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결
5) 소결
이번의 남북 공동 조사는, 비록 시간 상의 제약이 있기는 하였으나, 성벽의 축조 구조와 기법에 관한 보다 자세한 정보를 획득하였다든지, 기존의 발굴 지점을 분명하게 확인하였다든지, 동벽의 경우 원 성벽의 석축 하단부를 분명하게 확인하였다든지, 안학궁 일대의 지질 환경과 토양에 대한 개략적인 지식을 축적하게 되었다든지 하는 점에서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외 안학궁의 현재 보존 상황을 지표 조사의 형식으로나마 확인하였다는 점 또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앞의 기술을 토대로 주요한 사안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는 것으로서 소결을 대신하고자 한다.
먼저 성벽을 포함한 안학궁의 입지에 관한 것인데, 안학궁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대성산 소문봉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 내린 대지성의 완만 잔구(해발 35~40m 선)와 잔구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저지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안학궁 일대는 지체 구조 상 평남저산지와 평양평야가 교차하는 과도 지점에, 지질 구조 상 대성산과 함께 평안계에 속하여 있는데, 이러한 점은 안학궁 일대의 지표 및 개간 등의 이유로 절삭된 성 안 팎의 단층면에서 백악기 이후 석회암이 용식되어 남겨지게 된 붉은 점토(테라로사)가 두텁게 덮혀 있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성벽의 축조는 구간 별로 차이를 보이는데, 기왕에 알려져 있는 것 보다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동문과 서문을 기점으로 하여 그 북쪽의 경우에는 어떤 경우에는 구 지표를 삭토 정지한 후 그 위에 그대로 체성벽을 올리거나 생토면 또는 생토면 약간 아래까지를 판 후 잔돌과 점질토를 다져 성벽 기초부를 마련한 후 체성벽을 올렸고, 동서문지로부터 남벽까지의 북측 중단선은 생토면을 깊이 파 내려간 후 다져 성벽 기초부를 마련하였을 가능성이 높고, 그 이하는 초축 당시 저습지였던 까닭에 대체로 구 지표 위에 상당한 두께로 흙을 다져 기초부를 마련하였다.
성벽 기초 다짐 위에 올린 체성벽의 축조 또한 구간 및 지점에 따라 달랐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러한 점은 남벽 제1단면 조사 지점(남서문 서쪽 29m 처)의 경우 토성 안팎에 3단의 석열이 돌아가 있는 대신 성벽 내부에 높이 2.5m 내외의 성심이 마련되어져 있는 반면, 남벽 제2단면 조사 지점(남벽과 서벽 접합처 동쪽 21.7m 처)의 경우에는 석열이 아닌 석축이(바깥쪽 12단, 안쪽은 5단이나 잔자갈+회색점질토층을 석축 상단부에 협축하여 보강)들여쌓기 방식으로 단단하게 시설되어 있는 반면 성심없이 판축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 단적으로 잘 드러난다.
판축 정도에서도 구간 및 지점 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예를 들어, 남서문을 비롯한 남벽의 대부분 구간의 경우, 비록 보고서 도면 상에 1~3m 내외의 단일 토층으로 표기되어 있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7~10cm 안팎으로 판축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점은 전제헌과의 현장 대담을 통해서 확인되었는데, 대개 점토층과 사질토(또는 마사토)를 교대하며 판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의 경우에는 같은 질의 흙을 40cm 안팎의 두께로 성토에 가깝게 다진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남벽 제2단면 조사 지점의 최하층(주먹돌+적색점토 다짐층)이 그러하다.
