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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夫餘)의 문화와 제도

부여주 001
번역주 001)
소흥본·촉각소자본·남감본·급고각본·무영전본 缺, 소희본·백납본 「夫餘傳」. 이하 표제는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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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도군에서 1천 리 떨어져 있다주 002
번역주 002)
〔原註〕 沈欽韓이 말하길, “『一統志』에서 奉天府 開原縣은 扶餘國의 땅이었다.”고 한다. 丁謙이 말하길, “夫餘部의 땅은 지금 古林의 서쪽 지역으로, 長春府 雙城·五常과 賓州의 여러 廳 및 伯都·訥阿·勒楚克 등의 城이 이것(夫餘部의 땅이다)이다.”라고 하였다. 『新唐書』, 「渤海傳」에서는 “扶餘의 옛 땅으로 扶餘府로 삼았다.”고 하였다. 『遼史』에서는 “遼나라 太祖가 渤海를 평정하고 扶餘府에서 묵었는데, 성위에 黃龍이 나타났으므로 黃龍府로 이름을 고쳤다.”고 하였다. 『金史』에서는 “金나라 太祖가 黃龍部를 함락시키고, 濟州 利涉軍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盧弼이 살펴보건대, 『滿洲源流考』에서는 隆州 利涉軍으로 적고 있다. 貞祐(金나라 宣宗 1213~1216) 초에 隆安府라 했는데, 즉 지금의 吉林 農安縣이다. 『遼史』, 「地理志」에서는 通州가 본래 扶餘王城이라 하였으니, 바로 이것이다. 또한 『史記』, 「蒙恬傳」에서는 秦나라가 長城을 쌓아 臨洮에서 시작해 遼東에까지 이르렀다는데, 지금 奉天의 북쪽 경계에 柳條邊이 모두 秦나라 長城의 옛 터이다. 夫餘國은 지금의 吉林 長春府 땅에 있었으니, 바로 옛 長城의 북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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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으로 고구려, 동쪽으로 읍루, 서쪽으로 선비와 접해 있으며주 003
번역주 003)
〔原註〕 丁謙이 말하길, “「[夫餘와] 남쪽으로 접한다는 고구려는 바로 ‘古高句麗’이고, 西漢 말 朝鮮의 북쪽 경계에 새로 세워진 고구려가 아니다. 古高句麗가 곧 玄菟郡의 경내에 있었던 것은 『한서』, 「지리지」와 『水經注』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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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쪽에 약수가 있다주 004
번역주 004)
〔原註〕 沈欽韓이 말하길, 『通典』에서는 “營州 柳城縣 동남쪽에 饒樂水가 있으니, 즉 이것이 弱水이다.”라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길, “弱水는 지금 哈湯이라 칭한다. 동쪽의 삼성(奉天省, 吉林省, 黑龍江省)에 나무가 무성하게 뒤섞인 곳을 ‘烏稽’라 하는데, 烏稽의 땅에는 필히 哈湯이 있다. 무릇 낙엽이 층층이 쌓이고 비가 내려 뒤섞이면 결국 극심한 진흙탕이 된다. 사람이 다니면, 늘 빠지게 되고 그곳에 살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 때문에 弱水라 칭하는 것이고, 따로 어떤 강의 이름이 약수인 것은 아니다. 그중에 저명한 것으로는 紅眼吟湯이 있다.”라고 하였다. 『黑龍江外紀』에 의하면, “齊齊哈爾가 동북쪽 산 중에서 紅眼哈丹에 막혀 사람이 감히 건널 수 없다. 齊齊哈爾가 黑龍江省의 성(城)이 되었는데, 그 동북쪽이 바로 夫餘의 북쪽 경계이다. 「부여전」에 나오는 弱水는 이것을 가리킨다.”라고 하였다. 盧弼이 보건대, “『通典』에서 말한 營州 柳城縣은 지금의 奉天 錦西廳에 있었고, 이는 吳廷燮의 〈東三省沿革表〉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沈欽韓이 말한 弱水가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지리 위치와 맞지 않으니, 丁謙의 설이 옳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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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방 영역이 2천 리이고주 005
번역주 005)
〔原註〕 范曄의 『後漢書』, 「東夷傳」에서는 “그 땅은 사방 2천 리이고, 본래 濊의 땅이다.”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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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수는 8만이다.
