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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국(夫餘國)의 멸망에 대한 무제(武帝)의 조서(詔書)

[서진의] 무제[재위: 265~289] 때에 [부여가] 자주 와서 조공을 바쳤다. [서진] 태강 6년 (285)에 이르러 모용외주 001
번역주 001)
慕容廆 : 모용외(269~333)는 5호16국시대 선비족 모용부의 수장으로 훗날 前燕을 세운 慕容皝의 아버지이다. 昌黎 棘城[현재 중국 요령성 義縣] 사람이다. 그는 선비족 모용부 부족장인 慕容涉歸(?~283)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283년 부친이 사망한 후 그의 동생 慕容耐가 정권을 장악하고 모용외를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요동으로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 285년에 모용내가 國人에 의해 살해되자 모용외가 수장으로 추대되었다. 모용외는 즉위 후 대외확장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서진 幽州의 昌黎를 공략하여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하였고, 286년에는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왕 依慮를 자살하게 하였다. 서진은 부여에 원군을 파견하여 모용외를 격파하였으며, 289년 모용외는 서진에 복속하였다. 서진은 모용외를 鮮卑都督에 임명하였으며, 모용외는 于文部·段部의 침입을 피해 徒河의 靑山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294년에는 棘城으로 다시 본거지를 옮긴 모용외는 부족민에게 농업을 가르치고 서진의 법제를 채용하여 부족의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307년 모용외는 적대 세력인 우문부를 격파하고 스스로 鮮卑大單于를 칭하였고, 309년 서진이 동이교위 李臻의 피살과 311년 永嘉의 난으로 혼란에 빠지자 그에게 귀부하여 오는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력을 크게 키웠다. 이때 피해를 입은 서진의 平州刺史 崔毖가 318년에 우문부·단부· 고구려를 끌어들여 모용외를 협공하려 하였다. 모용외는 세 나라의 군사를 이간질시켜 위기를 벗어나고 우문부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최비는 모용외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결국 319년에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며, 모용외는 요동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모용외는 고구려와 적대관계를 가져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320년에 동진은 모용외를 安北將軍 平州刺史로 삼았으며, 이후 동진과 우호관계를 맺고 後趙와 대립하였다. 321년 동진에서는 모용외에게 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 車騎將軍 平州牧 遼東公을 제수하였다. 325년에는 후조에 복속하였던 우문부가 石勒의 명령에 따라 모용외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으며, 오히려 반격을 당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333년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은 337년 스스로 燕王이라 칭하고 국호를 燕으로 하였는데, 이를 前燕이라고 한다. 352년 모용황의 뒤를 이은 慕容儁이 황제라 칭하면서 조부 모용외를 高祖 宣武帝로 추존하였다(이상 『진서』 권108, 재기 8, 모용외 ; 지배선, 198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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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습격을 받아 격파되어 [부여]왕 의려는 자살하고, 그의 자제는 달아나 옥저주 002
번역주 002)
沃沮 : 옥저는 함경남도 함흥 일대부터 동해안을 따라 두만강 유역에 걸쳐 있었던 종족과 읍락 집단을 가리킨다. 북은 읍루·부여, 남은 예에 접하고 있었다. 3세기 중엽에 편찬된 『삼국지』 동이전에는 옥저·동옥저·북옥저·남옥저 등의 이름이 나온다. 남옥저의 중심지는 함흥 일대에, 북옥저는 두만강 유역에 비정하는 것이 우리 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옥저는 동옥저라고도 불렸으며, 남과 북에 각각의 중심지가 있어 남옥저와 북옥저로 구분하였다. 동옥저는 옥저의 총칭으로 사용되었으며 옥저의 중심세력을 남옥저라고도 불렸다.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동옥저조에 의하면 옥저는 개마대산의 동쪽 大海에 접해 있으며, 지형은 동북이 길어 천 리나 되고 북으로는 挹婁·부여와 접하고 남으로는 濊貊과 접한다고 하였다. 옥저문화가 고고학적 발굴조사에 의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80년대부터 중국, 러시아 연구자에 의해서이다. 