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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토사숙녜(土師宿禰; 하지노스쿠네)

토사숙녜(土師宿禰; 하지노스쿠네)
 천수일명(天穗日命; 아메노호히노미코토)의 12세손인 가미건반근명(可美乾飯根命; 우마시카라히네노미코토)의 후손이다. 광인천황(光仁天皇; 구와우닌텐노)의 천응(天應) 원년에, 토사(土師)를 고쳐서 관원(菅原; 스가하라)이라는 씨를 내렸다. 천황의 명령으로 대지조신(大枝朝臣; 오에노아오미)이라는 성을 다시 내렸다.
 
【주석】
1. 토사숙녜(土師宿禰)
토사(土師)라는 씨명은 식륜(埴輪) 등의 토기를 제작하고 장례 및 능묘 관리 등을 담당하는 토사부(土師部)의 반조씨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서기』 수인(垂仁) 32년 7월 6일조에 의하면, 수인의 왕후 일엽초원명(日葉酢媛命)이 죽자 종래 산 사람을 순장하던 풍습을 없애기 위하여 신하들에게 장례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는데, 이때 토사씨의 시조인 야견숙녜(野見宿禰)가 토부(土部) 100인을 출운(出雲)에서 불러와 산 사람이나 짐승 대신 흙으로 빚은 토기를 쓰도록 하였다. 이러한 토기를 식륜(埴輪)이라고 하며, 이를 계기로 고분에 식륜을 쓰게 되었고, 야견숙녜는 토부신(土部臣)이라는 성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토부련(土部連)의 시조 전승이다. 이후 웅략(雄略) 9년 5월조에 토사련소조(土師連小鳥)에게 무덤을 만들고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한편 『고사기』 수인단에서는 토사부를 정했다고 하였으므로, 토부와 토사부는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토사씨는 율령제하의 제릉사(諸陵司)와 상의사(喪儀司)의 관인으로 활동한 사람이 많다.
토사숙녜의 원래 성은 연(連)이었는데, 천무(天武) 13년(685) 12월 기묘에 토사숙녜라는 성을 받았다(『일본서기』 ). 토사숙녜씨의 일족으로는 연성(連姓) 시기에 토사련소도(土師連小鳥, 『일본서기』 웅략 9년 5월조), 토사팔도련(土師八島連, 『일본서기』 용명 2년 4월병오조), 토사련반촌(土師連磐村, 『일본서기』 숭준 즉위전기 2년 6월 경술조), 토사련저수(土師連猪手, 『일본서기』 추고 11년 2월 병자조 등), 토사련토(土師連菟, 『일본서기』 추고 18년 10월 정유조), 토사련신(土師連身, 『일본서기』 대화 5년 3월 기사조), 토사련팔수(土師連八手, 『일본서기』 백치 4년 5월 임술조), 토사련토덕(土師連土德, 『일본서기』 백치 5년 10월임자조), 토사련부저(土師連富杼, 『일본서기』 지통 4년 10월 을축조), 토사련마수(土師連馬手, 『일본서기』 天武 원년 6월 갑신조 등), 토사련천도(土師連千島, 『일본서기』 천무 원년 7월임인조), 토사련진부(土師連眞敷, 『일본서기』 천무 11년 3월) 등이 있다.