그곳의 백성은 한 지역에 붙박이로 사는데, 궁실과 창고 및 뇌옥이 있다. 산과 언덕, 넓은 못이 많고, 동이 지역에서 가장 평탄하고 넓다. 토질은 오곡이 자라기에는 적당하지만, 오과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며, 근엄·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노략질하지 않는다. 나라에 군왕(君王)이 있고, 모두 여섯 가축으로 관직 명칭을 붙인다. 마가·우가·저가·구가주 006
번역주 006)
〔原註〕 范曄의 『後漢書』, 「東夷傳」에서는 ‘猪加’ 두 글자가 없다. 『滿洲源流考』, 「御製夫餘國傳」에서는 “『三國志·魏志』, 「魏志·夫餘傳」에서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명을 정하여 馬加·牛加·豬加·狗加가 있었다. 諸加가 따로 四出道를 주관한다. 적이 있으면 諸加들이 몸소 싸우고 下戶들이 양식을 지고 와서 이들을 마시고 먹였다.”라고 하였다. 그 말대로라면, 이른바 ‘加’라는 것은 무엇으로 뜻을 취했는가? 사서에서 ‘부여는 가축을 잘 길렀다.’고 하니, 필시 목축이 번성하여 각기 관리가 있어 이를 주관하게 했을 것이다. 이는 지금의 몽골과 같은데, 몽골에서는 양을 주관하는 관리를 和尼齊라 하는데, 和尼는 양이다. 말을 주관하는 관리를 摩哩齊라 하고 摩哩는 말이다. 낙타를 주관하는 관리를 特黙齊라 하고 特黙은 낙타다. 이렇게 기르는 가축의 이름을 따서 그 관직 이름을 붙이는 것은 백관 중에서도 특별한 한두 경우이다. 부여에 관해 기록할 때 필시 당시에 부여어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말을 관장하는 자, 소를 관장하는 자를 번역하여 馬家·牛家라 칭하였다가, 마침내 와전되어 馬加·牛加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마치 『周禮』에 羊人·犬人이 있고, 漢나라 때 狗監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필히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명을 정한 것이 모두 폄하의 뜻을 구실삼은 것이라면, 郯子가 少皥氏를 대면하여 새의 이름으로 관명으로 하여 鳥師라 하였으니, 새 이름을 또 어찌 칭했겠는가? 사가들이 이미 ‘家’를 ‘加’로 잘못 적고 나서 또 그에 관한 설명을 구하다 얻지 못하면, 억지로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모두 晉·宋 시기 이래로 사람들은 [부여는] 外域과 같이 거리가 멀고 험하였던 관계로 一切의 音譯(소식·정보)이 평소 통하지 못하였으니, 대충 근거했을 뿐이다. 부회하고 심지어 나쁜 말과 추한 글자를 빌려서 그것을 흉보고 헐뜯는 사사로움을 불합리하게 늘어놓았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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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사·견사자주 007
번역주 007)
〔原註〕 宋本에는 ‘犬’을 모두 ‘大’로 쓰고 있다. 官本에는 아래의 ‘犬’자를 ‘大’로 쓰고 있다. 何焯이 말하길, “‘犬使’ 두 글자는 아마도 衍字로 보인다.”고 하였다. 姚範이 말하길, “‘犬使’는 ‘大使’로 적어야 한다. 뒤에서 ‘麻余을 옹립하니, 牛加 兄의 아들이 大使가 되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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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가 있다. 읍락에 호민이 있고, 하호라고 이름하는 자들은 모두 노복이다주 008
번역주 008)
〔原註〕 宋本, 元本, 馮本, 官本에서는 아래의 ‘民’자를 ‘名’으로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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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는 별도로 사출도를 주관하는데, [세력이] 큰 자는 수천 가(家)를 주관하고, 작은 자는 수백 가를 주관한다주 009
번역주 009)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犬使’ 이하의 몇 마디는 없다. 단지 “그 나라의 읍락은 모두 諸加에 소속되어 관장되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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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을 먹고 마실 때 모두 조두를 사용하고, 회동하여 배작세작(拜爵洗爵)할 때는 예를 갖추어 오르내린다. 은력 정월에 하늘에 제사하여 나라 사람들이 크게 모이는데주 010
번역주 010)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臘月’로 적고 있다. 何焯이 말하길, “殷나라의 正月을 쓰고 의복은 흰색을 숭사하였으니, 箕子가 남긴 가르침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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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영고주 011
번역주 011)
〔原註〕 沈欽韓이 말하였다. “『天中記』와 謝承의 『後漢書』에서 이르에 의하면, ‘東夷와 三韓의 풍속에는 臘日에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서 세간에서 臘鼓가 울면 봄풀이 자라난다.’고 하였고, 『㓝楚歲時記』에 의하면, ‘12월 8일을 臘日’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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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이름한다. 이때 형옥을 단행하고, 죄수를 풀어준다. 나라 안에서는 의복으로 흰 색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주 012
번역주 012)
〔原註〕 官本에서는 ‘袴’를 ‘褲’로 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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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죽신을 신는다. 나라 밖으로 나갈 때는 비단옷 입는 것을 좋아한다주 013
번역주 013)
