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이전의 실효성
*
82. 본 소재판부 우선 당사자들이 실효성으로 제시한 1954년 이전의 여러 활동들을 분석하고자 한다.
83. 1914년 7월 3일에 가야(니제르) 지역 사령관인 사두(Sadoux)의 부행정관(administrateur adjoint)이 므와이앙-니제르(다호메이) 권역의 사령관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그 속에서 그는 그 강의 양안 모두에서 그 지방의 주민들이 특정 섬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그는 이 서한을 “오직 페울족(Peuhls)에게 양안으로부터 방목 허가가 발행되어야 할 때 명확한 결정을 내리는 것과 두 식민지의 원주민에 대한 영토 관할권을 설정한다고 하는 목적만을 위하여” 작성하였다. 사두의 부행정관은 그의 서한에, 쿨루(Koulou)와 나이리지아 국경 사이의 그 강의 전 지역을 답사한 것에 근거하여 작성되었고, 주된 가항수로에 대한 그 섬들의 위치에 따라 어느 식민지에 각 섬이 소속되는지를 표시한, 국경지방에 있는 섬들의 목록을 첨부하였다. 사두의 부행정관은 이 수로를 “그 강의 주된 수로로서, 가장 넓은 수로가 아니라 저수위에서도 항해 가능한 유일한 수로”(강조는 원문에 있음)로 정의하였다.
84. 그의 서한에서 사두의 부행정관은 그 목록의 내용에 대하여 이의가 있는지를 더 논의하기 위하여 므와이앙-니제르 권역의 사령관이 가야에 오도록 초청하였다. 소송기록에는 이 서한에 대한 반응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회합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협약이 체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1917년 5월의 일자가 붙어 있는 “가야의 地方誌”(Monographie de Gaya)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가야 소구역의 임시 수장이었던 에스페레(Esperet)씨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 5월의 일자가 붙어 있는 “가야의 地方誌”(Monographie de Gaya)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가야 소구역의 임시 수장이었던 에스페레(Esperet)씨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1914년 7월에 가야 소구역 사령관은 칸디 권역 사령관과 현지 협의를 가졌고 그들은 자신들 각각의 식민지 수장에 대하여 니제르강의 상시적인 가항수로만이 경계가 되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러한 건의는 공식적으로 승인된 바가 없지만, 그 이후 언제나 페울 부족의 여러 그룹들 사이의 모든 분쟁 해결의 기초로 사용되었다.”
그는 또한 “레테 마을”은 가야에 의하여 통치된다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레테 마을”은 가야에 의하여 통치된다고 말하였다.
85. 1919년에 다호메이가 가야의 레테섬 통치에 이의를 제기하여 가야의 레테섬 통치에 관하여 곤란이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14년의 잠정협정으로 알려지게 된 1914년의 협약은 그 이후의 여러 해 동안 준수된 것으로 보인다.
1925년에 다호메이는 사두 서한에서 다호메이에 귀속시켰던, 가야 맞은편에 있는 세 개의 섬과 레테를 교환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니제르 총독으로부터 그의 반응에 관한 질의를 받고 니아메이(니제르) 권역 사령관은 잠정협정에 근거한 그러한 상황이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진술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였다.
1925년에 다호메이는 사두 서한에서 다호메이에 귀속시켰던, 가야 맞은편에 있는 세 개의 섬과 레테를 교환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니제르 총독으로부터 그의 반응에 관한 질의를 받고 니아메이(니제르) 권역 사령관은 잠정협정에 근거한 그러한 상황이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진술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였다.
“더 명확한 경계가 채택되어야 한다: . . . 두 식민지 사이의 경계는 그 강의 최고수위선에서의 우안에 의하여 표시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섬들은 어떤 분쟁의 여지도 없이 식민지 니제르에 소속될 것이다.”
다호메이의 제안에 대해서도 니아메이 권역 사령관의 제안에 대해서도 아무런 행동이 취하여지지 않았다.
86. 소송기록은 그 기간부터 경계 문제를 언급하는 다른 문서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1914년의 잠정협정은 위 제61 문단으로부터 제64 문단까지에 기술되어 있는 서신의 교환을 초래한 1954년의 사건이 있을 때까지는 만족스럽게 기능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1941년 6월 10일에 도소(니제르) 권역 사령관에게 보낸 전보에서 가야 소구역장은 1914년의 잠정협정을 언급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니제르강의 상시적인 가항수로만이 경계로 채택되었다. 1914년 이래 그러한 건의는 공식적으로 승인된 바가 없다. 이 문제에 관한 결정이 바람직하다.”(강조는 원문에 있음)
87. 1954년 이전의 기간에 레테섬은 계속적으로 가야 소구역에 의하여 통치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보존되어 있는 가야의 조세 기록부는 1925, 1927, 1928, 1930, 1932와 1936년에 “레테”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
“레테”는 수민 수가 표시되어 1932, 1945, 1946과 1954년의 가야 소구역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들의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도한 1944년과 1945년의 인구조사(recensement, census) 목록에도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니제르 총독은 1946년에 레테섬에서의 야자나무 벌채를 허가하였다.
88. 베냉은 현재 심리의 대상이 되어 있는 기간 동안 레테섬이나 주된 가항수로 좌측에 위치한 어떠한 다른 섬에 대하여 권한을 실효적으로 행사한 것에 관한 식민지 당국의 어떠한 공식문서도 제출하지 않았다.
색인어
- 지명
- 가야, 쿨루(Koulou), 가야, 가야, 가야, 가야, 칸디, 니제르강, 가야, 레테섬, 가야, 레테섬, 가야, 레테, 니아메이, 니아메이, 가야, 니제르강, 레테섬, 가야, 가야, 레테, 레테, 가야, 레테섬, 레테섬
- 법률용어
- 실효성, 영토 관할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