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의 주거형태와 제도 및 풍속 등에 대한 설명
그 나라(합렬)는 서역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였다. 왕이 거주하는 성은 사방이 10여 리였다. 돌을 쌓아 집을 만드는데 평평하고 모난 것이 마치 고대(高臺) 같았고, 들보·기둥·기와·벽돌을 쓰지 않았으며, 그 안은 높고도 널찍해서 빈 공간이 수십 간(間)이었다. 창과 문짝은 모두 화려한 무늬로 조각했고, 황금색과 푸른색으로 그림을 그려 넣었다.주 001 땅위에는 양탄자와 융단을 펼쳐 놓았고, 군신(君臣)·상하(上下)·남녀의 구분 없이 서로 모일 때에는 모두 땅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 나라 사람들은 국왕을 쇄노단(鎖魯檀)이라 칭하였는데, 군장(君長)이라는 의미였다.주 002 남자들은 두발을 깎고 나서 머리를 백포(白布)로 동여매었고, 여자들 또한 백포로 머리를 덮어씌우고 겨우 두 눈만을 드러내었다.주 003 상하(上下)가 서로 부를 때에는 모두 이름을 사용하였다. 상견(相見) 시에는 다만 조금 몸을 굽히고, 처음 만날 때에는 한 다리를 굽히고 세 번 [무릎을] 꿇었는데, 남녀 모두 마찬가지였다. 식사 시에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았고, 자기(瓷器)를 사용하였다.주 004 포도로 술을 빚었다.주 005 교역에는 은전(銀錢)을 사용하고, 대소(大小)의 3등급주 006이 있었는데, 사주(私鑄)를 금하지 않았다. 추장에게 세금을 납부할 때 인기(印記)를 사용하였는데, 날인이 없는 것은 금하여 사용할 수 없었다. 교역에 대해서는 모두 상세(商稅)를 10분의 2를 징수하였다. 두곡(斗斛)을 모르고, 다만 권형(權衡)만을 사용하였다. 관부(官府)는 없었지만, 관할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도완(刀完)이라 불렀다. 또한 형법(刑法)이 없었고, 사람을 죽여도 벌금을 물리는 데 그쳤다.주 007 자매(姉妹)를 처첩(妻妾)으로 삼았다. 복상(服喪)은 100일에 그쳤고, 관(棺)은 사용하지 않았으며, 포(布)로 시신을 싸서 매장하였다. 항상 묘지에서 제사를 드렸지만, 조종(祖宗)은 제사 드리지 않고, 또한 귀신도 제사 드리지 않았으며, 오직 배천(拜天) 의례(儀禮)만 중시하였다.주 008 간지(干支)주 009와 삭망(朔望)주 010이 없이 7일을 일주(一週)로 하여 한 바퀴 돌면 다시 시작하였다.주 011 매년 2월과 10월을 재월(齋月)로 정하여 낮에는 음식을 들지 않고 밤이 되어야 먹었는데, 한 달이 다 되면 비로소 [어육(魚肉) 등] 비릿한 음식을 들었다. 성중(城中)에 큰 토실(土室)주 012을 지어 중간에 동기(銅器) 하나를 설치했는데 둘레가 수(數) 장(丈)이었고, 윗면에는 문자를 새겼는데 마치 고정(古鼎)의 형상 같았다. 유학(游學)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모였는데 마치 중국의 태학(太學)주 013
각주 013)
같았다.주 014 달리기를 잘 하는 사람이 하루에 300리를 달렸는데, 급한 일이 있어 파견된 사자(使者)가 있으면 화살을 가지고 달려가 보고하였다.주 015太學: 중국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國學, 즉 國子監을 말한다. 국자감은 隋나라 大業 3년(607)에 처음 설치하여, 당시 祭酒 1명, 司業 1명, 丞 명인을 두었으며 國子學과 太學을 설치했다. 唐나라 초, 國子學으로 개편하고 太常寺 관할에 두었으며, 國子學, 太學, 廣文, 四門, 律, 書, 算의 7學을 설치하였다. 宋元 시대를 거쳐 명대에 이르러 國子學은 최고 學府가 되었다. 洪武 15년(1382)에 국자감으로 개칭한 후 南京에 설치했으며, 國學이라고도 불렀다. 永樂 원년(1403)에는 北京에도 국자감을 설치했으며, 永樂 18년(1420) 북경으로 천도 후, 결국 兩京 두 곳에 국자감을 설치 운용하였다. 학생은 府, 州, 縣學의 生員 가운데 뽑았는데, 捐納을 통해 입학한 사람들은 例監生이라 불렀다. 청대에도 명대의 예에 따라 順治 원년(1644)에 국자감을 설치하고 禮部 소속으로 두었지만, 이후 국자감이 독자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각주 015)