〔原註〕 宋本에서는 ‘罽’를 ‘ ’로 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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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인(大人)은 여우·살쾡이·원숭이, 흰색과 흑색의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갓옷을 입으며주 014
번역주 014)
〔原註〕 官本에서는 ‘狖’을 ‘狖’로 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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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주 015
번역주 015)
〔原註〕 宋本에서는 ‘冒’를 ‘帽’로 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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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역이 이야기를 전할 때에는 모두 꿇어앉아서 손으로 땅을 짚고 가만가만 이야기한다. 형벌을 적용할 때는 매우 엄해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이고, 그 집안사람을 적몰해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을 하면 12배로 변상케 했다. 남녀 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주 016
번역주 016)
〔原註〕 朱邦衡이 말하길, “‘女’를 ‘子’로 적어야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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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이 투기하면주 017
번역주 017)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이 세 글자가 없다. 宋本에서는 ‘妒’를 ‘妬’로 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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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죽였다. 더욱 투기를 미워해주 018
번역주 018)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尤治惡妒婦’로 기재하였고, 『通志』에서는 ‘尤憎妒婦’로 기재하였다. 즉 ‘妒’ 아래에 ‘婦’자가 있었을 것이다. 元本과 監本에는 ‘憎’을 ‘增’으로 기재하였으나, 이는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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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고 나서 그 시신을 나라의 남산(南山) 위에 두어 썩도록 둔다주 019
번역주 019)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旣殺, 復尸於山上’으로 기재하였다. 沈欽韓이 말하길, “『北史』에서 豆莫婁國이 勿吉의 북쪽 천리 거리에 있는데, 옛 北夫餘이다. 그 풍속이 투기하는 자를 더욱 미워하여, 죽인 뒤에 그 시신을 나라의 남산 위에 내버려두어 썩게 하고, 그 여자의 집에서 소와 말을 바치면 내어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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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 집에서 [그 부인의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바쳐야 준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으니, 흉노와 같은 습속이다. 그 나라 사람은 목축을 잘한다. 명마와 적옥, 담비와 원숭이 가죽 및 아름다운 구슬이 생산되는데주 020
번역주 020)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出名馬赤玉貂豽’로 기록하였다. 章懷太子 李賢이 이를 注하여 ‘豽’은 표범과 닮았고, 앞발이 없으며, 그 음은 ‘奴’와 ‘八’의 반절음이라 하였다. 洪頤煊는 『爾雅』의 「釋獸」편에서 ‘貀’은 앞발이 없다 하였고, 『釋文』에서는 그 글자는 본래 ‘貀’를 적는다고 하였으며, 『字林』에서는 앞발이 없는 짐승으로 호랑이를 닮았으며, 검은 색이라 하였다. 여기서(『後漢書』, 「동이전」) ‘貂豽’을 연달아 칭하여 응당 그 가죽으로 갖옷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니, ‘豽’이라는 짐승은 아니다. 『說文』에서는 ‘狖’는 쥐에 속하는 부류로 도는 것을 잘 하고, [그 글자는] ‘豸’를 따르고, 성모는 ‘穴’이며, 箓文으로는 ‘豽’으로 적는다 한다. [貁이] ‘豽’자와 서로 비슷하므로, [章懷의 注는] 그릇된 注로 잘못 고증한 것이다. 沈家本이 말하길, 『說文』에서는 ‘狖狖’ 두 글이 없고, ‘豸’部에 ‘貁’가 있는데, 쥐에 속하는 부류라 하였다. 段玉栽와 桂馥이 함께 [『說文解字』에 注하여] 이르길, [‘貁’의 성모는] ‘宂散(한산함)’의 ‘宂’자를 따르고, ‘穴’을 따른다고 한 것은 잘못이라 하였다. 『玉篇』에 의하면, ‘狖’은 검은 원숭이라 했으니, ‘狖’는 원숭이에 속하는 부류다. 이 전(『三國志』, 「동이전」)을 찾아보면, ‘狖’와 ‘貂’를 함께 말하였고, 윗글에서는 또한 [부여]의 ‘大人이 여우·살쾡이·狖, 희거나 검은 단비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덧입는다.’고 하였다. 만약 원숭이의 부류인 ‘狖’라면,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든다는 말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다. 『後漢書』, 「班固傳」에 대한 注와 『文選』, 「西都賦」에 대한 注에서 모두 「倉頡」篇을 인용하여 ‘貁’는 살쾡이와 닮았다 했다. 이에 근거해 보면, 즉 ‘貁’는 살쾡이 부류로 ‘猨狖(원숭이)’의 ‘狖’가 아니다. 沈家本의 설명이 매우 상세하나, 글이 번잡해서 싣지는 않는다. 黃山(淸, 『後漢書集解校補』) 章懷는 ‘豽’을 ‘貀’로 보았으나, 실은 [이것은] 잘못된 注라 하였다. 漢律에서 ‘豺(승낭이)와 貀을 잡아오면, 백전으로 구입한다.’고 했다. ‘貀’은 기이한 짐승은 아니며, [夫餘에서 대인들이나 입었듯] 해외에서 귀중하게 간주되었을 리 없다. 