옥저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제공한 것은 綏芬河 유역에 위치한 중국 길림성 東寧縣 團結유적이다. 기원전 4·5세기~1세기대에 興凱湖 유역에서 두만강 유역에 걸쳐 있는 초기철기문화를 단결문화라고 부르는데 이 문화의 주인공을 옥저와 연결시키고 있다. 이 문화가 수분하를 따라 러시아 연해주 방면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이를 크로우노프카문화라고 부른다. 두 문화를 합쳐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라고 부른다(林澐, 1985 ; D. L. 브로댠스키 저·정석배 역, 1996). 이 문화의 고고학적 특징은 경질무문토기, 나무그루터기형 손잡이가 붙은 발형토기, 시루, 고배, 주철제 장방형 철도끼, 呂자형·凸자형 주거지, 터널식 온돌시설 등이다(匡瑜, 1982 ; 강인욱, 2008). 이후 중국 학계에서는 단결문화의 범위와 이를 남긴 종족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지다가 단결문화=옥저문화라는 대전제 위에서 옥저의 북쪽 경계선을 두만강 유역 혼춘·연길 일대에서 수분하 유역으로, 다시 북쪽 흥개호 부근 300km 이상 북상하였지만 함경도 지역을 옥저의 주무대에서 제외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고고학 자료를 종족과 연계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써 문헌기록과는 모순되는 점이 많다. 이에 대해 우리 학계에서는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하여 한반도 중부 지역의 경질무문토기문화(중도식토기문화)가 여러 면에서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와 유사한 점에 주목하여 연해주와 한반도 동해안을 잇는 광역의 환동해지역 철기시대 경질토기문화권을 설정하고 그 안에 옥저문화를 위치 지우고자 하였다(강인욱, 2008). 즉 옥저문화권을 두 단계로 나누어 전기는 기원전 4세기~기원전 1세기로 북은 흥개호, 서는 장광재령 이동, 동은 연해주, 남은 함경북도 지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고, 후기는 1~3세기로 함경도와 한반도 중부 지방의 중도식토기문화 분포 지역을 포함시켜 보았다. 반면 초기철기시대 이래 남옥저와 북옥저는 서로 다른 문화 배경을 가지고 성장해왔으며, 이들이 종족적 일체감을 갖게 된 것을 고구려의 집단 예속민에서 비롯된 정치·사회적인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현혜, 2010)가 있다. 남옥저의 중심지는 현재의 함흥 지역이며 동예와의 경계선은 정평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이병도, 1976). 북옥저의 지리적 위치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혼춘설이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 남옥저의 중심지였던 함흥 지역의 정치집단은 臨屯의 중요 세력의 하나였다. 기원전 108년 한 군현으로 편제된 후 이곳에 夫租縣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75년 현도군이 만주 興京 老城 방면으로 이동한 후 낙랑군의 東部都尉에 소속되었다. 30년 동부도위가 폐지된 후 일시 漢의 侯國으로 봉해졌다가 56년 고구려 태조왕 때 고구려에게 복속되었다. 동옥저를 구성한 세력 중에서는 不耐·華麗·沃沮 등이 유력하였다. 고구려에 신속된 후 맥포·어염·해중식물과 미녀를 공물로 고구려에 바쳤다. 옥저는 평양 정백동364호무덤에서 初元 4년(기원전 45)에 작성된 낙랑군 호구부에는 1,150호에 인구가 5,111구 정도가 되는 중간 크기의 현이었고(윤용구, 2010),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동옥저조에 의하면 3세기 중반 옥저는 5,000여 호였으며, 언어나 음식, 의복·가옥·예절 등도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옥저의 여러 읍락은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해 大君長은 없었고 각 읍락별로 渠帥가 자치적으로 읍락 내의 일을 운영해 나갔다. 옥저인은 步戰에 능하였고, 혼인 풍속으로는 賣買婚的 성격을 가진 민며느리제가 행해졌으며, 장례는 시체를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뼈만 추려 커다란 木槨에 넣는 일종의 2차 장을 행하였는데 한 집안 사람 모두가 동일한 목곽을 사용하였다. 옥저는 처음에는 낙랑군 동부도위의 관할하에 귀속되었다가 뒤에 고구려의 세력이 개마고원을 넘어 진출해오자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 지역에 대해 각 읍락 단위로 大人을 고구려의 使者로 삼아 공납을 징수하게 하는 등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이상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동옥저 ; 이병도, 1976 ; 이현혜, 19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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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목숨을] 보전하였다.
