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사료로 보는 독도

병조에서 삼봉도의 발견 경위를 밝히고 명년에 문무 재능자를 뽑아 보내자고 하다

  • 저필자
    장순순(전북대학교 교수)
  • 날짜
    1476년 10월 27일(음)
  • 출전
사료해설
함경도 영흥(永興) 출신의 김자주(金自周)는 자신이 삼봉도 근처까지 갔다가 입구에 30여명의 조선사람이 흰옷을 입고 서 있는 것을 보았으나 무서워서 섬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진술하였다. 이러한 김자주의 진술을 근거로 병조에서는 이전에 박종원(朴宗元)이 강원도(江原道)에서 배를 출발했다가 바람을 만나 삼봉도를 찾지 못하고 왔지만, 지금 김한경 등이 경성 옹구미에서 배를 출발하여 다시 그 길로 출입(出入)하면서 섬 모양까지 그려 왔으니, 지금 만약 다시 간다면 찾을 수 있다고 보고, 다음 해인, 1477년(성종 8) 4월 날씨가 좋아지면 문무(文武)의 재능을 인물을 선발하여 삼봉도에 다녀오도록 할 것을 청한 내용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정부가 동해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원문
○兵曹啓: “永興人金自周供云: ‘本道觀察使, 以三峯島尋覓事, 遣自周及宋永老與前日往還金興、金漢京、李吾乙亡等十二人, 給麻尙船五隻入送, 去九月十六日於鏡城地瓮仇未發船向島, 同日到宿富寧地靑巖, 十七日到宿會寧地加隣串, 十八日到宿慶源地末應大, 二十五日西距島七八里許, 到泊望見, 則於島北有三石列立, 次小島, 次巖石列立, 次中島, 中島之西又有小島, 皆海水通流。 亦於海島之間, 有如人形別立者三十, 因疑懼不得直到, 畫島形而來。’ 臣等謂往年朴宗元由江原道發船, 遭風不至而還, 今漢京等發船於鏡城瓮仇未, 再由此路出入, 至畫島形而來, 今若更往, 可以尋覓。 請於明年四月風和時, 選有文武才者一人入送。” 從之。
번역문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영흥(永興) 사람 김자주(金自周)의 공초(供招)에 이르기를, ‘본도(本道)의 관찰사(觀察使)가 삼봉도(三峯島)를 찾는 일로써, 김자주와 송영로(宋永老), 그리고 전일(前日)에 갔다 온 김흥(金興)·김한경(金漢京)·이오을망(李吾乙亡) 등 12인에게 마상선(麻尙船) 5척(隻)을 주어 들여보냈는데, 지난 9월 16일에 경성(鏡城) 땅 옹구미(甕仇未)에서 배를 출발하여, 섬으로 향해 같은 날 부령(富寧) 땅 청암(靑巖)에 도착하여 자고, 17일에 회령(會寧) 땅 가린곶이[加隣串]에 도착하여 잤으며, 18일에는 경원(慶源) 땅 말응대(末應大)에 도착하여 잤고, 25일에 섬 서쪽 7, 8리(里) 남짓한 거리에 정박하고 바라보니,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巖石)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복판 섬이고, 복판 섬 서쪽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다 바닷물이 통합니다. 또 바다 섬 사이에는 인형(人形) 같은 것이 별도로 선 것이 30개나 되므로 의심이 나고 두려워서 곧바로 갈 수가 없어 섬 모양을 그려 왔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왕년(往年)에 박종원(朴宗元)이 강원도(江原道)에서 배를 출발했다가 바람을 만나 이르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지금 김한경 등이 경성 옹구미에서 배를 출발하여 다시 그 길로 출입(出入)하면서 섬 모양까지 그려 왔으니, 지금 만약 다시 간다면 찾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청컨대 명년 4월 바람이 온화할 때에 문무(文武)의 재능을 가진 자를 한 사람 선발하여 들여보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병조에서 삼봉도의 발견 경위를 밝히고 명년에 문무 재능자를 뽑아 보내자고 하다 자료번호 : sd.d_0149_0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