습속(習俗)이 사치와 낭비를 숭상하여 용도(用度)에 절제가 없었다.『西域蕃國志』에 의하면, “有善步走者, 一日可行二三百里, 擧足輕便, 疾於馬馳. 然非生而善走, 蓋自幼習慣而能, 凡官府有急務, 則令其持箭走報, 以示急切. 常腰懸小鈴, 手持骨朶, 其行如飛”라 하였다. 즉,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어서 하루에 200~300리를 갈 수 있었는데, 걸음이 가볍고 편하여, 말을 타고 달리는 것보다 빨랐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잘 달렸던 것은 아니니, 어렸을 때부터 빨리 달리는 데 익숙해져 그런 능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 같다. 官府에서 급한 용무가 있으면 곧 그에게 화살을 가지고 달려가서 보고토록 함으로써 시급하고 절박함을 보였다. 항상 허리에는 조그마한 방울을 매달고 손에는 뼛조각을 가지고 다녔는데, 그 빠르기가 나는 듯하였다는 것이다.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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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學: 중국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國學, 즉 國子監을 말한다. 국자감은 隋나라 大業 3년(607)에 처음 설치하여, 당시 祭酒 1명, 司業 1명, 丞 명인을 두었으며 國子學과 太學을 설치했다. 唐나라 초, 國子學으로 개편하고 太常寺 관할에 두었으며, 國子學, 太學, 廣文, 四門, 律, 書, 算의 7學을 설치하였다. 宋元 시대를 거쳐 명대에 이르러 國子學은 최고 學府가 되었다. 洪武 15년(1382)에 국자감으로 개칭한 후 南京에 설치했으며, 國學이라고도 불렀다. 永樂 원년(1403)에는 北京에도 국자감을 설치했으며, 永樂 18년(1420) 북경으로 천도 후, 결국 兩京 두 곳에 국자감을 설치 운용하였다. 학생은 府, 州, 縣學의 生員 가운데 뽑았는데, 捐納을 통해 입학한 사람들은 例監生이라 불렀다. 청대에도 명대의 예에 따라 順治 원년(1644)에 국자감을 설치하고 禮部 소속으로 두었지만, 이후 국자감이 독자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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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5)
『西域蕃國志』에 의하면, “有善步走者, 一日可行二三百里, 擧足輕便, 疾於馬馳. 然非生而善走, 蓋自幼習慣而能, 凡官府有急務, 則令其持箭走報, 以示急切. 常腰懸小鈴, 手持骨朶, 其行如飛”라 하였다. 즉,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어서 하루에 200~300리를 갈 수 있었는데, 걸음이 가볍고 편하여, 말을 타고 달리는 것보다 빨랐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잘 달렸던 것은 아니니, 어렸을 때부터 빨리 달리는 데 익숙해져 그런 능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 같다. 官府에서 급한 용무가 있으면 곧 그에게 화살을 가지고 달려가서 보고토록 함으로써 시급하고 절박함을 보였다. 항상 허리에는 조그마한 방울을 매달고 손에는 뼛조각을 가지고 다녔는데, 그 빠르기가 나는 듯하였다는 것이다.
색인어
- 지명
- (합렬), 서역,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