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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워싱턴체제와 상대적 안정

2. 워싱턴체제와 상대적 안정

동아시아 지역은 러일전쟁이후 큰 전쟁이 없었고,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무대 또한 아니었기 때문에, 이전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되었다. 국가 간의 전쟁에서 비롯된 민중의 피해는 서구 유럽에서 일어난 대전(大戰)과 비교해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큰 전쟁이 없었다 하더라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진행된 제국주의 국가들 간에 이권 쟁탈은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1918년 10월 독일이 항복하고, 11월 연합국과 휴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 1919년 1월 파리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의 주도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소비에트 정부를 배제한 가운데 독일과 패전국들에게 거대한 보상금을 지불하도록 하고, 그들의 식민지를 승전국이 재분할하여 새로운 국제질서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이를 가리켜 ‘베르사이유 체제’ 라고 부른다.주 815
각주 815)
정상수 (2006), 394~398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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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후 국제무대에서 미국과 일본의 지위가 대폭 상승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경제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 다음의 군사강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일본은 1919년 1월 파리에서 열린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 승전국으로 참여하였다. 독일과 패전국들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도록 하고 그들의 식민지를 승전국이 재분할하여 국제질서를 재편하는 회의 자리에서 일본은 모든 회의에 참여할 국가로 인정을 받았다. 자신의 이권을 획득할 수 있을 정도의 세계 5대국으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중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은 강화회의에 참석할 근거 및 상실당한 권리를 회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중국 베이징 정부의 전권단은 산둥성에 대한 독일 권익의 직접 반환과 중국에 대한 21개조의 조약 폐지, 그리고 각국과의 불평등조약 폐지를 요구하였다. 전권단은 중국의 대독참전으로 독일의 조차권 효력이 상실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국가의 권리 회복을 외치는 국내 여론과 미국 측의 지지를 받으면서 회의에서도 점차 지지기반을 넓혀 갔다.
그러나 일본이 쉽게 물러날 리 없었다. 일본 역시 전권단을 통해 산둥성에 대한 독일권익의 무조건적 양도와 적도 이북 태평양의 독일권익을 양도받기 위해 활동하였다. 이미 일본은 산둥성의 독일권익에 대해 위안스카이정부가 승인한 21개조 요구를 통해 양도받았다고 주장하고, 나아가 영국과 프랑스가 일본의 요구를 강화회의에서 승인한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강조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일본은 산둥성에 대한 요구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국제연맹 규약을 승인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 이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국제연맹을 탄생시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일본에게 한발 물러나 양보하였다. 일본 전권단은 독일로 하여금 산둥성의 산동반도를 중국에 반환케 하고, 일본의 경제적 특권과 거류지 설정권의 유지를 승인하게 만들었다.주 816
각주 816)
우에하라 카즈요시 외 (2006), 108~10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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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1919년 6월 중국은 이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산둥성 문제의 처리를 반대하며 베르사이유 조약의 비준을 거부하였다.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서 중국에 관한 열강들의 타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이 진출하였으나 여전히 서구열강들 간에 치열하게 분할 대립이 전개되던 광대한 지역이었다. 베이징정부의 주도권을 놓고 일본이 지지하는 돤치루이파와 미영이 지원하는 즈리파가 대결했는데, 결국 즈리파가 승리함으로써 일본의 진출도 잠시 보류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개최된 것이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 사이에 미국 워싱턴에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에 대한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일명 ‘워싱턴회의’ 였다. 이 회의 큰 주제는 ‘군비제한’ 문제였다. 이 문제를 토의한 미·영·일·불·이 5개국 회의와 이 5개국에 중국 벨기에 네덜 란드 포르투갈 등이 추기된 9개국 회의가 미국의 주도아래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국과 협의에 따라 조약들이 체결되었다. 해군군비 제한에 관한 5개국 해군군축협정이 성립되었고, 중국에 관한 9개국 조약을 통해 열강들의 이해조정이 이뤄졌으며, 태평양지역에 대한 영토 불가침을 담은 미·영·일·불 4개국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독일의 패배로 유명무실해진 영일동맹은 사실상 파기되었다.주 817
각주 817)
우에하라 카즈요시 외 (2006), 108~10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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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에서 중국에 관해 체결된 9개국 조약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이 동아시아지역에서 획득했던 국제적 지위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미국의 압력아래 미영의 알선이란 조건을 붙여 차지하고 있던 독일의 산둥 권익을 포기하고 1922년 중일 양국 간의 산둥현안에 관한 조약에 의거해 칭도 등에 주둔한 일본군도 철수하여 산둥반도를 중국에 반환하였다. 물론 중국 베이징정부가 주장한 치외법권 철폐와 관세자주권 회복은 실현되지 않았고, 세력범위의 철폐와 조차지 반환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 회의 주된 목적이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 조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워싱턴회의에서 체결된 3개 조약은 상호 관련된 것으로 동아시아와 태평양을 둘러싼 국제질서의 열강들 사이에 일시적 타협과 그 세력관계의 설정을 주 내용으로 하였다. 이를 가리켜 ‘워싱턴체제’ 라고 부른다.주 818
각주 818)
워싱턴체제의 성립과 요인에 대해서는 김민수 (2002), 「워싱턴체제의 성립과정과 요인에 관한 연구」, 고려대 대학원 정치학과 박사학위논문을 참조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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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이유체제와 워싱턴체제를 통해 제국주의 열강들은 1920년대 후반까지 상대적 안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싱턴체제는 중국에서 반제·반군벌 투쟁을 목표로 통일전선의 형태를 띤 국민혁명이 전개됨에 따라 본질적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거듭되는 군벌전쟁 와중에서 쑨원[孫文]은 1917년 성공한 러시아혁명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1919년 5·4운동이후 그해 10월 중화혁명당을 중국 국민당으로 개편하여 민중적 토대를 가진 국민혁명을 지향하였다.주 819
각주 819)
코지마 신지·마루야마 마츠유키 (1998), 97~98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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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제질서에서 배제된 소련은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며 이를 벗어나 고 있었다. 독일과 라팔로 조약(1922), 영국·이탈리아 국교 정상화(1924), 일소조약(1925) 등에 성공한 소련은 중국에 대해 ‘카라한선언’ 과 베이징 정부와의 중소협정을 통해 중국의 주권 및 이권에 손상이 되는 제정러시아와의 조약에 대해 무효를 선언하였다. 이어 1919년 3월 개최된 공산주의 인터네셔널 코민테른에서는 세계 약소민족세력을 지원하고 나섰다.
