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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보는 독도

地理志 / 江原道 / 三陟都護府 / 蔚珍縣

사료해설
이 자료는 세종의 명으로 맹사성(孟思誠), 권진(權軫), 윤회(尹淮) 등이 완성한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수정·보완하여 1454년(단종 2년) 『세종실록』을 편찬할 때 부록으로 편입한 것이다. 모두 8책으로 전국 328개의 군현에 관한 인문지리적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조선의 통치영역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자료로서 조선이 도서민에 대한 쇄환정책을 계속 유지했으나 울릉도와 독도가 여전히 조선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세종실록』 「지리지」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조에는 우산(于山; 독도)과 무릉(武陵: 울릉도) 이 두 섬이 울진현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두 섬의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독도가 울릉도의 가시거리 안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조선이 국초부터 울진현의 속도로서 우산도(독도)와 무릉도(울릉도)의 존재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于山、武陵二島在縣正東海中。【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新羅時, 稱于山國, 一云鬱陵島。 地方百里, 恃險不服, 智證王十二年, 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謂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以木造猛獸, 分載戰舡抵其國, 誑之曰: “汝若不服, 則卽放此獸。” 國人懼來降。 高麗太祖十三年, 其島人使白吉土豆獻方物。 毅宗十三年, 審察使金柔立等回來告: “島中有泰山, 從山項向東行至海一萬餘步, 向西行一萬三千餘步, 向南行一萬五千餘步, 向北行八千餘步, 有村落基址七所。 或有石佛像鐵鍾石塔。 多生柴胡蒿本石南草。 我太祖時, 聞流民逃入其島者甚多, 再命三陟人金麟雨, 爲按撫使, 刷出空其地。 麟雨言: “土地沃饒, 竹大如柱, 鼠大如猫, 桃核大於升。 他物稱是。”】
번역문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2섬이 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 또는 울릉도(鬱陵島)라 하였는데, 지방(地方)이 1백 리이며, 〈사람들이 지세가〉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아니하므로, 지증왕(智證王) 12년에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가 되어 이르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와서 위엄으로는 복종시키기 어려우니, 가히 계교로써 하리라.” 하고는, 나무로써 사나운 짐승을 많이 만들어서 여러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에 가서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서 〈너희들을〉 잡아먹게 하리라.”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13년에, 그 섬 사람들이 백길토두(白吉土豆)로 하여금 방물(方物)을 헌납하게 하였다. 의종(毅宗) 13년에 심찰사(審察使) 김유립(金柔立) 등이 돌아와서 고하기를, “섬 가운데 큰 산이 있는데, 산꼭대기로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1만여 보이요, 서쪽으로 가기 1만 3천여 보이며, 남쪽으로 가기 1만 5천여 보이요, 북쪽으로 가기 8천여보이며, 촌락의 터가 7곳이 있고, 간혹 돌부처·쇠북·돌탑이 있으며, 멧미나리[柴胡]·호본(蒿本)·석남초(石南草) 등이 많이 난다.”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 때, 유리하는 백성들이 그 섬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 자가 심히 많다 함을 듣고, 다시 삼척(三陟) 사람 김인우(金麟雨)를 명하여 안무사(安撫使)를 삼아서 사람들을 쇄출(刷出)하여 그 땅을 비우게 하였는데, 인우가 말하기를, “땅이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기둥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 같고, 복숭아씨가 되[升]처럼 큰데, 모두 물건이 이와 같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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