[서진의] 무제는 [그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부여왕이 대대로 [우리 왕조에 대해서] 충성과 효도를 지키다가 [이번에] 사악한 오랑캐주 003
번역주 003)
惡虜 : 모용외의 전연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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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멸망되었음을 매우 가엾게 생각하노라. 만약 그의 유족으로서 나라를 부흥시킬 만한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방책을 마련하여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하게 하라.”
[이에] 유사(有司)가 보고하였다. “호동이교위주 004
번역주 004)
護東夷校尉 : 校尉는 전국시대부터 있었으며 원래는 전투부대의 대장이었다. 漢代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무제 때에는 금위군의 장교로서 8교위를 설치하였고, 그 지위는 대략 장군 다음이었다. 이후 교위는 중국 변경에서 이민족을 통제·감독하기 위해 파견한 군정장관의 성격을 가진 관직으로서 祿秩은 2,000석이었다. 위진시대(220~317)와 남북조시대(317~589)에는 다소 변동이 있었지만 한대의 제도를 계승하여 교위를 설치·운영하였다. 수·당대 이후 교위는 무산관으로 변화되었는데, 품계는 6~9품이었다. 동이교위는 3세기경 중국 왕조가 주변의 이민족들을 통제·관리하기 위해 서진에 의해 설치된 최고의 무관이다. 동이교위의 역할은 무엇보다 동이 제국 및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거나 이 지역에 대한 자국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무력행사 및 외교관계 업무를 담당하였다(이주현, 2000). 조위시대에는 襄平[지금의 遼陽]에 동이교위를 설치하여 요동·창려·현도·대방·낙랑의 5군을 통솔케 하였다. 얼마 안 있어 공손씨의 장악하에 있다가 司馬懿가 공손연을 멸망시킨 후에 서진은 다시 호동이교위를 설치하고 동북 지역 여러 민족을 통할하는 임무를 수행케 하였다(윤용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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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영이 부여를 구원하지 않아서 기민하게 대처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무제는] 조서를 내려 [선우]영을 파면시키고 하감주 005
번역주 005)
何龕 : 생몰년 미상. 후한대 명문가인 廬江 何氏 何楨의 아들로 서진 무제 때인 285년부터 280년 말까지 평주 요동군 양평현에서 선우영을 대신하여 호동이교위에 재직하고 있었던 서진의 관리이다. 모용외가 항복하러 왔을 때 사대부의 예를 취하였으나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여 모용외에게 창피를 당한 일화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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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교체하였다.
