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문제가 관영(灌嬰)에게 우현왕을 공격하도록 지시했으나 제북왕(濟北王)의 모반으로 군대를 후퇴시킴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과거에] 화친했던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의 3년(전177) 오월에 흉노 우현왕이 하남 땅으로 쳐들어 와 자리를 잡고 상군의 장성을 지키고 있던 다른 종족[蠻夷]주 001들을 공격하여 약탈했고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했다. 이에 효문제는 승상(丞相)주 002
관영(灌嬰)
주 003
각주 003)
에게 거기(車騎) 8만 5천 명을 징발해 고노(高奴)
주 004로 가서 우현왕을 치도록 했다.주 005灌嬰(? ~ 전176) : 睢陽(지금의 河南省 商丘市 남쪽) 사람으로 원래 비단 상인이었다. 그는 劉邦이 沛公이 되었을 때부터 그를 도왔다. 楚나라와 漢나라의 승패를 결정하는 滎陽 전투에서 中大夫로 楚나라를 격파하여 糧道를 끊는 큰 공을 세웠다. 御史大夫가 되어 齊와 淮北을 평정하였다. 高祖 즉위 이후 車騎將軍으로 燕王을 격파하고 漢王 信을 토벌하여 穎陰侯로 봉해졌다. 匈奴 토벌 중에 平城에서 고생하였다. 돌아와 陳豨를 토벌하고 黥布의 반란 역시 진압하였다. 高祖 사후에 列侯로 惠帝와 呂后를 모셨다. 하지만 呂后가 죽은 뒤 周勃, 陳平 등과 함께 呂氏를 몰아내고 代王을 맞아들여 文帝로 추대하였다. 周勃을 이어 승상이 되었는데, 匈奴의 공격을 방어하다가 죽었다(『史記』 권95 「樊酈滕灌列傳」 : 2667 ~ 2673).
각주 005)
[결국] 우현왕은 장성 밖으로 달아났다. 효문제가 태원에 행행하였다.주 006이 때 제북왕(濟北王)주 007이 [그 틈을 타] 모반하자 급히 문제가 [장안으로] 귀환하면서 승상이 흉노[胡]를 공격하려고 했던 군대를 물렸다.『漢書』에는 文帝가 匈奴 右賢王의 침공에 대해 조서를 내리는 내용이 보충되어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에 文帝가 詔를 내려 말하였다. “漢나라와 匈奴가 형제가 되어 변경을 침해하는 일이 없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匈奴로 공급해 주는 것을 아주 후하게 해 주었다. 지금 右賢王이 그 나라를 나와 무리를 이끌고 河南 땅에 와 있는 것은 이상하다. 다니면서 장성으로 들어와 吏卒을 잡아 죽이고 上郡의 장성을 수비하는 이민족들을 침범하여 잡아 가니 그곳에 사람이 살게 할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변방에 사는 관리들을 능멸하여 힘들게 하고 들어와 도둑질을 하니 그 무도함이 심각한데 이는 약속한 바가 아니다. 변방의 관리와 車騎 8만을 징발하여 [上郡의] 高奴로 가게 하고, 丞相 灌嬰을 보내 右賢王을 격파하게 하라.”(於是文帝下詔曰 “漢與匈奴約爲昆弟, 無侵害邊境, 所以輸遺匈奴甚厚. 今右賢王離其國, 將衆居河南地, 非常故. 往來入塞, 捕殺吏卒, 敺侵上郡保塞蠻夷, 令不得居其故. 陵轢邊吏, 入盜, 甚驁無道, 非約也. 其發邊吏車騎八萬詣高奴, 遣丞相灌嬰將擊右賢王.”(『漢書』 권94上 「匈奴列傳上」 : 3756).
