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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모두루총

牟墓/JXM001/牟頭婁塚
  • 저필자
    권순홍(성균관대학교 박물관)
  • 날짜
    1935·1978
  • 시대
    고구려
  • 위치
  • 원소장처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 하해방촌(吉林省 通化市 集安市 太王鎭 下解放村)
  • 시대
    고구려
  • 유형
    무덤
입지
하해방고분군 남부의 평원 위에 위치한다.
유적개관
1935년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전실 정면 벽 위에 묵서의 제목이 모두루(牟頭婁)로 표기되어 있어, 고분을 모두루총으로 명명하였다. 염모묘은 둘레 길이70m, 봉토의 높이 4m인 석실봉토분이다. 묘도, 연도, 전실, 후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실은 횡장방형으로 길이 2.9m, 폭 2.3m, 높이 2.9m이다. 현실은 방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3m, 높이가 2.9m이다. 묵서의 글자는 800여자가 넘으나, 판독 가능한 글자는 350여자이다. 묵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로로 쓰여진 예서이다.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 염모와 모두루라고 하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염모는 모두루의 조부로 한국학계에서는 모두루총으로 불린다.
참고문헌
「集安高句麗墓葬」, 2007
해설
하해방고분군에 위치한 고구려 장수왕대의 석실봉토벽화분이다. 하해방은 집안분지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들판으로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의 만포시와 마주보고 있다. 모두루묘는 이 들판 한복판에 하해방2호분과 함께 위치해 있지만, 환문총을 비롯한 다른 고분은 대부분 들판 북쪽의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무덤 안에 벽화를 그린 것은 아니지만 800여자에 달하는 묵서 명문(銘文)이 있어 흔히 벽화고분으로 분류된다. 묵서 명문의 주인공을 염모(冉牟)로 보아 염모묘로 부르기도 하며, 1966년 JXM001호로 편호하였다. 모두루묘는 1935년에 처음 알려졌고 그 후 여러 차례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1978년에는 명문을 보존하기 위해 화학안료의 막을 입히기도 했다. 무덤은 돌로 현실을 만들고 흙으로 봉분을 입혔고, 주체부는 횡혈식석실이다. 둘레는 70m, 높이 4m로 중형 규모이다. 현재 둥그스름한 외형을 띠고 있지만, 본래는 위쪽이 평평하고 네모진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으로 방향은 서남향이다. 높이 110cm인 나지막한 연도를 따라 130cm정도 들어가면 석실 두 개가 나온다. 두 방 사이에 통로만 있을 뿐 다른 공간은 없다. 감실이나 측실이 없는 가장 단순한 2실묘이다. 전실은 좌우 290cm, 앞뒤 210cm로 좌우가 약간 긴 직사각형인 반면 현실인 후실은 한 변이 300cm로 정사각형에 가깝다. 벽면은 돌을 쌓은 다음 백회를 두껍게 입히고 매끈하게 미장하여 정갈한 느낌을 주지만 벽화를 그리지는 않았다. 두 방의 천장은 아주 대조적인데 전실 천장이 아치형으로 좁아지다가 꼭대기가 자그마한 직사각형으로 변하는 반면 후실 천장은 사각고임과 삼각고임으로 공간을 알맞은 비례로 분할하며 줄여나갔다. 전실 벽면의 기다란 홈과 구멍은 선반을 올리고 휘장을 쳤던 자리이며, 후실 바닥에는 주인공 부부의 시신을 안치한 관대 2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이러한 무덤 구조는 다실묘에서 단실묘로, 복잡한 2실묘에서 단순한 2실묘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준다. 묵서 명문은 전실의 정면 상단에 두루마리를 펼친 것처럼 기다랗게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 모서리에서 36cm 떨어진 지점에서 시작하여 왼쪽 모서리를 돌아 10cm정도 이어지다가 끝맺는다. 첫머리 2행은 다른 행과 달리 괘선이 없고, 글자 간격도 좁아 12자씩 적었다. 그 다음부터 79행이 이어지는데, 먹과 송곳으로 3cm전후의 괘선을 네모 반듯하게 긋고 행마다 10자씩 써내려갔다. 모두 800여 자에 이르지만, 현재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350여자에 불과하다. 묵서명문이 현실인 후실 앞에 위치해 묘지(墓誌)임을 쉽게 집작할 수 있지만 주인공에 대해서는 모두루설과 염모설이 대립하고 있다. 염모설은 묵서의 노객(奴客)이라는 표현을 예속인으로 풀이해 염모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모두루는 그의 가신으로 파악했다. 반면, 모두루설은 관등과 인명(大使者 牟頭婁)만 나오는 첫머리 2행이 제기(題記)일 것으로 보면서, 묘지의 내용이 모두루와 그 조상의 내력을 각 왕의 사적과 함께 시간 순으로 적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때 염모는 모두루의 할아버지이다. 제기 다음의 3~9행에는 고구려 건국신화와 더불어 모두루의 조상이 시조 추모성왕을 따라 북부여로부터 내려온 사실이 적혀 있고, 10~39행에는 대형(大兄) 염모가 고국원왕대에 모종의 반란 사건을 진압하고 북부여로 침입한 전연(前燕)을 물리치는 공훈을 세운 사실이 적혀 있다. 40~45행에는 대형 염모의 공훈에 힘입어 모두루의 선대가 북부여 방면 교통로 주변의 성민과 곡민들을 다스린 사실이 적혀 있다. 그리고 45행 이후에는 모두루가 선대의 공훈에 힘입어 영북부여수사(令北扶餘守事)로 임명되어 북부여에 파견되었다가 광개토왕의 사망을 접하고 통곡한 사실이 적혀 있다. 후반부에는 모두루가 장수왕대에 활동한 내용이 적혀있을 텐데 명문을 거의 판독할 수 없는 상태이다. 모두루는 장수왕대 사망했을 것이므로 이 무덤은 5세기 중반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묘지는 350여자 밖에 판독되지 않지만 5세기 전반 고구려인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비롯하여, 고구려 왕실의 출자, 대형(大兄), 대사자(大使者) 등 관등명, 영북부여수사(領北夫餘守事)나 성민(城民), 곡민(谷民)과 같은 지방제도 관련 내용 등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또한 염모에서 모두루로 이어지는 모두루가의 흥성 과정을 통해 귀족 가문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고, 이들과 국왕과의 관계를 통해 정치체제를 해명할 수 있는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북부여를 둘러싼 선비 모용부, 곧 전영과의 갈등도 담고 있어서 4~5세기 대외관계를 밝히는 데에도 중요한 시사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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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루총 자료번호 : isea.d_0002_0010_0060_0040_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