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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자치통감장편

고려 사신 서눌(徐訥)에게 의복과 돈을 주어 돌려보냄

  • 날짜
    1017년 12월 (음)(天禧 元年(1017) 12月 己卯)
  • 출전
    卷90 天禧 元年(1017) 12月 己卯
처음에 여진국 사람 회골(回鶻)주 001
각주 001)
回鶻 : 唐·宋代에 위구르족을 지칭하는 말이다. 중국의 史書에서는 흉노의 후예로 흉노 공주와 이리의 결합으로 생겨났다는 민족 기원 설화가 전해진다. 위구르의 카간이 당에 청해 명칭을 이전의 回紇에서 回鶻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하면서 宋代에도 回鶻로 칭하게 된 것이다. 몽골 고원과 중앙아시아에서 주로 활약한 투르크 계통 민족으로 840년에 위구르 유목제국이 붕괴된 이후로는 중국 북부, 고창, 하서회랑 등지로 흩어져 공동체를 건설하고 이후 성립하는 제국들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현재는 주로 중국의 신강위구르자치구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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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혼하노(渾河盧)가 본국에서 와서 조공하고 돌아갔는데 길가에서 발해(渤海)주 002
각주 002)
渤海 : 699∼926. 7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걸쳐 중국의 동북(만주) 지방 동반부에서 소련의 연해주와 한반도 동북부에 걸쳐 있었던 나라. 高句麗 別部 출신의 大祚榮이 고구려 遺民과 말갈족들을 모아 옛고구려 땅인 東牟山(지금의 돈화현 오동성으로 추정)에서 震國이란 국호로 건국했다. 712년 唐에서 대조영을 ‘渤海郡王’으로 봉하면서 발해로 불리게 되었다. 제2대 武王 때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발해의 전성기는 宣王 大仁秀의 재위 기간(818∼830)으로, 이때 발해는 ‘海東盛國’으로 불렸다. 이 시기 강역은 ‘方五千里’로 동쪽은 동해, 북쪽은 송화강·흑룡강, 서쪽은 장춘, 심양, 압록강구, 남쪽은 함경도 용흥강 지역이었으며, 5京, 15府, 62州의 지방 제도에 의해 다스려졌다. 당의 3省 6部 9寺 제도와 유사한 3省 6部 1臺 7寺 1院 1監의 관제로 국정을 운영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으로 구성된 국가인 까닭에 발해에 대한 인식은 매우 다양하여 중국사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구려의 연장이라 하여 한국사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위 기록에서의 발해는 발해 유민들 혹은 정안국의 잔존 세력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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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공격을 받아 다시 돌아와 거란(요)에 예속되었다. 이 때 고려사신 서눌에게 돌아가라고 명하고 이어서 의복과 돈을 지급했다.

  • 각주 001)
    回鶻 : 唐·宋代에 위구르족을 지칭하는 말이다. 중국의 史書에서는 흉노의 후예로 흉노 공주와 이리의 결합으로 생겨났다는 민족 기원 설화가 전해진다. 위구르의 카간이 당에 청해 명칭을 이전의 回紇에서 回鶻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하면서 宋代에도 回鶻로 칭하게 된 것이다. 몽골 고원과 중앙아시아에서 주로 활약한 투르크 계통 민족으로 840년에 위구르 유목제국이 붕괴된 이후로는 중국 북부, 고창, 하서회랑 등지로 흩어져 공동체를 건설하고 이후 성립하는 제국들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현재는 주로 중국의 신강위구르자치구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渤海 : 699∼926. 7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걸쳐 중국의 동북(만주) 지방 동반부에서 소련의 연해주와 한반도 동북부에 걸쳐 있었던 나라. 高句麗 別部 출신의 大祚榮이 고구려 遺民과 말갈족들을 모아 옛고구려 땅인 東牟山(지금의 돈화현 오동성으로 추정)에서 震國이란 국호로 건국했다. 712년 唐에서 대조영을 ‘渤海郡王’으로 봉하면서 발해로 불리게 되었다. 제2대 武王 때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발해의 전성기는 宣王 大仁秀의 재위 기간(818∼830)으로, 이때 발해는 ‘海東盛國’으로 불렸다. 이 시기 강역은 ‘方五千里’로 동쪽은 동해, 북쪽은 송화강·흑룡강, 서쪽은 장춘, 심양, 압록강구, 남쪽은 함경도 용흥강 지역이었으며, 5京, 15府, 62州의 지방 제도에 의해 다스려졌다. 당의 3省 6部 9寺 제도와 유사한 3省 6部 1臺 7寺 1院 1監의 관제로 국정을 운영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으로 구성된 국가인 까닭에 발해에 대한 인식은 매우 다양하여 중국사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구려의 연장이라 하여 한국사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위 기록에서의 발해는 발해 유민들 혹은 정안국의 잔존 세력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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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신 서눌(徐訥)에게 의복과 돈을 주어 돌려보냄 자료번호 : jt.k_0003_0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