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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온달산성

溫達山城
  • 저필자
    표영관
  • 시대
    삼국시대
  • 위치
  • 원소장처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68번지
  • 시대
    고구려
  • 유형
입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하리 일대의 성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유적개관
테뫼식 석축 산성으로, 둘레는 683m가량이다. 2002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시굴조사 되었다. 현문식 성문과 수구가 남아있으며, 치성과 곡성 등이 확인된다. 온달장군과 관련된 전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현재의 석축성벽은 신라가 축조한 것이다. 아직까지 고구려 유물이 보고된 바는 없다.
출토유물
* 신라 기와, 신라 토기, 철솥, 철촉 등
참고문헌
「남한의 고구려유적」, 2006
해설
영월에서 단양으로 흘러내리는 남한강변 성산[城山/城在山, 한편 온달산성에서 단양 방향으로 약 30km 하류에는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로 유명한 적성이 위치하는데 적성산성이 위치한 산도 성산 혹은 성재산이라고 부른다.]에 위치한 산성으로, 1979년 사적 264호로 지정되었고, 1989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시행하였다.
조사된 바, 둘레는 약 685m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성벽의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성벽 높이는, 동쪽 6m, 남·북쪽 높이는 약 7~8m, 서쪽은 10m 가량이며, 두께는 3~4m에 이른다. 성벽의 기단 부분은 기본적으로 자연 암반을 이용하였으나, 일부 구간에서는 기단을 보강하기 위하여 기단을 돌로 석축한 부분도 확인된다. 이와 같은 산성 축조 방식은 고구려 산성에서 흔히 보이는 양식이다. 특히 북쪽 성벽의 경우, 돌을 45°로 맞물려 쌓아 기단을 만들고 여기에서 1m 안쪽에 성벽을 쌓아올렸는데, 충청북도 보은의 삼년산성에서도 이와 같은 축조기법이 확인되고 있다.
남서쪽, 동쪽, 북쪽 세 지점에서 문터를 발견하였고, 고구려 산성의 특징인 치성(雉城)도 확인되었다. 특히 남서쪽 문터의 형식이나, 동쪽 문터의 돌출부위는 독특한 형식으로 주목된다.
북쪽 성벽에서 배수시설인 수구가 발견되었고, 성 내부에는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유물로는 토기와 기와 조각, 숫돌, 철로 만든 화살 촉 등이 수습되었는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한정되었다. 이를 근거로 이 산성이 통일신라기까지만 사용되었음을 추정되었다.
한편 고구려 평강왕(平岡王/平原王)의 사위 온달(溫達) 장군이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장소가 이곳이라는 지역민들의 설화가 전해지면서 산성을 ‘온달산성’으로 명명하였다.
실상 온달은 아단성(阿旦城)에서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아단성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아단성은 대체로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阿且山城/峨嵯山城)으로 비정되고 있으나, 단양 온달산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삼국사기』에 온달이 출정하면서 ‘계립현(雞立峴/鳥嶺)과 죽령(竹嶺) 이서(以西)의 땅을 귀속시키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는 것卷第四十五 列傳 第五>온달(溫達)에 근거한 것이다.
최근인 2016년 8월 ‘온달산성 종합정비기본계획’에 따라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이 학술발굴조사를 진행하였는데, 온달산성의 새로운 성격이 규명되었다. 우선 석환(石丸)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이 석환들은 지름 10-50cm 정도의 둥근 강돌로 성벽 안쪽을 따라서 다량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서 성의 방어를 위해 투석전을 벌인 정황이 확인되었다.
또 통일신라 말 고려 초로 추정되는 주거 건물지와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온달산성이 통일신라 이후에도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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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달산성 자료번호 : isea.d_0002_0030_0070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