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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키노발해성

2. 연구사

크라스키노 성에 대해서는 팔라디 카파로프가 1870년 8월 23일자 제정러시아 지질학협회에 보내는 서한에서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그는 중국 문헌자료들을 참고하였을 때에 “포시에트에는 얀추(얀치헤) 강과 기찐(까진) 강 사이에 옛날 군항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후에 제정러시아 지질학협회의 과제에 따라 러시아의 극동지역을 여행한 팔라디 카파로프는 1871년 4월에 이 성을 답사하고는 이 성을 제염 저장소의 흔적이라고 잘 못 판단하였다(아르히만드리트 팔라디 카파로프. 제정러시아 지질학협회 문서보관소). 다음은 그가 엑스뻬지찌야 만 지역과 얀치헤 군항 지역을 방문하고 남긴 기록이다.
 
4월 6일. 아침 7시에 범선이 포시에트로 가기 위해 닻을 올렸다. ... 왼쪽으로 푸르겔마 섬이 보였고 평평한 해안이 시작되었는데 해안은 멀리 안개 속으로 합쳐졌다. 팔라다 정박지로 들어갈 때에 수슬로브 곶(串)에서 고대 성터의 흔적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이곳 만(灣)들과 해안선들의 윤곽은 구불구불하며 이상하였다. 정박지는 길이 5베르스따주 001
각주 001)
역자 주 - 거리 단위, 1베르스따=500사젠=1.067km. 2013크라스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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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비 100보의 긴 모래 띠에 의해 엑스뻬지찌야 만과 구분되었다. 이 모래톱은 자그마한 노보고로드스까 만으로 진입할 때에 마찬가지로 가파른 추르-하다 암벽들에 의해 마무리된다. 이 암벽들과 나란히 물속에서 다른 암벽들이 솟아 있는데 그 사이로 노보고로드스까 만으로 향하는 2개의 통로가 형성되어 있다. 2개의 통로 중 1개만이 충분히 깊다. 노보고로드스까 만에서 엑스뻬지찌야 만으로 가는 통로는 추르-하다와 곶 사이를 지난다. 자연은 마치 의도한 듯이, 이곳에 만으로 가는 그리고 노보고로드스까 항만으로 가는 통로를 보호하기 위한 전략적인 지점들과 성과 포대(砲臺)용의 준비된 테라스들을 만들고 배치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연해주 책임자의 이전 판단들에서 블라디보스토크가 포시에트 항을 선호하게 한 주요 원인이었다. 둘레로 단 한 척의 나룻배와 범선도 보이지 않았다. 만으로 가는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암벽 중의 하나는 위에서 아래까지 바닷새의 하얀 똥으로 덮여 있었다. 산기슭에도 얕은 여울에도 바닷새의 무리들이 서 있었고, 가끔씩은 바다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마치 동화 속의 무인도로 접근하는 듯하였다. 만으로 들어갈 때에 우리는 마침내 산의 사면에 흩어져 있는 6, 7채의 집을,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2, 3명의 사람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노보고로드스까 전초주둔지였다. 전초주둔지의 입지는 아름다웠고, 편리하였으며, 안락하였다. 그렇지만 주변에는 식물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개울과 강도 단 하나 없었다. 나는 전초주둔지의 전임 책임자 디야첸꼬를 그가 살아 있을 때에 만나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쉬웠다. 디야첸꼬는 이곳에서 많은 세월을 보내었고 이 지역에 대해 완전하게 연구하였다. 그는 M.아무르스끼 백작의 몇 안 되는 생존한 전우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극동지역에서 금광을 찾던 서사시적인 시간들에 대해 상기하기를 좋아하였다. 카프카스에서 상처투성이가 된 전초주둔지의 책임자 근위병은 전초주둔지의 위상을 국경수비대의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 열성적으로 일하였다. 이곳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바닷길로 67마일이다. 우리 지점에서 한국 국경까지는 20베르스따, 제1대대가 위치하고 있는 얀치헤까지는 15베르스따다. 전초주둔지의 책임자와 제1대대의 책임자 사이의 관계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초주둔지에는 한국 당국들(아직은 우연적임) 및 훈춘 ...과의 왕래를 책임진 국경 전권직위가 설정되어 있다. 전권직위 산하에 우리에게로 건너온 한국인들 중 한 명이 서기로 일하는데 그는 중국어 구어 및 문어를 잘 알고 있다(그 언어로 만주인들과 한국인들이 서신을 교환한다). 한국 국경에서 그는 왕의 마구간을 위해 말을 구매하는 하급 관리였다. 우리 쪽에서 몇 번에 걸쳐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그리고 사적인 시도를 통해 한국과 교역관계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두만강주 002