洪頤煊은 [‘豽’이 아니라] ‘貁’자가 맞다고 주장하며, 『說文解字』에서 쥐의 부류를 끌어 들여 설명하였다(‘貁’). 담비(貂) 또한 쥐의 부류이니, 그 부류로 취하였다. 『三國志』, 「魏志」에 근거해 보면, 즉 원래 ‘貂貁’로 적었고, 또한 ‘貁’은 희고 검은담비라 하였다. ‘貁’는 원숭이 부류인데, 『楚辭』, 「九歌」에서 ‘원숭이가 구슬피 울고 검은 원숭이가 밤중에 운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것이다. ‘狖’는 ‘蜼’로도 적는데, [蜼자는] 虫을 따르며, 『說文』에서 ‘猿’을 ‘蝯’으로 적은 것과 같다. 그러나 『說文』에는 ‘狖’와 ‘蜼’ 두 글자가 없다. 段玉裁는 [『說文解字』]에서 ‘貁’자를 ‘쥐의 부류로 잘 돈다.’한 것을 응당 ‘원숭이의 부류로서(禺屬), 거꾸로 매달리기를 잘한다(善倒縣).’로 고쳐야 한다고 하였고, ‘蝯’을 본래 원숭이의 부류라 하였다. 또한 그 글자는 응당 ‘冗散’의 ‘冗’을 따라야 하고 ‘穴’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鼠’部에 있는 ‘ ’자가 뒤에 대다수 잘못을 범해 ‘穴’에 따르게 되었고, ‘鼬(족제비)’와 같은 것으로 읽히니, 이 때문에 ‘貁’을 또한 잘못된 글자라 확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모두 그러하지는 않다. 대개 ‘貁’를 쥐의 부류로 새기나, 실제로는 원숭이(禺)의 부류와 같은 것이니, 이는 잘못이다. 잘 돈다는 것(善旋)은 즉 ‘蜼(원숭이)’가 능히 거꾸로 매달릴 수 있다(能倒縣)는 뜻이니, [『說文解字』에] 본래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니다. ‘ ’은 ‘冗’에서 비롯되고, ‘貁’는 ‘穴’에서 비롯되었으니, 모두 꼭 고칠 필요는 없다. [지금 『三國志』, 「魏志」를 보면, ‘貁’는 ‘冗’자를 따르는데, 즉 ‘穴’자이다. 『通志』의 글은 『三國志』, 「魏志」를 근거하여 그 글자가 ‘宂’을 따른다. 대저 전사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 같다.] ‘貁’는 본래 蒼黃色이고, 부여에서 생산되며, 털에 흰 곳이 있고, 갖옷으로 만들 수 있으므로 족히 진귀한 것이다. 그런데 담비(貂)와 함께 말해지니, 쥐의 부류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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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슬의 크기는 대추만 하다주 021
번역주 021)
〔原註〕 沈欽韓이 말하였다. 『東夷考略』에서 “長白山(백두산)이 開原城 동남쪽 4백 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꼭대기에 못이 있어 물이 아래로 흘러 호수를 이루고, 호수 가운데서 東珠가 나오는데, 귀한 것은 千金에 달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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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화살·칼·창으로 병기를 삼는데, 집집마다 스스로 갑옷과 무기를 가졌다. 그 나라의 기로(耆老)는 스스로 옛날의 망명인이라고 말한다주 022
번역주 022)
〔原註〕 劉家立이 말하길, “東明이 槖離國으로부터 달아나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으니, 이 때문에 망명인이라 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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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책은 모두 둥글게 만들었으니주 023
번역주 023)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둥근 柵을 만들어 城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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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뇌옥과 같다. 길에 다닐 때는 밤낮으로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하루 종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전쟁이 있으면 또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소를 잡아서 그 발굽을 보아 길흉을 점친다.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발굽이 붙으면 길하다고 여긴다. 적군의 침입이 있으면 제가가 몸소 전투를 하고, 하호(下戶)는 양식을 짊어다가 그들을 마시고 먹인다. 그 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여름에 모두 얼음을 사용하며, 사람을 죽여서 순장하는데주 024
번역주 024)
〔原註〕 官本에서는 ‘徇’을 ‘殉’으로 기재하였다. 范曄의 『後漢書』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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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을 때는 백 명을 헤아린다. 장사를 후하게 지내는데, 곽은 사용하나 관은 쓰지 않는다주 025
번역주 025)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有椁無棺’으로 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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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략』에 전한다. “그 나라의 습속은 다섯 달 동안 초상을 지내는데, 오래 지낼수록 영화롭게 여긴다. 죽은 이를 제사지낼 때에는 날 것과 익은 것을 함께 쓴다. 상주는 빨리 장사 지내고 싶어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강권하기 때문에 언제나 실랑이를 벌이는 것으로써 예절로 여긴다. 상중에는 남녀 모두 순백색의 옷을 입고, 부인은 베로 만든 면의를 입으며주 026
번역주 026)
〔原註〕 어떤 이가 말하기를, 面衣는 세속에서 白兜(흰 두건)의 부류와 같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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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지나 패물은 벗어두는데주 027