숙녜(宿禰)라는 성을 받은 이후의 인물로는, 토사숙녜마수(土師宿禰馬手, 원래는 토사련마수, 『속일본기』 文武 2년 정월 경진조 등), 토사숙녜생(土師宿禰甥, 『일본서기』 천무 13년1월 계미조 등), 토사숙녜근마려(土師宿禰根麻呂, 『일본서기』 지통 3년 2월 기유조 등), 토사숙녜대마려(土師宿禰大麻呂, 『속일본기』 문무 원년 11월 계묘조 등), 토사숙녜천마려(土師宿禰川麻呂, 『藤原宮跡出土木簡槪報』22), 토사숙녜광정(土師宿禰廣庭, 상동), 토사숙녜풍마려(土師宿禰豐麻呂, 『속일본기』 영귀 원년 정월 계사조 등), 토사숙녜백촌(土師宿禰百村, 『속일본기』 양로 5년 정월 경오조 등), 토사숙녜천촌(土師宿禰千村 『속일본기』 천평 3년 정월 병자조 등), 토사숙녜오백촌(土師宿禰五百村, 『속일본기』천평 7년 4월 무신조 등), 토사숙녜조마려(土師宿禰祖麻呂, 『속일본기』 天平 8년 정월 신축조 등), 토사숙녜어목(土師宿禰御目, 『속일본기』 天平 9년 9월 기해조 등), 토사숙녜광빈(土師宿禰廣濱, 天平 10년 「和泉監正稅帳」, 『대일본고문서』 2-80 등), 토사숙녜비량부(土師宿禰比良夫, 상동 2-82), 토사숙녜좌미마려(土師宿禰佐美麻呂, 天平 10년 「駿河國正稅帳」 2-123), 토사숙녜산마려(土師宿禰山麻呂, 天平 10년 「周防國正稅帳」, 『대일본고문서』2-133), 토사숙녜빈마려(土師宿禰濱麻呂, 天平 10년경 「官人歷名」, 『대일본고문서』 24-84), 토사숙녜마인(土師宿禰馬人, 天平 10년경 「官人歷名」, 『대일본고문서』24-85), 토사숙녜길인(土師宿禰吉人, 天平 10년경 「官人歷名」, 『대일본고문서』 24-86 등), 토사숙녜견양(土師宿禰犬養, 天平 13년 4월 19일 「寫一切經司移」, 『대일본고문서』 7-513 등), 토사숙녜년마려(土師宿禰年麻呂, 天平 17년 10월 20일 「諸陵寮解」, 『대일본고문서』 2-471), 토사숙녜길족(土師宿禰吉足, 天平 17년 10월 21일 「喪儀司解」, 『대일본고문서』 2-475), 토사숙녜우승(土師宿禰牛勝, 『속일본기』 天平 18년 4월 계묘조 등), 토사숙녜도량(土師宿禰道良, 天平 18년 8월 7일 『萬葉集』17-3955), 토사숙녜수통(土師宿禰水通, 『萬葉集』4-557 등), 토사숙녜전차(土師宿禰田次, 天平勝寶 2년 정월 8일 「伹馬國司解」, 『대일본고문서』 3-356 등), 토사숙녜산만리(土師宿禰山萬里, 天平勝寶 2년 3월 3일 「治部省牒」, 『대일본고문서』 3-374 등), 토사숙녜지태류(土師宿禰志太流, 天平勝寶 2년 5월 24일 「造東大寺司移」, 『대일본고문서』3-402 등), 토사숙녜국족(土師宿禰國足, 天平勝寶 2년 8월 28일 「造東大寺司解」, 『대일본고문서』25-133), 토사숙녜도수(土師宿禰稻守, 天平勝寶 3년 5월 21일 「下總國司解」, 『대일본고문서』 3-502), 토사숙녜충마(土師宿禰虫麿, 『東大寺要錄』 供養章3, 天平勝寶 4년 4월 9일조 등), 토사숙녜을만려(土師宿禰乙萬呂, 天平勝寶 5년 2월 26일 「寫書所經疏奉請帳」, 『대일본고문서』 12-388 등), 토사숙녜응감(土師宿禰鷹甘, 天平勝寶 6년 윤10월 「檢米使解」, 『대일본고문서』 4-30), 토사숙녜국승(土師宿禰國勝, 天平勝寶 6년 12월 13일 「圖書寮移」, 『대일본고문서』 4-32), 토사숙녜정수(土師宿禰井守, 天平勝寶 9년 3월 16일 「攝津職解」, 『대일본고문서』4-225), 토사숙녜제승(土師宿禰弟勝, 『속일본기』天平寶字 원년 5월 정묘조 등), 토사숙녜오백국(土師宿禰五百國, 天平寶字 2년 6월 26일 「寫御書所移」, 『대일본고문서』 13-336 등), 토사숙녜제주(土師宿禰弟主, 天平寶字 2년 10월경 「考唱不參歷名」, 『대일본고문서』 4-344 등), 토사숙녜명도(土師宿禰名道, 天平寶字 3년 「造東大寺司上日帳」, 『대일본고문서』 4-398 등), 토사숙녜관성(土師宿禰關成, 『속일본기』 天平寶字 4년 11월 병신조), 토사숙녜도장(土師宿禰道長, 天平寶字 5년 정월 29일 「東大寺三綱牒」, 『대일본고문서』 4-449 등), 토사숙녜문의(土師宿禰文依, 天平寶字 6년 12월 23일 「土師名道經師貢進啓案」, 『대일본고문서』 16-112), 토사숙녜가수(土師宿禰家守, 天平寶字 7년 정월 3일 「造東大寺司告朔解」 5-377 등), 토사숙녜도촌(土師宿禰島村, 『속일본기』 天平寶字 8년 3월 기미조), 토사숙녜준(土師宿禰樽, 『속일본기』天平寶字 8년 10월 경오조), 토사숙녜관(土師宿禰冠, 『속일본기』 天平神護 원년 정월 기해조), 토사숙녜위(土師宿禰位, 『속일본기』 神護景雲 원년 정월 경오조 등), 토사숙녜전사(土師宿禰田使, 『속일본기』 神護景雲 원년 정월 경오조), 토사숙녜진월(土師宿禰眞月, 『속일본기』 神護景雲 2년 10월 을사조), 토사숙녜화마려(土師宿禰和麻呂, 『속일본기』 寶龜 원년 4월 정유조 등), 토사숙녜고인(土師宿禰古人, 『속일본기』 寶龜 10년 정월 갑자조 등), 토사숙녜타취(土師宿禰柂取, 寶龜 3년 5월 20일 「太政官符」), 토사숙녜안인(土師宿禰安人, 『속일본기』 延曆 원년 5월 계묘조 등), 토사숙녜공족(土師宿禰公足, 『속일본기』 延曆 2년 정월 계사조 등), 토사숙녜담해(土師宿禰淡海, 『속일본기』 延曆 4년 8월계해삭조 등), 토사숙녜제주(土師宿禰諸主, 『속일본기』 延曆 4년 8월 계해삭조), 토사숙녜제사(土師宿禰諸士, 『속일본기』 延曆 9년 12월 신유조) 등이 있다.