각주 002)
역자 주 - 원본에 ‘투멘 울’로 기록되어 있는데 문맥상 두만강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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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안은 황폐하고 주거에 편리하지 않았다. 두만강 우안은 산악지대로서 한국 마을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군사마을이었다. 상인들이 국경으로 접근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이 조치를 만주와의 관계에서도 적용하였는데 다만 3개 국경 지점에서의 야시장 기간 동안은 예외로 하였다. 한국 정부는 특징적이고 폐쇄적인 의심을 통해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정복 의도를 추정하였고 러시아가 군사원정을 할 때에 이주 한국인들이 길잡이 노릇을 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형식적으로는 우리에게 적대적 감정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정부는 두만강 하구와 가까운 한국 해안에 난파한 상선의 화물을 우리에게 돌려준 적이 있다. 이 나라는 가난하며 교역활동에서 큰 득을 주지 못한다. 한국의 생산품 중에서 중국에서 유명한 것은 다음의 것들이다. 야생 아마로 만든 마포와 목면(후자는 부드러움이 뛰어나다), 매우 질긴 서화용지, 질이 낮은 인삼(왜냐하면 대부분을 인공적으로 재배하기 때문이다), 중국 황제가 제사 때에 사용하는 알이 굵은 쌀, 콩도 있는데 일본 콩과 닮았다. 옛날에 이름을 떨친 한국의 은 광산들은 쇠퇴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유즈노-우쑤리 주에서 70년과 71년의 재난을 통해 한국에서 뿔 달린 동물의 공급은 중요하였을 것이다. 당시 만주 전체와 우리 주에 뿔 달린 동물들에게 재앙적인 전염병이 유행하였다. 두만강 하류 지역에는 지금까지도 한국 장성(長城)의 흔적들이 보인다. 한국 장성은 서기 1032년에 압록강 하구에서 두만강 하구까지 한국의 모든 국경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서쪽에서는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쪽에서는 말갈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전초주둔지와 가까운 산 위에서 4개의 석탄 광산이 발견되었다. 석탄은 두이 석탄과 닮았지만 회색의 유화광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뱃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범선에는 적합하지가 않았다. 산 너머로 노보고로드스까 항만 쪽의 경사면에는 ‘식물원’이 펼쳐져 있는데 이곳은 약간의 가느다란 관목이 자라고 있는 황무지다. 정원사가 이곳에 야생의 과일나무를 심어 과수원을 만들려고 시도한 적이 있지만 바다 안개로 인해 그 모종들이 모두 죽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수이푼 강의 강변에 다시 적용하고 있다. 만의 가파른 해안에 존재하는 진흙과 쇄석 충적층 아래 1사젠주 003
각주 003)
역자 주 - 길이 단위, 1사젠은 약 2.134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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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서 거대한 돌로 된 나무 그루터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표면에 도끼 자국이 있는 듯하였다. 내가 얻은 그루터기주 004
각주 004)
역자 주 - 규화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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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윗부분에서 떨어져나온 나뭇조각은 이미 썩었고 그 표면이 빗물에 씻긴 듯 매끈하였다. 나는 이곳에서 발견된 돌로 변한 나뭇조각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지만, 직접 보지는 못하였다. 전초주둔지는 담수와 땔감을 필요로 하였고, 전초 주둔지 책임자의 집 앞에는 그늘이 많은 정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특별한 정원이 전초주둔지 대원들을 위해 만들어지고 있다. 병사들은 이곳에 밤마다 모여 단순한 민요가 아니라 로맨스 노래를 더 없이 많이 불렀다. 군사 학급에서 교육의 성공이 그와 같았다.