번역주 027)
〔原註〕 『太平御覽』 권780에서는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부인들은 모두 베로 지은 옷을 입고, 반지나 패물을 벗어둔다.”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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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복을 입는 예는] 대체로 중국과 비슷하다주 028
번역주 028)
〔原註〕 宋本·馮本에서는 ‘彷’을 ‘彳+放’으로 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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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는 본래 현도군에 속하였다. 한나라 말년에 공손탁이 해동에서 세력을 떨쳐 외이(外夷)를 위력(威力)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는 소속을 바꾸어 요동군에 복속하였다. 이때에 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해지자, 공손탁은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어 있다고 생각하여 종녀(宗女)를 부여왕에게 시집보냈다주 029
번역주 029)
『三國志』 권2, 「魏書」 2 文帝紀2 延康 元年(220) 三月 己卯. “濊貊·扶餘單于·焉耆·于闐王皆各遣使奉獻”; 『三國志』 권26, 「魏書」 26 滿田牽郭傳26. “忠曰 我遼東在滄海之東 擁兵百萬 又有扶餘·濊貊之用 當今之勢 彊者爲右 曹操獨何得爲是也.”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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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구태가 죽고주 030
번역주 030)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 “建武(後漢 光武帝; 25~55) 중에 동이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와서 예물을 보내었다. [建武 25년(49)에] 부여국이 사자를 보내 예물을 보내오자, 光武帝가 후하게 보답하였다. 이에 사절이 해마다 왕래하였다. 安帝 永初 5년(111)에 이르러 부여왕이 처음으로 보병과 기병 7천~8천 명을 거느리고, 樂浪을 침범하였다가, 뒤에 다시 [漢나라에] 귀부하였다. 永寧 원년(120)에 [부여왕이] 嗣子 尉仇台를 보내 궐에 예물을 보내왔다. 順帝 永和 원년(136)에 그 왕이 京師에 방문하였다. [부여왕이] 桓帝 延熹 4년(161)에 사자로 하여금 예물을 보내왔다. 永康 원년(167)에 부여왕 夫台가 2만여 명을 거느리고 玄菟郡을 침범하니, 玄菟太守 公孫域이 이를 쳐서 격파하였다. 靈帝 熹平 3년(174)에 [부여왕이] 다시 예물을 보내왔다. 부여는 본래 玄菟郡에 속하였는데, 獻帝(189~220) 때에 부여왕이 遼東郡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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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위거가 즉위하였다주 031
번역주 031)
〔原註〕 『太平寰宇記』 卷274에는 “손자 位居가 이어서 왕이 되었다.”로 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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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위거는 적자가 없고, 서자 마여가 있었다. 간위거가 죽자주 032
번역주 032)
〔原註〕 姚範이 말하길, ‘簡位居立位居死’ 이 7자는 아마 衍文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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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가 함께 마여를 옹립하였다. 우가의 형의 아들도 이름이 위거였는데, 대사가 되어서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잘 베풀어주니 국인이 그를 따랐다. 해마다 [위나라] 서울에 사신을 보내어 예물을 보냈다. 정시 연간(240~248)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고자 현도태수 왕기를 부여에 파견하였다. 위거는 견가를 보내어 교외에서 [왕기를] 맞이하게 하고 군량을 제공하였다. [위거의] 계부(季父)인 우가가 딴 마음을 품자, 위거는 계부 부자를 죽이고, 그들의 재물을 적몰하였으며, 관리를 파견하여 장부를 작성하여 관에 보내도록 하였다주 033
번역주 033)
〔原註〕 馮本, 官本은 ‘簿’를 ‘薄’으로 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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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부여의 풍속에 장마와 가뭄처럼 날이 고르지 못하여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항상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마땅히 왕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거나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마여가 죽자, 그의 아들인 의려가 여섯 살 나이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한나라 때에는 부여왕의 장례에 옥갑을 사용했는데, 항상 미리 현도군에 맡겨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가져다 장사 지냈다. 공손연이 주살된 뒤에도 현도군의 창고에는 옥갑 한 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옥벽·규·찬 등 여러 대(代)에 전해오는 물건이 있어서 대대로 보물로 여기는데, 노인들은 “선대[의 왕]께서 하사하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위략』에 전한다. “그 나라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일이 없다.”