한편 각 지방에는 토사씨에 예속된 토사부가 존재하였다. 동해도(東海道)에서는 원강국(遠江國) 장전평(長田評) 좌제리(佐除里)의 토사부득말려(土師部得末呂, 『藤原宮木簡釋文』 3), 빈명군(濱名郡) 진축향(津築鄕)의 토사부소진목(土師部小眞木, 天平 12년 11월 「遠江國濱名郡輪租帳」, 『대일본고문서』2-27), 무장국(武蔵國) 풍도군(豐島郡) 백방향(白方鄕)의 토사각마려(土師角麻呂, 『武藏國分寺古瓦塼文字考』119), 토사부승만려(土師部勝萬呂, 『武蔵國分寺古瓦塼文字考』122), 토사부리서(土師部里栖, 『武蔵國分寺古瓦塼文字考』 123), 하총국(下總國) 갈칙군(葛飭郡) 대도향(大島鄕)의 토사부도자매(土師部刀自賣, 養老 5년 「下總國葛飭郡大島鄕戸籍」, 『대일본고문서』 1-251), 창마군(倉麻郡) 의포향(意布鄕)의 토사부여좌매(土師部與佐賣, 養老 5년 「下總國倉麻郡意布鄕戸籍」, 『대일본고문서』1-294), 상륙국(常陸國) 나하군(那賀郡) 황묘향(荒墓鄕)의 토사부리마려(土師部里麻呂, 天平 15년 10월 「調布墨書銘」, 『寧樂遺文』 하-785) 등이 있다.
동산도(東山道)에서는 미농국(美濃國) 미봉간군(味蜂間郡) 춘부리(春部里)의 토사부재(土師部在, 大寶 2년 「御野國味蜂間郡春部里戸籍」, 『대일본고문서』1-11), 토사부소성(土師部小成, 상동), 토사부국(土師部國, 상동), 토사부대도(土師部大島, 상동), 토사부대국(土師部大國, 상동), 토사부림(土師部林, 상동), 토사황저(土師荒猪, 상동 1-17), 토사견마려(土師犬麻呂, 상동), 토사자매(土師姊賣, 상동) 등이 있다. 상야국(上野國) 녹야군(綠野郡)에 토사향(土師鄕), 하야국(下野國) 족리군(足利郡)에 토사향(土師鄕)이 있으므로, 이 두 지역에도 토사부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북륙도(北陸道)에도 약협국(若狹國) 삼방평(三方評) 이리(耳里)의 토사안배(土師安倍, 『藤原宮木簡釋文』2), 원부군(遠敷郡) 목진향(木津鄕) 소해리(少海里)의 토사전(土師電, 神龜 5년 9월 「調鹽付札」, 『平城宮發掘調査出土木簡槪報』 5-3)이 있다.
산음도(山陰道)에는 단파국(丹波國) 천전군(天田郡)과 인번국(因幡國) 팔상군(八上郡)에 토사향(土師鄕)이 있고, 단후국(丹後國) 죽야군(竹野郡) 간인향(間人鄕)의 토사부을산(土師部乙山, 「中男作物海藻貢進物付札」, 『平城宮發掘調査出土木簡槪報』 4-20), 단마국(但馬國) 출석군(出石郡) 혈견향(穴見鄕)의 토사부미파하지(土師部美波賀志, 天平勝寶 2년 정월 8일 「但馬國司解」, 『대일본고문서』 3-355 등), 인번국(因幡國) 익상군(益上郡) 대강리(大江里)의 토사마려(土師麻呂, 天平 연간 「山階寺僧正基童子貢進解」, 『대일본고문서』25-132), 토사수마려(土師首麻呂, 상동 25-132) 등의 이름이 보인다.
