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王)
왕(王)
고려국(高麗國) 사람 종5위하 왕중문(王仲文)[법명(法名)은 동루(東樓)이다.]로부터 나왔다.
【주석】
1. 왕(王)
왕(王)의 씨명은 고구려의 성(姓)인 왕(王)에서 유래한다.
왕씨의 일족으로는 『속일본기』 경운(慶雲) 원년(704) 정월 계사조에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한 왕경수(王敬受)가 있고, 동 신호경운(神護慶雲) 원년(767) 11월 병인조에는 사적으로 주전(鑄錢)한 혐의로 왕청마려(王淸麻呂) 등 40인에게 주전부(鑄錢部)의 성을 내리고 출우국(出羽國)으로 유배를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정창원문서』 에도 다수의 왕씨 인명이 나온다. 천평(天平) 7년(735) 윤11월부 「상모국봉호조교역장(相模國封戶租交易帳)」(『大日本古文書』 1-640)에 왕선덕(王善德), 천평(天平) 10년(738) 2월 8일 「사경등행사수실(寫經等行事手實)」(동 7-143)에 왕국익(王國益), 천평 10년 10월 15일부 「사소소해안(寫疏所解案)」(동 24-226)에 왕광만려(王廣万呂), 천평승보(天平勝寶) 4년(752) 정월 26일부 「장황상지장(裝潢上紙帳)」(동 12-217)에 왕마양(王馬養), 천평보자(天平寶字) 6년(762) 8월 「미매가전용장(米賣價錢用帳)」(동 5-266)에 왕광도(王廣島)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평안유문(平安遺文)』 에도 다수 기록되어 있다. 왕칙종(王則宗, 金石文編-117), 왕장환(王藏丸, 金石文編-119), 왕시봉(王是奉, 金石文編-119), 왕위실(王爲實, 8-3077), 왕종직(王宗直, 8-3077), 왕위강(王爲綱, 8-3077) 등이 있다.
왕(王)의 씨명은 고구려의 성(姓)인 왕(王)에서 유래한다.
왕씨의 일족으로는 『속일본기』 경운(慶雲) 원년(704) 정월 계사조에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한 왕경수(王敬受)가 있고, 동 신호경운(神護慶雲) 원년(767) 11월 병인조에는 사적으로 주전(鑄錢)한 혐의로 왕청마려(王淸麻呂) 등 40인에게 주전부(鑄錢部)의 성을 내리고 출우국(出羽國)으로 유배를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정창원문서』 에도 다수의 왕씨 인명이 나온다. 천평(天平) 7년(735) 윤11월부 「상모국봉호조교역장(相模國封戶租交易帳)」(『大日本古文書』 1-640)에 왕선덕(王善德), 천평(天平) 10년(738) 2월 8일 「사경등행사수실(寫經等行事手實)」(동 7-143)에 왕국익(王國益), 천평 10년 10월 15일부 「사소소해안(寫疏所解案)」(동 24-226)에 왕광만려(王廣万呂), 천평승보(天平勝寶) 4년(752) 정월 26일부 「장황상지장(裝潢上紙帳)」(동 12-217)에 왕마양(王馬養), 천평보자(天平寶字) 6년(762) 8월 「미매가전용장(米賣價錢用帳)」(동 5-266)에 왕광도(王廣島)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평안유문(平安遺文)』 에도 다수 기록되어 있다. 왕칙종(王則宗, 金石文編-117), 왕장환(王藏丸, 金石文編-119), 왕시봉(王是奉, 金石文編-119), 왕위실(王爲實, 8-3077), 왕종직(王宗直, 8-3077), 왕위강(王爲綱, 8-3077) 등이 있다.
2. 왕중문(王仲文)
왕중문(王仲文)은 환속한 승려 출신이다. 『속일본기』 대보(大寶) 원년(701) 8월 임인조에 따르면, 그의 법명은 동루(東樓)이며 환속하여 왕중문(王中文)이라는 본성과 이름을 되돌렸다고 한다. 『정창원문서』 양로(養老) 2년(718) 이전의 「관인고시장(官人考試帳)」에는 “종6위하 행천문박사(行天文博士) 왕중문(王中文)[45세이며, 우경(右京)이다.]”이라고 하고, 태일(太一), 둔갑, 천문, 육임식(六壬式), 산술, 상지(相地) 등에 능하고, 점복의 효험이 가장 많고 최고라고 평하고 있다(『大日本古文書』 24-553). 그는 양로 2년 정월에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되었다. 또 『속일본기』 양로 5년(721) 정월 갑술조에 문인과 무사는 국가가 중히 여기는 바이며 의학·점복·방술은 고금으로 숭상되어 온바 백료들 중에서 학업이 우수하고 사범이 될 만한 자에게 특별히 상을 주고 후생에게 장려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중 우수한 관인 인재들 가운데 왕중문의 이름이 보인다. 『가전(家傳)』(하)에도 음양가로서 이름이 저견되고 있다.
왕중문(王仲文)은 환속한 승려 출신이다. 『속일본기』 대보(大寶) 원년(701) 8월 임인조에 따르면, 그의 법명은 동루(東樓)이며 환속하여 왕중문(王中文)이라는 본성과 이름을 되돌렸다고 한다. 『정창원문서』 양로(養老) 2년(718) 이전의 「관인고시장(官人考試帳)」에는 “종6위하 행천문박사(行天文博士) 왕중문(王中文)[45세이며, 우경(右京)이다.]”이라고 하고, 태일(太一), 둔갑, 천문, 육임식(六壬式), 산술, 상지(相地) 등에 능하고, 점복의 효험이 가장 많고 최고라고 평하고 있다(『大日本古文書』 24-553). 그는 양로 2년 정월에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되었다. 또 『속일본기』 양로 5년(721) 정월 갑술조에 문인과 무사는 국가가 중히 여기는 바이며 의학·점복·방술은 고금으로 숭상되어 온바 백료들 중에서 학업이 우수하고 사범이 될 만한 자에게 특별히 상을 주고 후생에게 장려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중 우수한 관인 인재들 가운데 왕중문의 이름이 보인다. 『가전(家傳)』(하)에도 음양가로서 이름이 저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