4월 8일. 전초주둔지에서 얀치헤까지는 밟아 다져진 좋은 길이 있다. 그 길은 너비가 150사젠 이하인 좁고 낮은 협곡을 지나며 이 협곡은 엑스뻬지찌야 만을 노보고로드스까 항만과 구분한다. 다음에는 기찐헤 좌안으로 합류하며 이 강을 지나서는 작은 나룻배를 위한 나루터가 있다. 승객들은 얕은 여울을 따라 이동한다. 강의 상류지역에는 한국인들의 큰 마을이 있다. 마지막 구릉지부터 우리는 넓게 산개한 대대의 병영들을 보았다. 병영들은 얀치헤 강안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강의 수원은 가까이에 있는 숲으로 덮인 큰 산맥에 있다. 대대 마을 주변 지역은 개활지이고 대부분 숲이 없다. 소택지 강안을 따라 넓은 범위에 걸쳐 얀치헤 강의 범람 흔적이 보였다. 강안 너머로 기복이 심한 지형이 시작되는데 완전히 황무지이며 만주와의 국경까지 계속된다. 훈춘과 가까운 국경에는 우리의 국경 수비대가 있다. 북서쪽으로는 이곳 강들의 수원이 있는 숲으로 뒤덮인 산맥이 늘어져 있다.
나는 얀치헤에서 수일을 보내었다. 거의 매일 강한 북서풍이 불었다. 그 북서풍을 거슬러서는 병영지의 거리를 따라 단 한 걸음도 내디딜 수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얀치헤 군사마을은 엑스뻬지찌야 만의 강 하구에서 5베르스따 떨어져 있다. 하구에서 오른쪽으로 엑스뻬지찌야 만에서 반(半) 베르스따 거리에 거의 타원 형태를 가진 오래된 성터주 005
각주 005)
역자 주 - 원문은 ‘городок’으로 표기되었는데 직역하면 ‘소도시’이다. 하지만 러시아어에서는 성(城)을 종종 도시(‘город’)로 표기하기도 한다. 때문에 이 글에서의 문맥상 ‘городок’은 성이 분명해 보이며, 바로 크라스키노 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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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다. 그 성터는 주변 지역보다 1사젠이 더 높다. 그 성터 내부에서 거칠게 가공한 돌들과 기와 조각들이 발견된다. 엑스뻬지찌야 만의 해안을 따라서는 작은 언덕들 ― 주거의 잔재들 ― 이 열을 지어 있다. 낮은 해안은 만의 레벨과 거의 접한다. 해안 가까이의 바다는 물이 낮다(우리와 함께 동행한 두 마리의 개가 바닷새들을 쫓으면서 해안에서 반 베르스따 거리까지 물에서 달렸다). 이곳은 소금 생산에 매우 편리한 곳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폐허들은 소금 공장의 잔재들일 것이고, 소도시는 소금을 저장하였던 장소였을 것이다. 현재 이 엑스뻬지찌야 만에서는 소금 생산이 거의 중단되었다. 한 명의 소금 생산자가 남아 있지만 그 사람도 이 직업을 그만두기를 원한다. 범람 시기에는 강안이 얀치헤 강의 높아진 물에 잠긴다. 그때에는 만에서 나룻배를 타고 군사마을까지 바로 갈 수 있다. 마을의 다른 쪽으로는(포시에트로 가는 길을 따라서는) 좁은 협곡에 금(金)을 날라주는 늘리 강이 흐른다. 늘리 강의 우안을 따라서는 깊은 구덩이 모양의 갱도가 많이 있다. 얼마 전의 발굴 흔적들이다. 간혹 진흙으로 보강한 자연석으로 만든 벽들도 보이는데, 그곳에서는 음식을 만들었거나 혹은 모래를 씻어내렸을 것이다. 구덩이들 주변의 공간은 검게 되어 있고 습기가 있었으며, 작은 언덕이 많이 있었다. 이 갱도들은 강을 따라 수 베르스따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 낮은 침수지를 따라 흐르는 강의 하류지역에서 구덩이들의 열이 끝난다. 얀치헤 강에도 금이 포함된 모래가 있다고 추정할 필요가 있다. 군부대의 한 장교는 그 강에서 몇몇 종류의 돌을 모았는데 그 장교의 의견에 따르면, 그 돌들은 얀치헤 강에 금이 있음을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한다. 북서쪽 산맥에서 우리 사냥꾼들이 직선으로 수 베르스따 거리까지 뻗어 있는 토루를 발견하였다. 이것은 유즈노-우쑤리의 산, 주로 산길에서 흔히 발견되는 토루들 중의 하나다. 훈춘은 넓은 면적으로 발전된 마을 그 이상은 아니며, 이곳에서는 훈춘을 그냥 가이(거리, 시장)라고 부른다.