그 나라의 인장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란 글귀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예성(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다. 아마도 [이곳은] 본래 예맥의 땅이었는데주 034
번역주 034)
〔原註〕 『晉書』에서는 “부여가 玄菟郡의 북쪽 천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그 왕의 인장 글귀에 ‘穢王之印’이라 칭함이 있었고, 나라 안에도 옛 濊城이 있다.” 하였다. 『魏書』에서는 “豆莫婁國은 勿吉國의 북쪽으로 천 리 되는 곳에 있는데, 洛陽으로부터 6천 리 떨어진 거리에 있으니, 옛 北夫餘이다. 室韋의 동쪽에 있는데, 혹은 원래 濊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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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이 되었으므로,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듯하다주 035
번역주 035)
〔原註〕 何焯은 ‘似’를 ‘以’로 써야 한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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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략』에 전한다. “옛 기록에 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옛날 북방에 고리주 036
번역주 036)
〔原註〕 ‘豪’는 宋本에는 ‘高’로 되어 있고, 元本과 馮本에는 ‘槀’로 되어 있으며,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索’으로 되어 있다. 章懷太子자 注하였는데, ‘索’은 ‘槖’로도 쓰고, 음은 ‘度’과 ‘洛’의 반절이라고 하였다. 『太平御覽』에서는 ‘䯧’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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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나라가 있었다. 그 왕의 시비(侍婢)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비가 말했다. ‘달걀만한 크기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나에게 내려왔으므로 임신을 하였습니다.’ 이후 시비는 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었다. 마구간에 옮겨놓자주 037
번역주 037)
〔原註〕 ‘閑’은 范曄의 『後漢書』에서 ‘蘭’으로 되어 있다. 章懷太子가 ‘蘭’을 곧 ‘欄(우리)’이라고 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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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도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천제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여주 038
번역주 038)
〔原註〕 『太平御覽』에서는 ‘子’를 ‘生’으로 기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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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였다. 동명(東明)이라고 이름하고 항상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동명은 달아나서 남쪽의 시엄수주 039
번역주 039)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南至掩淲水’로 되어 있다. 章懷太子는 이에 대하여 “지금 高麗에 蓋斯水가 있는데, 이 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注하였다. 惠棟(淸)이 말하길, “『北史』에서 ‘掩滯水’로 적고 있다.”고 했다. 沈欽韓이 말하길, “『隋書』, 「百濟傳」에서 ‘掩水’로 기재하였는데, 이는 바로 『한서』, 「地理志」 〈玄菟郡〉조 西蓋馬縣의 ‘馬訾水’로서 지금의 鴨淥江이다.”라고 하였다. 丁謙은 “‘施掩水’는 『後漢書』에서 ‘掩㴲水’로 적었는데, [이는] 글을 새기다 글자가 잘못하여 뒤집힌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 『梁書』에는 ‘掩滯水’로 적고 있는데, [이는] 응당 『水經注』에 기재된 馬訾水일 것이다. 『新唐書』에 의하면, 馬訾水는 靺鞨의 長白山에서 나오고, 색깔이 압록과 같아 鴨淥江이라 불렀다. 夫餘國은 지형이 가장 평평하고 널찍하였으니, 지금의 松花江 근방의 지형과 매우 잘 들어맞는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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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당도하였다.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어주었다. 동명이 [그것을 딛고] 물을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곧이어 흩어져버려 추격하던 군사는 건너지 못하였다. 동명은 이에 부여 땅에 도읍하고 왕이 되었다주 040