출운국(出雲國)은 야견숙녜가 토부를 징발한 곳이므로 토사부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출운군(出雲郡) 출운향(出雲鄕) 이지리(伊知里)의 토사부소룡(土師部小龍, 天平 11년 「出雲國大稅賑給歷名帳』 2-246)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석견국(石見國)에서는 이림군(爾林郡) 도지향(都智鄕)의 토사도족(土師島足, 天平寶字 6년 정월 15일「造東大寺司解案」, 『대일본고문서』 15-257), 토사당마(土師當麻, 상동)가 보인다.
산양도(山陽道)에서는 파마국(播磨國) 인남군(印南郡) 사람으로 추정되는 토사년족(土師年足, 寶龜 11년 「西大寺財流記帳」, 『寧樂遺文』上 414)이 보이고, 비전국(備前國)읍구군(邑久郡)에는 토사향(土師鄕)이 있다. 그 밖에 아파국(阿波國) 명방서군(名方西郡)식토향(埴土鄕)과 축전국(筑前國) 수파군(穗波郡)에 토사향이 보인다.
산성(山城), 대화(大和), 섭진(攝津), 하내(河內), 화천(和泉) 등 기내(畿內)의 토사씨에 대해서는 우경(右京) 신별(神別)(하) 「추소조신(秋篠朝臣)」 조(458), 산성국 신별 「토사숙녜(土師宿禰)」 조(515), 대화국(大和國) 신별 「토사숙녜」 조(551), 섭진국 신별 「토사련(土師連)」 조(606), 화천국 신별 「토사숙녜」 조(723) 및 「토사련」 조(724) 참조.
2. 천수일명(天穗日命)
출운신(出雲臣)과 토사련의 시조로 간주되는 신이다. 『일본서기』 신대(神代) 제6단에서 “다음은 소잔오존(素戔嗚尊)의 차례로 천조대신(天照大神)의 비녀와 머리장식, 팔에 걸친 많은 옥구술을 빌려 천진명 우물에서 헹구어 잘게 씹어 뱉어냈다. 그때 내뱉은 입김의 안개 속에서 생겨난 신을 이름하여 정재오승승속일천인수이존(正哉吾勝勝速日天忍穗耳尊)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천수일명(天穗日命)[이는 출운신(出雲臣)과 토사련(土師連) 등의 조상이다.]이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천수일명(天穗日命)에 대해서는 좌경 신별(중) 「출운숙네(出雲宿禰)」 조(393) 천수일명 참조.
3. 가미건반근명(可美乾飯根命)
『일본서기』 에서는 감비한일협(甘美韓日狹)으로 보인다. 신무(神武) 60년 추7월 병인삭 기유에 군신에게 “무일조명(武日照命; 다케히나테루노미코토)이 하늘에서 가지고 온 신보(神寶)가 출운대신(出雲大神)의 궁에 보관되어 있다. 이것을 보고 싶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시전부조(矢田部造)의 먼 조상 무제우(武諸隅)를 파견하여 바치게 하였다. 이때 출운신의 먼 조상 출운진근(出雲振根; 이즈모노후루네)이 신보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 출운진근이 축자국에 갔으므로 무제우는 만날 수 없었다. 출운진근의 동생 반입근(飯入根; 이히이리네)이 곧 명을 받들어 동생 감미한일협(甘美韓日狹; 우마시카라히사)과 그 아들 노유정(鸕濡渟; 우카즈쿠누)을 보내 신보를 바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관가어전기(菅家御傳記)』 에서는 감미건반근명(甘美乾飯根命)으로 보인다. 대화국 신별의 「토사숙녜(土師宿禰)」 조에서 천수일명의 12세손 가미건반근명, 섭진국 신별의 「하내기촌(河內忌寸)」 조에서 가미건반근명, 우경 신별(하)의 「관원조신(菅原朝臣)」 조에서는 건반근명(乾飯根命)으로 보인다.