4월 13일. 나는 노보고로드스까 전초주둔지로 돌아오면서 협력을 해야겠다고 자주 생각해온 ‘나호드까’의 거래소 책임자인 푸르겔므 씨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날에 전초주둔지의 책임자, 범선 선장과 나는 나룻배를 타고 한찌라는 곳으로 갔다. 그곳은 엑스뻬지찌야 만의 남쪽 해안에 위치하며 전초주둔지에서 10베르스따 떨어져 있고, 10채의 오두막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곳에 살고 있는 만쯔들은 기업가에게 나룻배를 임차하여 섬들을 돌아다니면서 미역주 006
각주 006)
역자 주 - 원문은 ‘капуста’이다. ‘капуста’는 배추지만, 앞에 ‘바다’가 붙으면 직역하여 바다배추, 즉 미역이 된다. 문맥상 배추가 아니라 미역인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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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따고 해삼을 채취하였다. 이곳에도 중국 쌀과 다른 물품들을 교역하는 스미트 형제들의 거래소가 있다. 우리는 남동풍을 거슬러 매우 힘들게 돌아왔다. 이곳의 한국인들은 얼마 전에 들려온 소문으로 인해 크게 흥분하고 있는데, 4명의 한국 관리가 훈춘에 가서 만주인들에게 훈춘으로 도망간 한국인들을 요구하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도망자들은 한국 관리들에게 넘겨졌고 한국으로 이송되어 처형을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한국 관리들이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노보고로드스까 전초주둔지로도 올 계획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물론 그러한 공포는 다 헛된 것이었다.
4월 15일. 저녁 무렵에 범선 ‘보스또끄’는 닻을 올렸고 고요하고 맑은 날씨의 밤 동안에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항해하였다.”
 
1958년에는 G.I.안드레예프와 J.V.안드레예바가 엑스뻬지찌야 만 부근의 연해주 남부 극동고고학조사단 해안팀의 일원으로 고고학 지표조사를 하면서 이 성을 조사하였다(안드레예프, 안드레예바, 1958). 1960년도와 1963년도에는 E.V.샤브꾸노프가 이 유적을 조사하였다. 그는 성벽에 대한 측량을 하였고, 수집 자료, 특히 기와를 토대로 이 유적을 8~9세기로 편년하였다. E.V.샤브꾸노프는 크라스키노 성이 발해 염주의 중심지였고, 이곳에서 발해와 일본의 기본적인 교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였다(샤브꾸노프, 1966).
크라스키노 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1980년에야 시작되었다. 1980~1981년, 1983년, 1990년, 1994~2007년에는 V.I.볼딘의 지도하에(볼딘 1980, 1981, 1983, 1990, 1994~2007), 2008년부터는 이 보고서의 저자인 E.I.겔만의 지도하에 각각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처음에는 발굴조사가 유적의 북서부분에 집중되었다. 이곳에서는 발해의 사역이 발굴되었고, 금당지, 탑기단, 10기의 기와가마터, 우물, 사역과 성의 다른 부분을 구분하고 있는 석벽의 석축기초, 아래(下) 건축면의 숭배건축물 기초, 그 주변의 석축기단, 다른 건축물 등이 조사되었다(도면 6). 1997~1998년도에는 성의 서쪽 부분에 위치하는 성벽 구조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다. 1998년부터는 동쪽 부분에 대한 조사도 시작되었는데, 동문지와 그 주변의 동벽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계속 조사되고 있다. 대부분의 발굴 유구들은 후기에 속하지만, 근년(2005~2011년도)에는 유적의 이른 시기 건축면들도 조사되었다. 성 내의 문화층의 두께는 곳에 따라 2m 이상이다. 성의 주거구역인 제34구역(2005~2007년도)에서는 구역들 사이로 난 도로 흔적과 5개의 건축면에 속하는 6기의 주거지(1~6호)가 조사되었다. 크라스키노 성에서 주민 거주시기가 7세기 말~8세기 초임을 증명하는 방사성탄소연대들이 확보되었다.
