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가 한열(韓說) 등을 보내 동월과 전투를 벌임
다음 해(원정 6년, 전111) 가을, 여선(餘善)은 누선장군이 [동월을] 치게 해 달라고 청하였으며 한나라 군대가 국경에 주둔하여 앞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을 듣자,주 001마침내 반기를 들고 군사를 징발하여 한나라와 통하는 길을 막아섰다. 장군 추력(騶力) 등을 ‘탄한장군(呑漢將軍)’주 002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백사(白沙)
주 003, 무림(武林)
주 004, 매령(梅嶺)으로 들어가 한의 교위(校尉) 세 명을 죽였다. 이때 한나라에서는 대사농 장성(張成)
주 005과 이전 산주후(山州侯)
치(齒)
주 006를 장수로 삼아 주둔케 하였는데, 이들은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도리어 안전한 곳으로 후퇴하였기에, 모두 적을 겁내는 나약한 죄로 처형되었다. 여선은 ‘무제(武帝)’새를 새겨 자립하여 그 백성을 속이고 망언(妄言)주 007을 일삼았다. 주상은 횡해장군(橫海將軍) 한열(韓說)
주 008
각주 008)
을 보내 구장(句章)
주 009에서 출격하도록 하였는데, 바다에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게 하였다. 누선장군 양복은 무림에서 출격하였고, 중위(中尉)주 010
왕온서(王溫舒)
주 011橫海將軍 韓說 : 顔師古의 해석을 따라 한열이라 하였다(說讀曰悅). 『史記』 「衛將軍驃騎列傳」에 “將軍 韓說은 弓高侯의 庶孫이다. 교위로 대장군을 따라 공을 세워 용액후가 되었다. 주금률에 걸려 봉후를 잃었다. 원정 6년에 대조로 횡해장군이 되어 동월을 쳐 공을 세워 안도후가 되었다. 태초 3년에 유격장군이 되어 오원 밖에 열성에 주둔하였다. 광록훈이 되어 태자궁에서 고를 파내 위태자가 살해하였다(將軍韓說, 弓高侯庶孫也. 以校尉從大將軍有功, 爲龍額侯, 坐酎金失侯. 元鼎六年, 以待詔爲橫海將軍, 擊東越有功, 爲按道侯. 以太初三年爲游擊將軍, 屯於五原外列城. 爲光祿勳, 掘蠱太子宮, 衛太子殺之)”고 전한다.
각주 011)
는 매령에서 출격하였으며,주 012월후(粵侯)는 과선장군과 하뢰장군이 되어 여사(如邪)
주 013와 백사(白沙)
주 014에서 출격하였다. 원봉(元封) 원년 겨울(전110), 모두 동월로 들어갔다. 동월은 평소대로 군대를 일으켜 험한 곳에 의지하여 순북장군(徇北將軍)주 015에게 무림(武林)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누선장군의 몇몇 교위를 괴멸시키고 그 장사(長史)주 016를 죽였다. 누선장군은 전당(錢唐)주 017의 원종고(榬終古)
주 018을 이끌고 순북장군을 베니, [원종고를] 어아후(語兒侯)
주 019에 봉하였다. [누선장군이 거느린 한나라] 군대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의 일이었다.王溫舒 : 漢武帝기 대표적인 酷吏이다. 陽陵(현재의 陝西省 高陵縣) 사람이며 관리가 되어서 治獄으로 廷史가 되었고, 張湯을 섬겨 御史로 승진하였다. 당시 도적을 감독하였는데, 매우 혹독하여 살상이 많았으며 廣平都尉로 승진한 뒤에는 廣平일대가 道不拾遺하여 천자가 이 소식을 듣고 河內太守에 임명하였다. 얼마 안 있어 다시 中尉로 승진을 거듭한다. 東越 원정에서 돌아와 비리가 적발되어 잠깐 좌천되었다가 中尉 소속 병졸을 돌려 通天臺 축성에 이용한 공로로 少府에 임명되고 다시 右內史까지 승진한다. 뒤에 그가 저지른 비리가 적발되어 三族에 처해져 자살하였다(『史記』 「酷吏列傳」).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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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8)
橫海將軍 韓說 : 顔師古의 해석을 따라 한열이라 하였다(說讀曰悅). 『史記』 「衛將軍驃騎列傳」에 “將軍 韓說은 弓高侯의 庶孫이다. 교위로 대장군을 따라 공을 세워 용액후가 되었다. 주금률에 걸려 봉후를 잃었다. 원정 6년에 대조로 횡해장군이 되어 동월을 쳐 공을 세워 안도후가 되었다. 태초 3년에 유격장군이 되어 오원 밖에 열성에 주둔하였다. 광록훈이 되어 태자궁에서 고를 파내 위태자가 살해하였다(將軍韓說, 弓高侯庶孫也. 以校尉從大將軍有功, 爲龍額侯, 坐酎金失侯. 元鼎六年, 以待詔爲橫海將軍, 擊東越有功, 爲按道侯. 以太初三年爲游擊將軍, 屯於五原外列城. 爲光祿勳, 掘蠱太子宮, 衛太子殺之)”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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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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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1)
王溫舒 : 漢武帝기 대표적인 酷吏이다. 陽陵(현재의 陝西省 高陵縣) 사람이며 관리가 되어서 治獄으로 廷史가 되었고, 張湯을 섬겨 御史로 승진하였다. 당시 도적을 감독하였는데, 매우 혹독하여 살상이 많았으며 廣平都尉로 승진한 뒤에는 廣平일대가 道不拾遺하여 천자가 이 소식을 듣고 河內太守에 임명하였다. 얼마 안 있어 다시 中尉로 승진을 거듭한다. 東越 원정에서 돌아와 비리가 적발되어 잠깐 좌천되었다가 中尉 소속 병졸을 돌려 通天臺 축성에 이용한 공로로 少府에 임명되고 다시 右內史까지 승진한다. 뒤에 그가 저지른 비리가 적발되어 三族에 처해져 자살하였다(『史記』 「酷吏列傳」).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 각주 015)
- 각주 016)
- 각주 017)
- 각주 018)
- 각주 019)
색인어
- 이름
- 여선(餘善), 추력(騶力), 장성(張成), 산주후(山州侯), 치(齒), 여선, 한열(韓說), 양복, 왕온서(王溫舒), 원종고(榬終古), 원종고, 어아후(語兒侯)
- 지명
- 한나라, 한나라, 백사(白沙), 무림(武林), 매령(梅嶺), 한, 한나라, 구장(句章), 무림, 매령, 여사(如邪), 백사(白沙), 무림(武林), 한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