번역주 040)
〔原註〕 范曄의 『後漢書』, 「東夷傳」에는 “예전에 北夷 索離國의 왕이 출행하였다가, 그의 시녀가 뒤에 임신하게 되었다. 왕이 돌아와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가 말했다, ‘전에 하늘 위에 氣運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크기가 달걀과 같았으니, [이것이] 제게로 내려와 이로 인해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그녀를 가두니 뒤에 마침내 남자 아이를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두게 했는데,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기자, 말 또한 그처럼 하였다. 왕이 그 아이를 신령스럽게 여기니, 이에 어미에게 거두어 기르는 것을 허락하고 東明이라 이름했다. 東明이 장성하여 활을 잘 쏘니, 왕이 그의 용맹함을 꺼리어 다시 죽이려 했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으로 掩淲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모여 물위로 떠올랐다. 동명이 이를 밟고 강을 건널 수 있었고, 이로써 부여에 도착해 왕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隋書』, 「高麗傳」에서는 “부여왕이 일찍이 河伯의 딸을 얻어 방안에 가두었는데, 햇빛이 따라오며 비추니, 그 빛을 받고 마침내 임신하여 큰 알 하나를 낳았다.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오니, 이름을 朱蒙이라 하였다. 부여의 신하들이 모두 그를 죽이라 청했다. 그의 모친이 朱蒙에게 이를 알려주니, 朱蒙이 동남쪽으로 달아나다, 큰 강을 만났다. 朱蒙이 말했다. ‘나는 河伯의 외손이고, 하늘(日)의 아들이다. 지금 어려움에 처하여 추격병이 곧 이르려 하니, 어찌하면 강을 건널 수 있겠는가.’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떼로 쌓여서 다리를 만들어주어, 朱蒙이 드디어 강을 건넜다. 朱蒙이 나라를 세워 고구려라 이름지었다.”라고 하였다.
[『隋書』, 「百濟傳」에서] 또 이르길, “백제의 선조는 고려로부터 나왔다. 그 나라 왕에게 시녀가 있어 東明을 낳았는데, 그가 장성하자 왕이 그를 꺼려했다. 東明이 이를 두려워하여 달아나 淹水에 이르렀고, 부여 사람들이 함께 그를 받들었다. 東明의 후예 중에 仇台라는 자가 있어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는데, 帶方의 옛 땅에 처음으로 그의 나라를 세웠다. 漢나라때 遼東太守 公孫度이 그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그의 나라는] 점차 창성하여 강국이 되었다. 당초 百家가 바다를 건넜으므로 [나라이름을] 百濟로 불렀다.”고 하였다.
『北史』, 「高句麗傳」에서는 “朱蒙은 [부여] 속언에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부여의 왕이 사냥터에서 사냥할 때, 주몽이 활을 잘 쏜다 하여 [짐승 한 마리를 잡는데] 화살 하나씩을 주었는데, 죽은 짐승이 매우 많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그를 죽이려 꾀하니, 朱蒙은 이에 焉違 등 두 명과 함께 달아났고, 紇升骨城에 이르러 그곳에 거처하며 국호를 고구려라 했다.”고 하였다.
『滿洲源流考』에서는 “고려는 부여에서 나왔고, 부여는 索離에서 나왔다.”고 했다. ‘索’은 ‘槖’처럼 읽히는 까닭에 또 바꾸어 ‘槖’ 으로 적는다. [부여]는 고려와는 실은 별개의 나라이다. 부여는 고려의 북쪽에 있었고, 槖離 또한 부여의 북쪽에 있었으니, 이 때문에 東明이 남쪽으로 달아나 부여에 이르렀고, 朱蒙이 또한 남쪽으로 달아나 고려에 이르렀다. 그 일들이 비슷하며 서로 같으니, 혹 전해오는 이야기 중에 어떤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隋書』에서는 “부여의 왕 尉仇台가 帶方 땅에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고, 그 후에 마침내 백제라 칭했다.”고 하였다. 北魏 때에 백제가 [北魏 조정에] 올린 글에서 “앞서 고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나왔다.”고 했다. 晉나라 이후로 百濟王의 이름 중에 夫餘腆· 夫餘豊·夫餘隆이 있으니, 아마도 직접 夫餘[라는 국명]를 성으로 삼은 듯하다.