다음은 보축 또는 최소 2차 축성한 흔적이다. 어느 성이든 초축 이후 폐기될 때까지 성벽 상태에 따라 수 차례의 수축이 있게 되는데, 기왕의 조사에서는 안학궁 성벽의 수축과 관련하여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예를 들어, 남벽 제2단면 조사 지점의 경우 성벽 안측의 석축이 주먹돌+적색점토 다짐층의 1/3처에 시설되어 있는데다 성벽 안측의 주먹돌+적색점토 다짐층이 토압에 의해 성벽 안측으로 흘러내린 듯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성벽 축조는 일반적이지 않은 것으로, 초축 이후 이 부분의 성벽이 심각하게 훼손 또는 무너지게 되었고 그 후 이 부분을 다시 보축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보축의 흔적은 이번에 시굴 조사한 동벽에서도 확인된다. 이번에 조사한 성벽면의 경우, 시굴 구덩이 남측(확장 시굴 지점)과 북측(1971년 북측 조사 지점)의 성벽면이 석재의 크기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즉, 새로 드러난 초축 당시의 원 성벽면은 성기석으로부터 3단 이상의 경우 길이 0.3~0.6m(성벽면 기준)의 중소형 성돌이 축석되어 있는 반면, 그 옆의 앞으로 상당히 밀려나온 1971년 조사 지점 성벽의 경우에는 성기석으로부터 7~8단까지에 길이 1.2m가량의 대형 성돌이 사용되어져 있어,주 067피트 상에 드러난 초축 성벽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두 지점은 석축부의 축석 상태에서도 차이를 보이는데, 피트 상의 초축 성벽은 견고하게 맞물려 정연하게 바른층 쌓기된 반면, 1971년 조사 성벽은 성돌의 가공이 정연하지 않을 뿐만더러 바른층 쌓기라고 하기에는 각 단의 열이 다소 들쑥날쑥하다. 어쩌면 1971년 조사 당시부터 이 지점의 성벽이 바깥 쪽으로 적지 않게 밀려나와 있었던 것 자체가 수축 정황을 나타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보고자는 확장 시굴 지점의 피트 상에서 드러난 정연한 성벽을 초축 당시 원래의 성벽면으로, 그 옆의 1971년 조사 지점의 성벽을 초축 이후 어느 시기엔가 수축된 성벽으로 보고자 한다.
끝으로 안학궁 성벽을 어떠한 종류의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잠깐 언급하기로 하겠는데, 안학궁 성벽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토성,주 068석성의 요소를 갖춘 토성,주 069석성주 070의 세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이중 다수설은 당연히 토성이다. 아울러 세 견해 가운데 두 번째는 체성 하단부에 석축이 부가되어 있다는 점을, 세 번째는 토축만으로는 고대한 성벽을 쌓기 어렵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고 있다. 물론 후대에 석성 상단의 성돌이 떨어져 나가고 체성 내의 토축부만 남겨지게 됨으로써 석성이 토성으로 오인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석성설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토성이라 할지라도 석열이나 석축이 부가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부여 나성의 경우 토성이지만 일부 구간(동벽)에 석축이 12단 가량 부가되어 있고,주 071익산 오금산성주 072과 공주 공산성주 073또한 토성이지만 5~6단의 석축이 부가되어 있으며, 직산 사산성주 074역시 토성이지만 2~6단의 계단식 석축(석열)이 부가되어 있다. 게다가 1973년 보고서 상의 단면도 등은 석성의 것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측의 고구려 성 연구를 선도하는 연구자가 석성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만큼,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이후 좀 더 면밀하게 연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오강원)
먼저 성벽을 포함한 안학궁의 입지에 관한 것인데, 안학궁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대성산 소문봉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 내린 대지성의 완만 잔구(해발 35~40m 선)와 잔구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저지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안학궁 일대는 지체 구조 상 평남저산지와 평양평야가 교차하는 과도 지점에, 지질 구조 상 대성산과 함께 평안계에 속하여 있는데, 이러한 점은 안학궁 일대의 지표 및 개간 등의 이유로 절삭된 성 안 팎의 단층면에서 백악기 이후 석회암이 용식되어 남겨지게 된 붉은 점토(테라로사)가 두텁게 덮혀 있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성벽의 축조는 구간 별로 차이를 보이는데, 기왕에 알려져 있는 것 보다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동문과 서문을 기점으로 하여 그 북쪽의 경우에는 어떤 경우에는 구 지표를 삭토 정지한 후 그 위에 그대로 체성벽을 올리거나 생토면 또는 생토면 약간 아래까지를 판 후 잔돌과 점질토를 다져 성벽 기초부를 마련한 후 체성벽을 올렸고, 동서문지로부터 남벽까지의 북측 중단선은 생토면을 깊이 파 내려간 후 다져 성벽 기초부를 마련하였을 가능성이 높고, 그 이하는 초축 당시 저습지였던 까닭에 대체로 구 지표 위에 상당한 두께로 흙을 다져 기초부를 마련하였다.
성벽 기초 다짐 위에 올린 체성벽의 축조 또한 구간 및 지점에 따라 달랐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러한 점은 남벽 제1단면 조사 지점(남서문 서쪽 29m 처)의 경우 토성 안팎에 3단의 석열이 돌아가 있는 대신 성벽 내부에 높이 2.5m 내외의 성심이 마련되어져 있는 반면, 남벽 제2단면 조사 지점(남벽과 서벽 접합처 동쪽 21.7m 처)의 경우에는 석열이 아닌 석축이(바깥쪽 12단, 안쪽은 5단이나 잔자갈+회색점질토층을 석축 상단부에 협축하여 보강)들여쌓기 방식으로 단단하게 시설되어 있는 반면 성심없이 판축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 단적으로 잘 드러난다.