이듬해(286)에 부여 후왕(後王) 의라주 006
번역주 006)
依羅 : 생몰년 미상. 부여의 왕. 依慮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선비족에게 빼앗긴 부여를 재탈환하였다. 285년 선비족 모용외의 기습을 받아 의려가 죽고 나라가 멸망하였다. 이때 의라를 포함한 그 자제들은 옥저로 피신하였다. 286년 의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의라는 서진의 東夷校尉 何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하감은 督郵 賈沉을 파견하여 의라를 돕도록 하였는데, 이에 맞서 모용외가 孫丁을 보내 요격하게 하였다. 이 전투에서 가침이 손정을 죽이며 승리하자 선비족의 군사는 물러났으며, 의라는 부여를 다시 일으키게 되었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 『진서』 열전 부여국 ; 이병도,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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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하]감에게 [사자를] 보내, 현재 남은 사람을주 007
번역주 007)
見人 : 이 문장에서 ‘見’은 ‘현재 현’자로 ‘지금’의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見人’은 ‘현재 남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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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끌고 돌아가서 다시 옛 나라를 회복하기를 원한다고 하며 원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하]감은 전열을 정비하고 독우(督郵)주 008
번역주 008)
督郵 : 『진서』 재기 모용외전과 『자치통감』 권81에는 ‘督護’로 되어 있다. 督郵는 한대에 설치되어 위진대에도 계승되었다가 당대에 폐지되었다. 한대에는 郡守의 보좌관으로 감찰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督護는 무관명으로 서진대에 설치된 方鎭將軍의 部將이다. 장군이 휘하 무관에게 일정한 군사관할권을 가진 지휘관 역할을 하도록 부여한 加官이었다. 동진대에 설치된 參軍督護는 병영을 통령하고 부곡을 거느리는 등 주로 병사의 일을 관장하였으나, 유송대에는 설치되지 않았다(『송서』 권39, 백관 상). 그 후 남제와 양대에는 참군독호 이외에 西江督護나 流民督護 등이 나타나는데, 이는 제도화된 것이 아니라 군사 편제상의 편의적인 개념에 불과하였다. 陳의 시조 陳覇先은 양나라 말기에 서강독호로서 후경의 난을 진압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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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침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부여의 사자를] 호송하게 하였다. [모용]외 또한 그들을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가]침이 [모용]외와 싸워 크게 깨뜨리니, [모용]외의 군대는 물러가고 [의]라는 나라를 회복하였다.
그 후에도 [모용]외는 매번 [부여의] 사람을 잡아다가 중국에 팔았다. 황제가 그것을 가엾게 여겨 다시 조서를 내려 국가의 비용으로 속전(贖錢)을 주고 [그들을 부여로] 되돌려 보내었으며, 사주(司州)주 009
번역주 009)
司州 : 사주는 한대에 설치된 사예교위부에서 유래하며 司隷州라고도 부르는데, 낙양과 장안을 포함하는 수도권을 말한다. 기원전 106년 한 무제가 중앙집권을 위해 전국을 13부로 나누고 여기에 刺史를 두었는데 수도 장안과 경기 7군은 중앙 직할하에 두었다. 후한대에는 7개 군과 106개 현을 관할하였으며, 수부는 수도인 洛陽이었다. 그 관할 범위는 지금의 하북성 남부, 하남성 북부, 산서성 남부 및 섬서성 渭河 평원 지역에 해당되는데, 주요 도시로는 홍농·낙양·하내·영안이 있었다. 194년에 凉州와 사예주의 三輔 지역을 분할하여 雍州를 따로 설치하였고, 213년에는 사예부를 豫州·冀州·雍州로 나누었다. 220년 조위가 건국하고 낙양에 도읍을 정하자 한대의 사예 지역과 弘農 4군 및 기주의 위군을 합쳐서 ‘司隷’라는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만들어 다스렸다. 서진이 통일하여 전국을 19개 주로 개편할 때 사예는 司州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서진 말기에는 5호의 침입으로 사주는 胡族에게 빼앗겼다. 그 후 5호16국시대에 들어와 동진에 의해 徐縣[지금의 江蘇省 泗洪縣 남쪽], 合肥[지금의 安徽省 합비] 등의 지역으로 僑置되었고, 낙양을 장악한 세력에 의해 置廢가 거듭되었다. 311년에는 前趙의 劉聰이 사주를 荊州로 바꾸었고, 石勒은 다시 사주로 고쳤는데 남북조시대에도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었다. 송·양·동위·북주는 여러 곳으로 교치를 한 반면 북위는 낙양을 점령한 후 493년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할 때 사주로 개칭할 정도로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張正田,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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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기주(冀州)주 010
번역주 010)
冀州 : 전한 무제 때 설치한 13개 자사부의 하나이며, 10개의 郡國을 감찰하였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하북성 중남부와 산동성 서쪽끝, 하남성 북쪽 끝에 해당한다. 후한 초기의 치소는 高邑縣[지금의 하북성 柏鄕縣 北固城]이었으나 桓帝·靈帝대에 鄴縣[지금의 하북성 鄴城]으로 옮겼으며, 9개의 군국을 관장하였다. 관할구역은 전한대보다 확대되어 북쪽으로 하북성 大淸河와 천진시 海河 이남으로 확대되었고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 위진 때에는 치소가 信都縣[지금의 하북성 冀州]이었으며, 관할구역은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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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 주에 명령을 내려 부여 사람의 매매를 금지시켰다.