이에 文帝가 詔를 내려 말하였다. “漢나라와 匈奴가 형제가 되어 변경을 침해하는 일이 없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匈奴로 공급해 주는 것을 아주 후하게 해 주었다. 지금 右賢王이 그 나라를 나와 무리를 이끌고 河南 땅에 와 있는 것은 이상하다. 다니면서 장성으로 들어와 吏卒을 잡아 죽이고 上郡의 장성을 수비하는 이민족들을 침범하여 잡아 가니 그곳에 사람이 살게 할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변방에 사는 관리들을 능멸하여 힘들게 하고 들어와 도둑질을 하니 그 무도함이 심각한데 이는 약속한 바가 아니다. 변방의 관리와 車騎 8만을 징발하여 [上郡의] 高奴로 가게 하고, 丞相 灌嬰을 보내 右賢王을 격파하게 하라.”(於是文帝下詔曰 “漢與匈奴約爲昆弟, 無侵害邊境, 所以輸遺匈奴甚厚. 今右賢王離其國, 將衆居河南地, 非常故. 往來入塞, 捕殺吏卒, 敺侵上郡保塞蠻夷, 令不得居其故. 陵轢邊吏, 入盜, 甚驁無道, 非約也. 其發邊吏車騎八萬詣高奴, 遣丞相灌嬰將擊右賢王.”(『漢書』 권94上 「匈奴列傳上」 : 3756).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灌嬰(? ~ 전176) : 睢陽(지금의 河南省 商丘市 남쪽) 사람으로 원래 비단 상인이었다. 그는 劉邦이 沛公이 되었을 때부터 그를 도왔다. 楚나라와 漢나라의 승패를 결정하는 滎陽 전투에서 中大夫로 楚나라를 격파하여 糧道를 끊는 큰 공을 세웠다. 御史大夫가 되어 齊와 淮北을 평정하였다. 高祖 즉위 이후 車騎將軍으로 燕王을 격파하고 漢王 信을 토벌하여 穎陰侯로 봉해졌다. 匈奴 토벌 중에 平城에서 고생하였다. 돌아와 陳豨를 토벌하고 黥布의 반란 역시 진압하였다. 高祖 사후에 列侯로 惠帝와 呂后를 모셨다. 하지만 呂后가 죽은 뒤 周勃, 陳平 등과 함께 呂氏를 몰아내고 代王을 맞아들여 文帝로 추대하였다. 周勃을 이어 승상이 되었는데, 匈奴의 공격을 방어하다가 죽었다(『史記』 권95 「樊酈滕灌列傳」 : 2667 ~ 2673).
- 각주 004)
-
각주 005)
『漢書』에는 文帝가 匈奴 右賢王의 침공에 대해 조서를 내리는 내용이 보충되어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에 文帝가 詔를 내려 말하였다. “漢나라와 匈奴가 형제가 되어 변경을 침해하는 일이 없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匈奴로 공급해 주는 것을 아주 후하게 해 주었다. 지금 右賢王이 그 나라를 나와 무리를 이끌고 河南 땅에 와 있는 것은 이상하다. 다니면서 장성으로 들어와 吏卒을 잡아 죽이고 上郡의 장성을 수비하는 이민족들을 침범하여 잡아 가니 그곳에 사람이 살게 할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변방에 사는 관리들을 능멸하여 힘들게 하고 들어와 도둑질을 하니 그 무도함이 심각한데 이는 약속한 바가 아니다. 변방의 관리와 車騎 8만을 징발하여 [上郡의] 高奴로 가게 하고, 丞相 灌嬰을 보내 右賢王을 격파하게 하라.”(於是文帝下詔曰 “漢與匈奴約爲昆弟, 無侵害邊境, 所以輸遺匈奴甚厚. 今右賢王離其國, 將衆居河南地, 非常故. 往來入塞, 捕殺吏卒, 敺侵上郡保塞蠻夷, 令不得居其故. 陵轢邊吏, 入盜, 甚驁無道, 非約也. 其發邊吏車騎八萬詣高奴, 遣丞相灌嬰將擊右賢王.”(『漢書』 권94上 「匈奴列傳上」 : 3756).
- 각주 006)
- 각주 007)
색인어
- 이름
- 효문제(孝文帝), 효문제, 관영(灌嬰), 효문제, 문제
- 지명
- 하남, 상군, 고노(高奴), 태원, 장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