4. 광인천황(光仁天皇)
천응(天應) 원년(781)에 관원(菅原)이라는 씨명을 하사한 사실은 『속일본기』 천응 원년 6월 임자조에 “원강개(遠江介) 종5위하 토사숙녜고인(土師宿禰古人), 산위(散位) 외종5위하 토사숙녜도장(土師宿禰道長) 등 15인이 아뢰기를, “토사(土師)의 선조는 천수일명(天穗日命)에서 나왔으며, 그 14세손의 이름은 야견숙녜(野見宿禰)라고 합니다. 옛날에 전향주성궁(纏向珠城宮)에서 천하를 다스리신 수인천황(垂仁天皇)의 시대에는 고풍이 여전히 존재하고, 장례에 절도가 없어서, 흉사가 있을 때마다 대부분 순장[殉埋]을 하였습니다. 때마침 황후가 돌아가셔서, 재궁(梓宮)이 뜰에 있었습니다. 천황이 군신에게 묻기를 ‘후궁의 장례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하니, 군신들이 대답하기를 ‘모두 왜언왕자(倭彦王子)의 고사에 따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신들의 먼 조상인 야견숙녜(野見宿禰)가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순장의 예는 특히 어진 정치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국가를 돕고 사람을 이롭게 하는 방법도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토부(土部) 300여 인을 이끌고, 스스로 흙으로 모든 사물의 모양을 만들어 바쳤습니다. 황제가 보고 매우 기뻐하여, 이로써 사람을 대신하였습니다. 이름하기를 식륜(埴輪)이라 하니, 이른바 입물(立物)이 이것입니다. 이는 곧 옛 천황의 인덕이고 옛날 신하가 남긴 자애입니다. 풍요로움을 후손에게 내리니, 생민이 이로움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선조들이 하신 일을 보니, 길흉이 반반입니다. 돌아가신 날에는 흉사를 관장하고, 제삿날에는 길사를 맡았습니다. 이처럼 받들어 섬기니, 진실로 통상적인 도리에 합치됩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오로지 흉사로 여깁니다. 선조들이 하신 일을 살펴 생각하니, 그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라여 청하건대, 거주지에 따라 토사(土師)를 고쳐서 관원(菅原)이라는 성으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청에 따라 이를 허락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5. 천응원년(天應元年)
천응(天應)은 광인천황(光仁天皇)의 연호이며, 원년은 781년이다. 보귀(寶龜) 12년(781)에 이세신궁(伊勢神宮)에서 아름다운 구름이 나타나자 천응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6. 관원씨(菅原氏)
관원(菅原)이라는 씨명은 대화국(大和國) 첨하군(添下郡) 관원향(菅原鄕)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재의 나량현(奈良縣) 관원정(菅原町) 일대이다. 관원씨(菅原氏)에 대해서는 우경 신별(하) 「관원조신(菅原朝臣)」 조(457) 참조.
7. 대지조신(大枝朝臣)
『속일본기』연력(延曆) 9년(790) 12월 임진삭조에서 환무천황(桓武天皇)이 명하기를, “ 『춘추(春秋)』 의 뜻은 조상은 자손에 의해 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경(禮經)이 보인 가르침은 제왕(帝王)의 변치 않는 법이다. 짐은 천하에 군주로 임한 지 이제 10년이 되었다. 그러나 추존(追尊)의 도는 아직 결여되었다. 이제 이를 생각하니 매우 걱정이 된다. 짐의 외조부 고야조신(高野朝臣)과 외조모 토사숙녜(土師宿禰)에게 아울러 정1위를 추증하고, 토사씨(土師氏)를 고쳐서 대지조신(大枝朝臣)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선조 9족(族)을 제대로 갖추어야 함이 변함없는 법[常典]에 드러나 있고, 가까이에서 먼 곳까지 이르는 뜻이 옛 서적에 있다. 그러므로 관원진중(菅原眞仲)·토사관마려(土師菅麻呂) 등도 같이 대지조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같은 해 12월 신유조에 “이날이 중궁(中宮)의 주기(周忌)에 해당하였다. 대안사(大安寺)에서 설재(設齋)하였다. 신유, 외종5위하 관원숙녜도장(菅原宿禰道長)과 추소숙녜안인(秋篠宿禰安人) 등에게 칙하여 아울러 조신(朝臣)이라는 성을 내렸다. 또 정6위상 토사숙녜제사(土師宿禰諸士) 등에게 대지조신이라는 씨성을 내렸다. 그 토사씨(土師氏)는 모두 4복(腹)이 있는데, 중궁의 어머니 집안은 모수복(毛受腹)이다. 그러므로 모수복에게는 대지조신이라는 성을 내렸다. 그 나머지 3복은 혹은 추소조신(秋篠朝臣)에 따르고, 혹은 관원조신(菅原朝臣)에 따랐다”라고 하였다. 대지조신에 대해서는 우경 신별(하) 「대지조신」 조(45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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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숙녜(土師宿禰; 하지노스쿠네) 자료번호 : ss.k_0002_0010_003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