판축 정도에서도 구간 및 지점 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예를 들어, 남서문을 비롯한 남벽의 대부분 구간의 경우, 비록 보고서 도면 상에 1~3m 내외의 단일 토층으로 표기되어 있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7~10cm 안팎으로 판축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점은 전제헌과의 현장 대담을 통해서 확인되었는데, 대개 점토층과 사질토(또는 마사토)를 교대하며 판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의 경우에는 같은 질의 흙을 40cm 안팎의 두께로 성토에 가깝게 다진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남벽 제2단면 조사 지점의 최하층(주먹돌+적색점토 다짐층)이 그러하다.
다음은 보축 또는 최소 2차 축성한 흔적이다. 어느 성이든 초축 이후 폐기될 때까지 성벽 상태에 따라 수 차례의 수축이 있게 되는데, 기왕의 조사에서는 안학궁 성벽의 수축과 관련하여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예를 들어, 남벽 제2단면 조사 지점의 경우 성벽 안측의 석축이 주먹돌+적색점토 다짐층의 1/3처에 시설되어 있는데다 성벽 안측의 주먹돌+적색점토 다짐층이 토압에 의해 성벽 안측으로 흘러내린 듯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성벽 축조는 일반적이지 않은 것으로, 초축 이후 이 부분의 성벽이 심각하게 훼손 또는 무너지게 되었고 그 후 이 부분을 다시 보축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보축의 흔적은 이번에 시굴 조사한 동벽에서도 확인된다. 이번에 조사한 성벽면의 경우, 시굴 구덩이 남측(확장 시굴 지점)과 북측(1971년 북측 조사 지점)의 성벽면이 석재의 크기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즉, 새로 드러난 초축 당시의 원 성벽면은 성기석으로부터 3단 이상의 경우 길이 0.3~0.6m(성벽면 기준)의 중소형 성돌이 축석되어 있는 반면, 그 옆의 앞으로 상당히 밀려나온 1971년 조사 지점 성벽의 경우에는 성기석으로부터 7~8단까지에 길이 1.2m가량의 대형 성돌이 사용되어져 있어,주 067피트 상에 드러난 초축 성벽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두 지점은 석축부의 축석 상태에서도 차이를 보이는데, 피트 상의 초축 성벽은 견고하게 맞물려 정연하게 바른층 쌓기된 반면, 1971년 조사 성벽은 성돌의 가공이 정연하지 않을 뿐만더러 바른층 쌓기라고 하기에는 각 단의 열이 다소 들쑥날쑥하다. 어쩌면 1971년 조사 당시부터 이 지점의 성벽이 바깥 쪽으로 적지 않게 밀려나와 있었던 것 자체가 수축 정황을 나타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보고자는 확장 시굴 지점의 피트 상에서 드러난 정연한 성벽을 초축 당시 원래의 성벽면으로, 그 옆의 1971년 조사 지점의 성벽을 초축 이후 어느 시기엔가 수축된 성벽으로 보고자 한다.
끝으로 안학궁 성벽을 어떠한 종류의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잠깐 언급하기로 하겠는데, 안학궁 성벽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토성,주 068석성의 요소를 갖춘 토성,주 069석성주 070의 세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이중 다수설은 당연히 토성이다. 아울러 세 견해 가운데 두 번째는 체성 하단부에 석축이 부가되어 있다는 점을, 세 번째는 토축만으로는 고대한 성벽을 쌓기 어렵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고 있다. 물론 후대에 석성 상단의 성돌이 떨어져 나가고 체성 내의 토축부만 남겨지게 됨으로써 석성이 토성으로 오인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석성설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토성이라 할지라도 석열이나 석축이 부가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부여 나성의 경우 토성이지만 일부 구간(동벽)에 석축이 12단 가량 부가되어 있고,주 071익산 오금산성주 072과 공주 공산성주 073또한 토성이지만 5~6단의 석축이 부가되어 있으며, 직산 사산성주 074역시 토성이지만 2~6단의 계단식 석축(석열)이 부가되어 있다. 게다가 1973년 보고서 상의 단면도 등은 석성의 것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측의 고구려 성 연구를 선도하는 연구자가 석성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만큼,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이후 좀 더 면밀하게 연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오강원)
- 각주 067)
- 각주 068)
- 각주 069)
- 각주 070)
- 각주 071)
- 각주 072)
- 각주 073)
- 각주 0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