  • 번역주 001)
    慕容廆 : 모용외(269~333)는 5호16국시대 선비족 모용부의 수장으로 훗날 前燕을 세운 慕容皝의 아버지이다. 昌黎 棘城[현재 중국 요령성 義縣] 사람이다. 그는 선비족 모용부 부족장인 慕容涉歸(?~283)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283년 부친이 사망한 후 그의 동생 慕容耐가 정권을 장악하고 모용외를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요동으로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 285년에 모용내가 國人에 의해 살해되자 모용외가 수장으로 추대되었다. 모용외는 즉위 후 대외확장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서진 幽州의 昌黎를 공략하여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하였고, 286년에는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왕 依慮를 자살하게 하였다. 서진은 부여에 원군을 파견하여 모용외를 격파하였으며, 289년 모용외는 서진에 복속하였다. 서진은 모용외를 鮮卑都督에 임명하였으며, 모용외는 于文部·段部의 침입을 피해 徒河의 靑山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294년에는 棘城으로 다시 본거지를 옮긴 모용외는 부족민에게 농업을 가르치고 서진의 법제를 채용하여 부족의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307년 모용외는 적대 세력인 우문부를 격파하고 스스로 鮮卑大單于를 칭하였고, 309년 서진이 동이교위 李臻의 피살과 311년 永嘉의 난으로 혼란에 빠지자 그에게 귀부하여 오는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력을 크게 키웠다. 이때 피해를 입은 서진의 平州刺史 崔毖가 318년에 우문부·단부· 고구려를 끌어들여 모용외를 협공하려 하였다. 모용외는 세 나라의 군사를 이간질시켜 위기를 벗어나고 우문부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최비는 모용외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결국 319년에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며, 모용외는 요동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모용외는 고구려와 적대관계를 가져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320년에 동진은 모용외를 安北將軍 平州刺史로 삼았으며, 이후 동진과 우호관계를 맺고 後趙와 대립하였다. 321년 동진에서는 모용외에게 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 車騎將軍 平州牧 遼東公을 제수하였다. 325년에는 후조에 복속하였던 우문부가 石勒의 명령에 따라 모용외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으며, 오히려 반격을 당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333년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은 337년 스스로 燕王이라 칭하고 국호를 燕으로 하였는데, 이를 前燕이라고 한다. 352년 모용황의 뒤를 이은 慕容儁이 황제라 칭하면서 조부 모용외를 高祖 宣武帝로 추존하였다(이상 『진서』 권108, 재기 8, 모용외 ; 지배선, 1986 참조). 바로가기
  • 번역주 002)
    沃沮 : 옥저는 함경남도 함흥 일대부터 동해안을 따라 두만강 유역에 걸쳐 있었던 종족과 읍락 집단을 가리킨다. 북은 읍루·부여, 남은 예에 접하고 있었다. 3세기 중엽에 편찬된 『삼국지』 동이전에는 옥저·동옥저·북옥저·남옥저 등의 이름이 나온다. 남옥저의 중심지는 함흥 일대에, 북옥저는 두만강 유역에 비정하는 것이 우리 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옥저는 동옥저라고도 불렸으며, 남과 북에 각각의 중심지가 있어 남옥저와 북옥저로 구분하였다. 동옥저는 옥저의 총칭으로 사용되었으며 옥저의 중심세력을 남옥저라고도 불렸다.