2004년부터는 매년 크라스키노 성에서 지구물리학적 조사도 수행하고 있다. 크라스키노 성 내부와 그 주변에 대해 마이크로 자기 촬영이 이루어졌고, 성의 북동부분에서는 전기측량도 실시되었다. 2008년부터는 모든 발굴구역들에 대해 층위적 지자기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방법론이 개발되었고, 성 내부의 구획과 여러 부분에서 건축물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잠정적 결론들이 내려졌다(베스소노바, 이블리예프, 2007).
2008년도에는 제37구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마무리되었다. 이곳에서는 사역과 관련된 유구가 발견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숭배적 성격의 유구 혹은 사역과 관련이 있는 유구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제37구역 가장자리에서 서로 다른 건축면에 속하는 2기의 주거지가 부분적으로 조사되었다. 두 개의 발굴구역이 더 설정되었는데, 그중의 한 발굴구역인 제41구역은 북쪽 부분이 제37구역과 이어지고 이곳에서는 위(上) 건축면의 7호 주거지에 대한 조사가 계속 이루어졌다. 7호 주거지 아래에서는 파괴된 구들이 있는 8호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다른 발굴 구역인 제40구역은 주거구역에 설정되었고 제34구역과 남쪽이 연결된다. 이곳에서는 위 건축면에서 초석 건물벽의 석축기단과 일부가 제34구역에 포함되는 건물의 초석들, 그리고 폐기물 무지가 노출되었다. 2009년도에는 이 발굴구역에서 다시 네 개의 건축면이 조사되었는데, 이곳에서는 구덩이식의 노지와 지상식의 구들 난방 구조가 있는 7기의 주거지, 여러 가지 용도의 경제구덩이 등이 발견되었다. 2009년도에는 처음으로 성의 남쪽 부분에 대해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여기에서는 흙을 덮은 도로의 흔적이 노출되었다.
2010년도에는 위 건축면의 구조물들 - 사역에 인접한 곳의 구들이 있는 주거지 1기(제45구역), 궁전 유형 유구와 석축기단 건물터(제44구역)가 조사되었고, 그 외에도 성 건축물의 대각선 방향 시스템에 부합하는 석축기단 건물터가 더 조사되었다. 크라스키노 성의 조사자료에 대해 러시아와 외국에서 80편 이상의 논저가 출간되었다. 2010년 9월에는 크라스키노 성 고고학 발굴조사 시작 3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있었다. 이 학술회의에서 크라스키노 성의 조사내용에 대한 기초적 총괄작업이 이루어졌다(『발해: 역사와 고고학』, 2010).
2011년도에는 성터의 북쪽 부분에서 3개 지점이 조사되었다. 그중의 2개 지점은 유적의 북서쪽 부분에 위치한다. 이 2개 지점은 2010년도에 시작된 조사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제45구역의 경계들에서 성터 북쪽 부분 문화층의 형성과 변화가 일률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서쪽 섹터와 동쪽 섹터에서는 층위가 물의 오랜 침수에 대해 증명하는 다양한 광물 구성의 강모래 및 뻘흙의 중첩이 존재함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유적의 이 지점에서는 2010년도에 조사된 위 건축면만이 보존된 것이다. 제45구역의 남쪽 섹터에서는 두께 211~243㎝의 퇴적층들이 조사되었는데 발해 성 주민들의 이 지점의 계속된 사용에 대해 증명하는 것이다. 그 퇴적층들에는 제2~5건축면에 속하는 수 개의 유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파괴된 석축 구조물들, 석탄과 토기가 섞여 있는 폐기물 퇴적들, 노지가 있는 17호 주거지 일부, 완전히 파괴된 주거지의 노지 잔해, 경제 구덩이, 아래 건축면의 주거지 잔해일 가능성이 있는 변형된 구덩이 등이 이에 해당된다.
