교적 대형에 속하는 고분이었다. 발굴은 2호와 마찬가지로 연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분구의 남쪽을 굴착하고 현문을 찾아 현실로 침입하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남쪽으로 연도가 달린 현실은 분구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는데, 내부는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석실내부에는 바닥에서 1m 높이로 토사가 충만한 상태였으며 이를 제거하자 비교적 잔존상태가 양호한 석실이 드러났다.
7호와 마찬가지로 벽화가 없는 고분임에도 현실내부까지 조사를 한 것은 내부에 퇴적된 토사의 양이 적어서 조사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매장주체부는 현실과 연도로 이루어진 단실분인데, 현실은 길이가 2.8m, 폭이 2m였다. 4벽의 높이는 약 1m이고 그 위로 2단의 평행 내어쌓기와 2단의 삼각모줄임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현실 바닥에서 천장까지는 2.3m이고 분정(墳頂)까지는 3.6m 정도이다. 현실의 바닥에는 작은 돌을 두껍게 깔고 편평하게 골라 다진 다음 그 위에 목탄을 11cm 정도의 두께로 덮고 다시 4cm 정도의 석회를 발라서 마무리했다.
현실의 동쪽과 서쪽에는 벽면에 붙여서 각각 1장의 판석에 석회를 발라 만든 관대가 놓여 있다. 동쪽 관대는 길이 2.2m, 폭 83cm, 두께 12cm이고 서쪽 관대는 길이 2.2m, 폭 82cm, 두께 14cm이다. 관대는 둘 다 두향(頭向)으로 판단되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경사져 낮은 구조이다. 현실의 남쪽 중앙에 달린 연도는 길이가 1.8m, 폭이 1.23m, 높이가 1.4m 정도이다. 현문은 문미석이 연도 천장석보다 크게 한 단 낮게 설치되었고 바닥에서 도드라지게 문지방석도 만들어졌다. 석회가 발린 판석 2장을 좌우로 놓아 현문을 폐쇄하였는데, 대체로 수직으로 세워졌다. 판석에 장부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문지방과 문미석에 장부 구멍도 설치되지 않았다. 연도의 바닥도 현실의 바닥과 같은 수법으로 만들었다.
토포리 제6호분 평면도(오바 쓰네키치작도)
토포리 제6호분 측면도(오바 쓰네키치 작도)
토포리 제6호분 분구 외형
토포리 제6호분 연도
토포리 제6호분 현실
조사자는 현문 폐쇄석의 바깥을 막돌로 막았을 것으로 추정했으며 그 바깥에는 한번 더 판석으로 봉쇄한 것으로 보이나 파괴되어 약간의 석재를 남기지만 분명하지 않다.
도면은 오바 쓰네키치가 작성하고 사진은 사와슌이치가 촬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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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포리 고분군 조사 자료번호 : ku.d_0003_004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