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동옥저조에 의하면 옥저는 개마대산의 동쪽 大海에 접해 있으며, 지형은 동북이 길어 천 리나 되고 북으로는 挹婁·부여와 접하고 남으로는 濊貊과 접한다고 하였다. 옥저문화가 고고학적 발굴조사에 의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80년대부터 중국, 러시아 연구자에 의해서이다. 옥저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제공한 것은 綏芬河 유역에 위치한 중국 길림성 東寧縣 團結유적이다. 기원전 4·5세기~1세기대에 興凱湖 유역에서 두만강 유역에 걸쳐 있는 초기철기문화를 단결문화라고 부르는데 이 문화의 주인공을 옥저와 연결시키고 있다. 이 문화가 수분하를 따라 러시아 연해주 방면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이를 크로우노프카문화라고 부른다. 두 문화를 합쳐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라고 부른다(林澐, 1985 ; D. L. 브로댠스키 저·정석배 역, 1996). 이 문화의 고고학적 특징은 경질무문토기, 나무그루터기형 손잡이가 붙은 발형토기, 시루, 고배, 주철제 장방형 철도끼, 呂자형·凸자형 주거지, 터널식 온돌시설 등이다(匡瑜, 1982 ; 강인욱, 2008). 이후 중국 학계에서는 단결문화의 범위와 이를 남긴 종족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지다가 단결문화=옥저문화라는 대전제 위에서 옥저의 북쪽 경계선을 두만강 유역 혼춘·연길 일대에서 수분하 유역으로, 다시 북쪽 흥개호 부근 300km 이상 북상하였지만 함경도 지역을 옥저의 주무대에서 제외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고고학 자료를 종족과 연계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써 문헌기록과는 모순되는 점이 많다. 이에 대해 우리 학계에서는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하여 한반도 중부 지역의 경질무문토기문화(중도식토기문화)가 여러 면에서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와 유사한 점에 주목하여 연해주와 한반도 동해안을 잇는 광역의 환동해지역 철기시대 경질토기문화권을 설정하고 그 안에 옥저문화를 위치 지우고자 하였다(강인욱, 2008). 즉 옥저문화권을 두 단계로 나누어 전기는 기원전 4세기~기원전 1세기로 북은 흥개호, 서는 장광재령 이동, 동은 연해주, 남은 함경북도 지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고, 후기는 1~3세기로 함경도와 한반도 중부 지방의 중도식토기문화 분포 지역을 포함시켜 보았다. 반면 초기철기시대 이래 남옥저와 북옥저는 서로 다른 문화 배경을 가지고 성장해왔으며, 이들이 종족적 일체감을 갖게 된 것을 고구려의 집단 예속민에서 비롯된 정치·사회적인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현혜, 2010)가 있다. 남옥저의 중심지는 현재의 함흥 지역이며 동예와의 경계선은 정평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이병도, 1976). 북옥저의 지리적 위치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혼춘설이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 남옥저의 중심지였던 함흥 지역의 정치집단은 臨屯의 중요 세력의 하나였다. 기원전 108년 한 군현으로 편제된 후 이곳에 夫租縣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75년 현도군이 만주 興京 老城 방면으로 이동한 후 낙랑군의 東部都尉에 소속되었다. 30년 동부도위가 폐지된 후 일시 漢의 侯國으로 봉해졌다가 56년 고구려 태조왕 때 고구려에게 복속되었다. 동옥저를 구성한 세력 중에서는 不耐·華麗·沃沮 등이 유력하였다. 고구려에 신속된 후 맥포·어염·해중식물과 미녀를 공물로 고구려에 바쳤다. 