이에 쑨원은 소련 및 코민테른 지도자들을 만나 중국문제를 논의하였다. 공산당도 공산당원이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한다는 연합전선의 결성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쑨원은 1924년 중국국민당 전국대회를 개최하다. 이 자리에서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성립되었다.주 820
각주 820)
羅弦洙 (1989), 「제1차국공합과 북벌」 『강좌 중국사Ⅶ』, 서울: 지식산업사, 57~67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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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쑨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위기도 있었으나 국공합작을 기반으로 1925년 국민당은 광저우에 ‘국민정부’ 를 수립하였다. 배경에는 활성화된 노동운동도 큰 몫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국에서 후퇴한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침략이 본 격화되었고, 부흥되었던 경제가 다시 불황으로 돌아서며 노동자 삶이 어려워졌다. 이 무렵 각지에서 노동조합이 조직되고 노동자들의 반제의식이 성장하자, 이에 대한 베이징 정부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반제투쟁의 고양과 반제혁명정부인 국민정부의 수립은 워싱턴체제를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국민총사령관이 된 장제스는 1926년 7월 북부의 군벌들을 타도하는 북벌(北伐)을 개시하였고, 민중의 대대적 지지를 받으며 제국주의 국가들의 가장 많은 경제적 이권을 지닌 장강유역에까지 나아갔다. 국민 정부는 광저우에서 우한[武漢]으로 옮기고, 1927년 1월 한코우·주장의 영국 조계를 회수했으며, 3월에는 드디어 상하이와 난징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이 미·영·일·불·이 5개국은 난징사건에 관해 간섭 하고 나섰다. 여기에 제국주의 열강과 상하이 재벌들의 지원을 받던 장제스는 공산당의 정부 전복을 우려한 나머지, 국공합작을 포기하고 난징정부와 합병한 뒤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장쭤린을 계승한 장쉐량[張學良]과 협력하여 1928년 12월 베이징을 장악함으로써 중국 통일을 실현하였다.주 821
각주 821)
조훈(1999), 122~124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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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민중의 반제투쟁이 계속되자 제국주의 열강들의 개입이 시작되었 는데, 일본도 군사력을 앞세워 중국침략을 시도하였다. 일본은 워싱턴체제 아래 이른바 ‘시데하라 협조외교’ 를 펼치고 있었다.주 822
각주 822)
비즐리 (2004), 268~26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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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회의에 외상으로 참여한 시데하라 키쥬로[弊原喜重郞]가 주장했던 것으로, 평화주의, 중국내정 불간섭주의가 중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의 이익이 침해된다고 생각하게 되면 여전히 군사력을 신속하게 동원함으로써 그 한계를 노출 시켰다. 1927년 4월 일본 이익이 침해된다고 판단하자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맞선 군사력을 출병시켰고, 북벌군이 베이징으로 진격해오자 제2차 출병하여 사상자가 수천명에 이르는 5·3사건을 일으켰다. 베이징 정부의 패배가 확실해 지자 일본군에 비협조적인 장쭤린을 열차와 함께 폭살해버리기도 하였다.
워싱턴체제아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상대적 안정은 식민지나 종속지역을 억압하는 동시에 소련을 배제함으로 성립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서 제국주의 지배질서는 워싱턴체제로 재편성 되었으나, 그것은 이전의 체제와는 차이가 났고, 그 한계가 명확하였다. 왜냐하면 분쟁 발생시 상호 협의를 한다든가 각국 노력과 협조에 따라 국제질서를 유지하려는 ‘집단의 협조 체제’ 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 각주 815)
    정상수 (2006), 394~398 쪽. 바로가기
  • 각주 816)
    우에하라 카즈요시 외 (2006), 108~109 쪽. 바로가기
  • 각주 817)
    우에하라 카즈요시 외 (2006), 108~109 쪽. 바로가기
  • 각주 818)
    워싱턴체제의 성립과 요인에 대해서는 김민수 (2002), 「워싱턴체제의 성립과정과 요인에 관한 연구」, 고려대 대학원 정치학과 박사학위논문을 참조할 것 . 바로가기
  • 각주 819)
    코지마 신지·마루야마 마츠유키 (1998), 97~98 쪽. 바로가기
  • 각주 820)
    羅弦洙 (1989), 「제1차국공합과 북벌」 『강좌 중국사Ⅶ』, 서울: 지식산업사, 57~67 쪽. 바로가기
  • 각주 821)
    조훈(1999), 122~124 쪽. 바로가기
  • 각주 822)
    비즐리 (2004), 268~269 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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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체제와 상대적 안정 자료번호 : edeah.d_0005_002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