제47구역은 크라스키노 성터에 대한 지리물리 조사 결과 발견된 지점에 설정되었다. 이곳에서는 위 건축면에 속하는 수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발굴구역에 일부만 노출된 석축기단 건축물, 석축기단 건축물에서 남동쪽으로 15m 거리에서 2줄 고래의 구들이 있는 18호 주거지, 18호 주거지에서 남동쪽으로 2m 거리에서 자갈을 깐도로 유구 등이 각각 조사되었다.
제48구역은 2010년도에 설정한 제44구역의 확장부인데 이곳에서는 제44구역의 남쪽으로 석축기단 건물이 위치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제48구역의 범위 내에서 위 건축면에 속하는 면적이 약 88㎡인 건물터를 노출시켰고, 기단에서 북서쪽으로 기단과 나란히 다양한 크기의 건축용 돌들의 무지를 발견하였다. 돌들 중에는 길이가 1.5m에 달하는 것들도 있는데 아마도 파괴된 건물의 석축 구조물의 잔재들일 것이다. 가장 큰 돌들은 목재 기둥을 받치고 있던 초석이었을 수도 있다.
2011년도에는 크라스키노 성터에서는 처음으로 탐침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전체 발해 유적 조사에서 처음 적용된 것이다. 탐침은 지리물리학적 방법으로 확보된 자료들을 검증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탐침조사는 3개 지역에서 실시되었고, 그중 2개 지역에서 다양한 건축면에 속하는 11기 건물의 석축기단들이 확인되었다. 세 번째 지역에서는 성벽에서 서쪽으로 300m 떨어진 거리에서 석벽이 있는 추정 발해 무덤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지리 물리학적 조사의 결과를 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적 내의 층위양상이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남도 밝히게 되었다. 이는 유적의 다양한 거주 성격과 홍수의 결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또한 2011년도에는 크라스키노 성터 주민들의 경제적 이용 지역에 대한 모든 측면에서의 연구 목적으로 러시아과학원 극동지소 연구소들의 지질학자들 및 지리물리학자들과 공동으로 9~10세기에 성의 주민들이 건축과 일상생활에 사용하였던 석재 자원에 대한 조사도 실시하였다. 석재 자원의 가능한 운송 경로들이 파악되었고, 인접 지역의 경제적 이용 지역의 추정 경계도 표시되었다.
2012년도에는 성의 주거구역에 해당되는 북서쪽 부분(제44구역과 제48구역)과 북쪽 중앙부분(제47구역), 그리고 서문지에서 서쪽으로 300m 거리 지점(제1구역과 제2구역) 등 모두 4개 지점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서문지에서 서쪽으로 300m 거리 지점에서는 발해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제44구역과 제48구역의 경계 부분에서는 2010년도에 노출되었던 기단 건물터(상(上)건축면)와 열주 유형의 기단 건물터가 정리 조사되었고, 일부가 그 경계 안으로 들어가 부분적으로 잔존한 20~22호 주거지의 흔적들 및 보다 작은 10기 이상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제47구역 내에서는 구들이 딸린 19호 주거지가 조사되었는데 이 주거지는 상건축면에 속한다. 크라스키노 성 주변에서는 무덤 2기의 잔재가 조사되었다.

  • 각주 001)
    역자 주 - 거리 단위, 1베르스따=500사젠=1.067km. 2013크라스키노( 바로가기
  • 각주 002)
    역자 주 - 원본에 ‘투멘 울’로 기록되어 있는데 문맥상 두만강이 분명하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역자 주 - 길이 단위, 1사젠은 약 2.134m. 바로가기
  • 각주 004)
    역자 주 - 규화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가기
  • 각주 005)
    역자 주 - 원문은 ‘городок’으로 표기되었는데 직역하면 ‘소도시’이다. 하지만 러시아어에서는 성(城)을 종종 도시(‘город’)로 표기하기도 한다. 때문에 이 글에서의 문맥상 ‘городок’은 성이 분명해 보이며, 바로 크라스키노 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가기
  • 각주 006)
    역자 주 - 원문은 ‘капуста’이다. ‘капуста’는 배추지만, 앞에 ‘바다’가 붙으면 직역하여 바다배추, 즉 미역이 된다. 문맥상 배추가 아니라 미역인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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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구사 자료번호 : kr.d_0011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