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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구성(국내성)의 조사 기록

세키노의 통구성의 조사기록을 부분적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통구성은 동서 약 7丁 반, 남북 약 5丁 반 정도의 범위를 비교적 높은 성벽으로 쌓아두었는데 동북 모서리와 서남 모서리에는 모서리각을 없애서 내면 전자는 3개의 둔각으로, 후자는 2개의 둔각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남북 양쪽의 문을 폐쇄하였는데, 북쪽에는 별도로 작은 출입문을 뚫어둔 상태라고 하였다. 그리고 동서면은 옛날 그대로 통행을 할 수 있게 만들어둔 상태이다. 서문은 2개이고 남쪽의 문은 성벽에 옹성을 만들고 북쪽 면에는 일반적인 옹성을 설치했다. 동문은 남쪽 것이 남았는데 역시 옹성이 있다.
북쪽의 것은 후세에 폐쇄된 것으로 보이고 다소의 형적을 남긴다. 성벽의 두께는 약 30척이고 높이는 20여 척인데 모두 돌로 쌓았다. 그 허리 이하는 돌을 약간씩 내어 쌓았는데 이는 성벽을 더 견고하게 하기 위한 고안이다.
그리고 4면 모두에 치를 설치하였고 그 밖에는 濠(해자)를 둘렀다. 그 해자는 지금 물이 채워지지 않았지만 북변의 것이 가장 잘 남아 있다. 성벽 위에는 女墻이 있었을 것 같지만 붕괴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통구성에 집안현치가 설치될 무렵에는 민가 13호 정도만이 있었는데, 현치가 설치된 후에는 館舍외에 약 150戶가 성내에 살게 되었다.
 
圖14_국내성 약측도(야쓰이 작도)
圖15_국내성 근경
圖16_국내성 성벽과 출토유물 (이상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세키노가 조사할 당시 성 내부의 여기저기에 붉은색 기와가 흩어져 있었는데, 그는 이를 고구려 말경의 유물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간간이 발견되는 회흑색 기와를 천 사오백 년(1913년 기준) 전의 고구려 것이라고 보았다. 즉 회색기와를 고식으로 보고 적색기와를 신식으로 판단했는데 그 근거는 밝히지 않았다.
성내 서북부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고구려 시대의 것으로 인정되는 초석이 발견되었고, 성밖 동쪽에서 동대자에 이르는 구간에 적색 기와가 많으며 동대자에서는 다수의 초석군을 발견하고 와당과 평기와 파편을 발견하였다. 그 기와는 연판문과 귀면, 그리고 남북조 시대 특유의 인동문을 가지는 것도 있었는데, 모두가 고구려 말기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때 발견한 많은 양의 기와는 일본으로 반출되었음이 확인된다(圖53~62).
세키노가 국내성의 조사에서 확인된 적색과 회색의 기와를 각각 시기가 다른 것으로 판단한 것은 이미 평양 주변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경험이 바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세키노가 평양에서 조사해서 『조선고적도보』Ⅰ에 게재한 평양 출토 기와가 대부분 적색이기 때문에, 멸망 당시까지 수도로 기능하던 평양 출토 유물이 고구려에서는 가장 늦을 것이라는 인식이 생겼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동대자(東臺子)에서 출토된 기와는 국내성 내부에서 출토되는 것과 형태와 제작기법이 동일하다고 판단했다. 세키노는 성의 안팎에서 전형적인 고구려 기와와 초석이 발견되고 성벽에도 일부 수축이 인정되지만 고구려의 느낌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고구려의 국내성 고지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1913년의 집안 조사를 마치고 기차로 돌아오는 길에 경원철도선의 중간에 해당하는 삼방(三防)에서 화재를 만나, 지니고 있던 서류와 약측도 등을 몽땅 불태우는 변을 당한다. 세키노의 보고는 다행히도 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은 나머지 세 사람의 자료와 표본주 001
각주 001)
여기서 말하는 표본이란 고구려 와당과 문자전을 말한다. 도쿄를 중심으로 일본에 있는 많은 집안 출토 유물은 이때의 세키노 조사단이 채집하여 온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확인되는 집안 자료 중에서 조사 단장인 세키노와 관련된 것이 드문 이유는 이 화재와 관련 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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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즉 『조선고적도보』Ⅰ에 제시된 약측도는 대부분 세키노가 작성한 것이 아니다. 세키노의 다른 도면과 비교하여 필체가 다르고 그 수준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 각주 001)
    여기서 말하는 표본이란 고구려 와당과 문자전을 말한다. 도쿄를 중심으로 일본에 있는 많은 집안 출토 유물은 이때의 세키노 조사단이 채집하여 온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확인되는 집안 자료 중에서 조사 단장인 세키노와 관련된 것이 드문 이유는 이 화재와 관련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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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구성(국내성)의 조사 기록 자료번호 : ku.d_0003_002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