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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문화유산

석주

石柱
  • 저필자
    김지영(숙명여자대학교)
  • 시대
    고구려
  • 원소장처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 민주촌
  • 시대
    고구려
  • 유형
    기타
입지
집안시 태왕진 민주촌 남쪽에 위치
유적개관
화강암으로 제작하였으며 2개가 있는데, 약 40m 떨어져 있다. 석주는 끝부분은 원형이지만 몸체는 방형이며, 높이는 각각 2.2m, 3.6m이다.
참고문헌
「文物地圖集」
해설
석주는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 민추존 집안기차역에서 남쪽으로 50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유적의 남쪽에서 600m 떨어진 곳에 압록강이 있고 서쪽은 운봉 발전소 구역이다. 동서 방향으로 있는 석주 2개 사이의 간격은 40m이고 위치는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두 개의 석주는 주택지 내에 세워져 있는 상태이다.
처음 1936년에는 일본학자들이 석주와 초석만을 조사한 뒤 지상의 石柱만 알려져 있었다. 1961년에 고구려의 유적으로 파악하고 문물보호단위에 포함되었다. 2003년에 이 지역 도시개발공사에 협력하기 위해서 석주 유적의 서쪽 채소밭을 긴급 발굴하였다. 여기서 대형 건물지 3개가 확인되었다. 석주 기초와 주변 지역 발굴을 실시한 뒤 총 면적은 3,606,72㎡에 달한다. 석주 유적은 크게 동쪽의 석주유적과 서쪽의 건물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석주는 화강암 재질로 만들었다. 윗부분은 둥그스름한 네모형이고, 높이는 각각 2.2m와 3.6m, 바닥의 폭은0.64m와 0.77m이다. 표면은 매끄럽다. 대궐의 양문 앞에 세우는 기둥과 같은 유형의 건축물 일부로 추정된다.
2003년에 석주 서쪽에서 3개의 건물지 유적이 발견된 뒤 마을 이름을 따서 민주유적이라고 지었다. 이 건물지들은 담으로 둘러싼 각기 독립적인 건물지(院落)로 보인다, 3개의 건물지가 대체적으로 훼손이 심해서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1호 건물지는 발굴구역에 한계가 있어 전체 윤곽과 내부의 건축물 배치 상황이 확인되지 않았고, 남벽과 서벽의 일부, 그리고 2기의 건물지를 확인했다. 2호 건물지에서는 동벽, 남벽, 서벽이 확인되었고, 총 5개의 건물지도 확인되었다. 3호 건물지는 발굴구역의 서쪽으로, 건물지 내 대부분 유구들이 발굴구역에서 벗어나 있고, 이미 논밭으로 경작되고 있어 전면 발굴을 진행하지 못했다. 확인된 부분은 동벽과 남벽 일부뿐이다. 3호 건물지의 담장의 경우는 청석, 화강암, 석회암을 사용해서 만들었는데, 벽 내부는 강돌로 채웠다. 벽의 파괴가 심한 상황이지만, 남아 있는 유적의 모습으로 볼 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안으로 들여쌓은 방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3개의 건물지 내부에서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2호 건물지에서 개원통보(開元通寶) 1개가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단지, 시루나 다양한 토기의 파편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국내성 안에서 출토된 고구려 시기의 토기와 비슷하다. 또한 1호, 2호 건축물에서 발견된 팔각형의 기초석은 고구려의 기초석 기둥자리와 비슷한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특징들로 볼 때 석주나 건물지는 고구려시기의 건축유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유적 안에서 건축물의 크기에 비해 건축물을 만들 때 들었던 재료 등의 유물이 극히 적게 나와서, 고구려 시대에 완성하지 못한 건물일 가능성도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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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자료번호 : isea.d_0002_0010_0060_0040_1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