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련(伊吉連; 이키노무라지)
이길련(伊吉連; 이키노무라지)
장안인(長安人) 유가양옹(劉家揚雍)으로부터 나왔다.
【주석】
1. 이길련(伊吉連)
이길(伊吉)의 씨명은 일기(壹伎)로도 표기한다. 일기국(壹岐國)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현재의 장기현(長岐縣) 일기군(壹岐郡)이다. 이길련(伊吉連)의 옛 성은 후히토[史]이다. 『일본서기』 천무기(天武紀) 12년(683) 10월조에 일기사(壹岐史)는 연(連)으로 개성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길련씨 일족으로는 『일본서기』 서명기(舒明紀) 4년(632)조에 이기사을등(伊岐史乙等), 동 대화(大化) 2년(646) 3월조에 이기사마려(伊岐史麻呂), 천무(天武) 원년(672) 7월조에 일기사한국(壹伎史韓國)이 있고, 『속일본기』 문무(文武) 4년(700) 6월조에 이기련박득(伊岐連博得), 경운(慶雲) 4년(707) 5월조에 이길련고마려(伊吉連古麻呂)가있다. 『영집해(令集解)』 승니령 「임승강조(任僧綱條)」 에 이길련자인구의(伊吉連子人口宜) 등이 보인다. 이 외에도 목간 등 기타의 자료에도 다수 확인되고 있다.
이 중에서 이기련박득(伊岐連博得)은 이길련박덕(伊吉連博德)이다. 그는 제명(齊明) 5년(659)에서 동 7년에 걸쳐 견당사의 일원으로서 파견된다. 천지(天智) 3년(664)에는 일본에 파견된 당사(唐使) 곽무종(郭務悰)을 대재부(大宰府)에서 접대하고, 천지 6년에는 웅진도독부에서 보낸 당의 사절 사마법총총(司馬法聰聡)의 송사의 임무를 맡아 귀국시켰다. 또 지통(持統) 9년(695)에는 신라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문무(文武) 4년(700)에 직광사로 승진하여 대보율령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가 남긴 기록으로 『이길박덕서(伊吉博德書)』 가 있고, 성립 연대는 천무 12년(683) 이후로 추정된다. 이 책은 이길박덕(伊吉博德)이 견당사로 파견되었을 때의 수행 기록으로 『일본서기』 백치(白雉) 5년(654) 2월조, 제명기(齊明紀) 5년(659) 2월조, 동 6년 7월조, 동 7년 8월조에 관련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선린국보기(善鄰國寶記)』 에 인용된 『해외국기(海外國記)』 에는 대을중(大乙中) 이기사박덕(伊岐史博德)이라고 인명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사성(史姓)으로 되어 있다. 연(連) 성을 갖기 이전의 성이 사(史)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이길련고마려(伊吉連古麻呂)는 견당사로 파견되었고(『속일본기』 경운 4년 5월조), 이길련택마려(伊吉連宅麻呂, 雪連宅滿)는 견신라사에 보냈다(『萬葉集』15-3644, 3688). 이길련익마려(伊吉連益麻呂)는 견고려부사(遣高麗副使, 遣渤海使)에 임명되었다(『속일본기』 天平寶字 6년 12월조). 이길련씨 중에 외교 사절이 유독 많이 배출된 것은 문자 지식에 밝은 지식인이 많고 해외 사정에 밝아 통역에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당에서 온 이길련씨뿐 아니라 백제계, 신라계 등 한반도에서의 도래인 출신 관인 중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길련씨와 동족으로 생각되는 씨족으로 『속일본기』천평보자(天平寶字) 3년(759) 12월조에 일기사산수(壹岐史山守) 등 403인이 연(連) 성을 받고 있다.