옥저는 평양 정백동364호무덤에서 初元 4년(기원전 45)에 작성된 낙랑군 호구부에는 1,150호에 인구가 5,111구 정도가 되는 중간 크기의 현이었고(윤용구, 2010),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동옥저조에 의하면 3세기 중반 옥저는 5,000여 호였으며, 언어나 음식, 의복·가옥·예절 등도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옥저의 여러 읍락은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해 大君長은 없었고 각 읍락별로 渠帥가 자치적으로 읍락 내의 일을 운영해 나갔다. 옥저인은 步戰에 능하였고, 혼인 풍속으로는 賣買婚的 성격을 가진 민며느리제가 행해졌으며, 장례는 시체를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뼈만 추려 커다란 木槨에 넣는 일종의 2차 장을 행하였는데 한 집안 사람 모두가 동일한 목곽을 사용하였다. 옥저는 처음에는 낙랑군 동부도위의 관할하에 귀속되었다가 뒤에 고구려의 세력이 개마고원을 넘어 진출해오자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 지역에 대해 각 읍락 단위로 大人을 고구려의 使者로 삼아 공납을 징수하게 하는 등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이상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동옥저 ; 이병도, 1976 ; 이현혜, 1997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03)
    惡虜 : 모용외의 전연을 가리킨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4)
    護東夷校尉 : 校尉는 전국시대부터 있었으며 원래는 전투부대의 대장이었다. 漢代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무제 때에는 금위군의 장교로서 8교위를 설치하였고, 그 지위는 대략 장군 다음이었다. 이후 교위는 중국 변경에서 이민족을 통제·감독하기 위해 파견한 군정장관의 성격을 가진 관직으로서 祿秩은 2,000석이었다. 위진시대(220~317)와 남북조시대(317~589)에는 다소 변동이 있었지만 한대의 제도를 계승하여 교위를 설치·운영하였다. 수·당대 이후 교위는 무산관으로 변화되었는데, 품계는 6~9품이었다. 동이교위는 3세기경 중국 왕조가 주변의 이민족들을 통제·관리하기 위해 서진에 의해 설치된 최고의 무관이다. 동이교위의 역할은 무엇보다 동이 제국 및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거나 이 지역에 대한 자국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무력행사 및 외교관계 업무를 담당하였다(이주현, 2000). 조위시대에는 襄平[지금의 遼陽]에 동이교위를 설치하여 요동·창려·현도·대방·낙랑의 5군을 통솔케 하였다. 얼마 안 있어 공손씨의 장악하에 있다가 司馬懿가 공손연을 멸망시킨 후에 서진은 다시 호동이교위를 설치하고 동북 지역 여러 민족을 통할하는 임무를 수행케 하였다(윤용구, 2005).바로가기
  • 번역주 005)
    何龕 : 생몰년 미상. 후한대 명문가인 廬江 何氏 何楨의 아들로 서진 무제 때인 285년부터 280년 말까지 평주 요동군 양평현에서 선우영을 대신하여 호동이교위에 재직하고 있었던 서진의 관리이다. 모용외가 항복하러 왔을 때 사대부의 예를 취하였으나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여 모용외에게 창피를 당한 일화가 유명하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6)
    依羅 : 생몰년 미상. 부여의 왕. 依慮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선비족에게 빼앗긴 부여를 재탈환하였다. 285년 선비족 모용외의 기습을 받아 의려가 죽고 나라가 멸망하였다. 이때 의라를 포함한 그 자제들은 옥저로 피신하였다. 286년 의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의라는 서진의 東夷校尉 何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하감은 督郵 賈沉을 파견하여 의라를 돕도록 하였는데, 이에 맞서 모용외가 孫丁을 보내 요격하게 하였다. 이 전투에서 가침이 손정을 죽이며 승리하자 선비족의 군사는 물러났으며, 의라는 부여를 다시 일으키게 되었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 『진서』 열전 부여국 ; 이병도, 1976). 바로가기