이길(伊吉)의 씨명은 일기(壹伎)로도 표기한다. 일기국(壹岐國)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현재의 장기현(長岐縣) 일기군(壹岐郡)이다. 이길련(伊吉連)의 옛 성은 후히토[史]이다. 『일본서기』 천무기(天武紀) 12년(683) 10월조에 일기사(壹岐史)는 연(連)으로 개성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길련씨 일족으로는 『일본서기』 서명기(舒明紀) 4년(632)조에 이기사을등(伊岐史乙等), 동 대화(大化) 2년(646) 3월조에 이기사마려(伊岐史麻呂), 천무(天武) 원년(672) 7월조에 일기사한국(壹伎史韓國)이 있고, 『속일본기』 문무(文武) 4년(700) 6월조에 이기련박득(伊岐連博得), 경운(慶雲) 4년(707) 5월조에 이길련고마려(伊吉連古麻呂)가있다. 『영집해(令集解)』 승니령 「임승강조(任僧綱條)」 에 이길련자인구의(伊吉連子人口宜) 등이 보인다. 이 외에도 목간 등 기타의 자료에도 다수 확인되고 있다.
이 중에서 이기련박득(伊岐連博得)은 이길련박덕(伊吉連博德)이다. 그는 제명(齊明) 5년(659)에서 동 7년에 걸쳐 견당사의 일원으로서 파견된다. 천지(天智) 3년(664)에는 일본에 파견된 당사(唐使) 곽무종(郭務悰)을 대재부(大宰府)에서 접대하고, 천지 6년에는 웅진도독부에서 보낸 당의 사절 사마법총총(司馬法聰聡)의 송사의 임무를 맡아 귀국시켰다. 또 지통(持統) 9년(695)에는 신라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문무(文武) 4년(700)에 직광사로 승진하여 대보율령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가 남긴 기록으로 『이길박덕서(伊吉博德書)』 가 있고, 성립 연대는 천무 12년(683) 이후로 추정된다. 이 책은 이길박덕(伊吉博德)이 견당사로 파견되었을 때의 수행 기록으로 『일본서기』 백치(白雉) 5년(654) 2월조, 제명기(齊明紀) 5년(659) 2월조, 동 6년 7월조, 동 7년 8월조에 관련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선린국보기(善鄰國寶記)』 에 인용된 『해외국기(海外國記)』 에는 대을중(大乙中) 이기사박덕(伊岐史博德)이라고 인명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사성(史姓)으로 되어 있다. 연(連) 성을 갖기 이전의 성이 사(史)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이길련고마려(伊吉連古麻呂)는 견당사로 파견되었고(『속일본기』 경운 4년 5월조), 이길련택마려(伊吉連宅麻呂, 雪連宅滿)는 견신라사에 보냈다(『萬葉集』15-3644, 3688). 이길련익마려(伊吉連益麻呂)는 견고려부사(遣高麗副使, 遣渤海使)에 임명되었다(『속일본기』 天平寶字 6년 12월조). 이길련씨 중에 외교 사절이 유독 많이 배출된 것은 문자 지식에 밝은 지식인이 많고 해외 사정에 밝아 통역에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당에서 온 이길련씨뿐 아니라 백제계, 신라계 등 한반도에서의 도래인 출신 관인 중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길련씨와 동족으로 생각되는 씨족으로 『속일본기』천평보자(天平寶字) 3년(759) 12월조에 일기사산수(壹岐史山守) 등 403인이 연(連) 성을 받고 있다.
2. 유가양옹(劉家揚雍)
『속일본후기』 승화(承和) 2년(835) 9월조에는 이길사풍종(伊吉史豐宗) 및 동족 12인이 자생숙녜(滋生宿禰) 씨성을 받았고, 당인(唐人) 양옹(楊雍)의 7세손인 귀인(貴仁)의 후예라고 기록하고 있다. 상기 원문에 보이는 “이길련(伊吉連)은 장안인(長安人) 유양옹(劉揚雍)으로부터 나왔다”라는 기록에 대응한다. 여기에 나오는 이길사풍종(伊吉史豐宗)은 이길련(伊吉連)의 지족으로 생각된다.
『속일본후기』 승화(承和) 2년(835) 9월조에는 이길사풍종(伊吉史豐宗) 및 동족 12인이 자생숙녜(滋生宿禰) 씨성을 받았고, 당인(唐人) 양옹(楊雍)의 7세손인 귀인(貴仁)의 후예라고 기록하고 있다. 상기 원문에 보이는 “이길련(伊吉連)은 장안인(長安人) 유양옹(劉揚雍)으로부터 나왔다”라는 기록에 대응한다. 여기에 나오는 이길사풍종(伊吉史豐宗)은 이길련(伊吉連)의 지족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