  • 번역주 007)
    見人 : 이 문장에서 ‘見’은 ‘현재 현’자로 ‘지금’의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見人’은 ‘현재 남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8)
    督郵 : 『진서』 재기 모용외전과 『자치통감』 권81에는 ‘督護’로 되어 있다. 督郵는 한대에 설치되어 위진대에도 계승되었다가 당대에 폐지되었다. 한대에는 郡守의 보좌관으로 감찰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督護는 무관명으로 서진대에 설치된 方鎭將軍의 部將이다. 장군이 휘하 무관에게 일정한 군사관할권을 가진 지휘관 역할을 하도록 부여한 加官이었다. 동진대에 설치된 參軍督護는 병영을 통령하고 부곡을 거느리는 등 주로 병사의 일을 관장하였으나, 유송대에는 설치되지 않았다(『송서』 권39, 백관 상). 그 후 남제와 양대에는 참군독호 이외에 西江督護나 流民督護 등이 나타나는데, 이는 제도화된 것이 아니라 군사 편제상의 편의적인 개념에 불과하였다. 陳의 시조 陳覇先은 양나라 말기에 서강독호로서 후경의 난을 진압한 일이 있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9)
    司州 : 사주는 한대에 설치된 사예교위부에서 유래하며 司隷州라고도 부르는데, 낙양과 장안을 포함하는 수도권을 말한다. 기원전 106년 한 무제가 중앙집권을 위해 전국을 13부로 나누고 여기에 刺史를 두었는데 수도 장안과 경기 7군은 중앙 직할하에 두었다. 후한대에는 7개 군과 106개 현을 관할하였으며, 수부는 수도인 洛陽이었다. 그 관할 범위는 지금의 하북성 남부, 하남성 북부, 산서성 남부 및 섬서성 渭河 평원 지역에 해당되는데, 주요 도시로는 홍농·낙양·하내·영안이 있었다. 194년에 凉州와 사예주의 三輔 지역을 분할하여 雍州를 따로 설치하였고, 213년에는 사예부를 豫州·冀州·雍州로 나누었다. 220년 조위가 건국하고 낙양에 도읍을 정하자 한대의 사예 지역과 弘農 4군 및 기주의 위군을 합쳐서 ‘司隷’라는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만들어 다스렸다. 서진이 통일하여 전국을 19개 주로 개편할 때 사예는 司州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서진 말기에는 5호의 침입으로 사주는 胡族에게 빼앗겼다. 그 후 5호16국시대에 들어와 동진에 의해 徐縣[지금의 江蘇省 泗洪縣 남쪽], 合肥[지금의 安徽省 합비] 등의 지역으로 僑置되었고, 낙양을 장악한 세력에 의해 置廢가 거듭되었다. 311년에는 前趙의 劉聰이 사주를 荊州로 바꾸었고, 石勒은 다시 사주로 고쳤는데 남북조시대에도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었다. 송·양·동위·북주는 여러 곳으로 교치를 한 반면 북위는 낙양을 점령한 후 493년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할 때 사주로 개칭할 정도로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張正田, 2005). 바로가기
  • 번역주 010)
    冀州 : 전한 무제 때 설치한 13개 자사부의 하나이며, 10개의 郡國을 감찰하였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하북성 중남부와 산동성 서쪽끝, 하남성 북쪽 끝에 해당한다. 후한 초기의 치소는 高邑縣[지금의 하북성 柏鄕縣 北固城]이었으나 桓帝·靈帝대에 鄴縣[지금의 하북성 鄴城]으로 옮겼으며, 9개의 군국을 관장하였다. 관할구역은 전한대보다 확대되어 북쪽으로 하북성 大淸河와 천진시 海河 이남으로 확대되었고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 위진 때에는 치소가 信都縣[지금의 하북성 冀州]이었으며, 관할구역은 축소되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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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국(夫餘國)의 멸망에 대한 무제(武帝)의 조서(詔書) 자료번호 : jd.k_0005_0097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