丁謙이 “북방에 槀離國이 있었다.”고 말한 것은 실제로는 朝鮮의 고구려가 개국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裵松之가 『魏略』에 전하는 옛 글을 취해 「부여전」 말미에다 잘못 연계한 이래 范蔚宗(范曄)이 급거 『後漢書』, 「부여전」 본문에 수록하였으니, 그릇되고 또한 그릇되었도다. 그러나 이런 오류에 이르게 된 까닭은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고 한 대목의 ‘부여’는 바로 城의 이름이지, 나라의 이름이 아님을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부여에 관해 상고해볼 때, [부여는] 漢나라의 북쪽 경계에 있었고, 弱水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다시 그 나라의 북쪽에 槀離國이 있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槀離는 즉 고구려의 合音인데, 「부여전」 처음 부분에 “남쪽으로 고구려와 접한다.”고 분명히 말해놓고, 어찌 다시 北夷라 일컫는가? 지금 『東國通鑑』을 찾아보니, [朝鮮史·東瀋紀要 및 새로 발견된 好大王碑에 실린 내용도 대략 같다.] “太祖 朱蒙[즉, 「부여전」 중의 東明]이 해를 당할 것을 피해 남쪽으로 가 掩淲水를 건너 卒本夫餘에 이르러, 沸流川 가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했다.”고 한다. 살펴보건대, 沸流는 나라이름인데, 卒本川이 [沸流國의] 경내에 있었으므로 또한 沸流川이라고도 하였다. 卒本夫餘는 卒本川 가의 扶餘城이란 뜻이며, 북쪽의 夫餘國과는 털끝만큼도 상관없다. 이 성(夫餘城)의 옛 터가 즉 지금의 조선 평안도 성천군에 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의 기사는 필히 삭제하고, 뒤의 「고구려전」으로 옮겨 적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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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주 001)
    소흥본·촉각소자본·남감본·급고각본·무영전본 缺, 소희본·백납본 「夫餘傳」. 이하 표제는 생략. 바로가기
  • 번역주 002)
    〔原註〕 沈欽韓이 말하길, “『一統志』에서 奉天府 開原縣은 扶餘國의 땅이었다.”고 한다. 丁謙이 말하길, “夫餘部의 땅은 지금 古林의 서쪽 지역으로, 長春府 雙城·五常과 賓州의 여러 廳 및 伯都·訥阿·勒楚克 등의 城이 이것(夫餘部의 땅이다)이다.”라고 하였다. 『新唐書』, 「渤海傳」에서는 “扶餘의 옛 땅으로 扶餘府로 삼았다.”고 하였다. 『遼史』에서는 “遼나라 太祖가 渤海를 평정하고 扶餘府에서 묵었는데, 성위에 黃龍이 나타났으므로 黃龍府로 이름을 고쳤다.”고 하였다. 『金史』에서는 “金나라 太祖가 黃龍部를 함락시키고, 濟州 利涉軍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盧弼이 살펴보건대, 『滿洲源流考』에서는 隆州 利涉軍으로 적고 있다. 貞祐(金나라 宣宗 1213~1216) 초에 隆安府라 했는데, 즉 지금의 吉林 農安縣이다. 『遼史』, 「地理志」에서는 通州가 본래 扶餘王城이라 하였으니, 바로 이것이다. 또한 『史記』, 「蒙恬傳」에서는 秦나라가 長城을 쌓아 臨洮에서 시작해 遼東에까지 이르렀다는데, 지금 奉天의 북쪽 경계에 柳條邊이 모두 秦나라 長城의 옛 터이다. 夫餘國은 지금의 吉林 長春府 땅에 있었으니, 바로 옛 長城의 북쪽이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原註〕 丁謙이 말하길, “「[夫餘와] 남쪽으로 접한다는 고구려는 바로 ‘古高句麗’이고, 西漢 말 朝鮮의 북쪽 경계에 새로 세워진 고구려가 아니다. 古高句麗가 곧 玄菟郡의 경내에 있었던 것은 『한서』, 「지리지」와 『水經注』에 보인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原註〕 沈欽韓이 말하길, 『通典』에서는 “營州 柳城縣 동남쪽에 饒樂水가 있으니, 즉 이것이 弱水이다.”라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길, “弱水는 지금 哈湯이라 칭한다. 동쪽의 삼성(奉天省, 吉林省, 黑龍江省)에 나무가 무성하게 뒤섞인 곳을 ‘烏稽’라 하는데, 烏稽의 땅에는 필히 哈湯이 있다. 무릇 낙엽이 층층이 쌓이고 비가 내려 뒤섞이면 결국 극심한 진흙탕이 된다. 사람이 다니면, 늘 빠지게 되고 그곳에 살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 때문에 弱水라 칭하는 것이고, 따로 어떤 강의 이름이 약수인 것은 아니다. 그중에 저명한 것으로는 紅眼吟湯이 있다.”라고 하였다. 『黑龍江外紀』에 의하면, “齊齊哈爾가 동북쪽 산 중에서 紅眼哈丹에 막혀 사람이 감히 건널 수 없다. 齊齊哈爾가 黑龍江省의 성(城)이 되었는데, 그 동북쪽이 바로 夫餘의 북쪽 경계이다. 「부여전」에 나오는 弱水는 이것을 가리킨다.”라고 하였다. 盧弼이 보건대, “『通典』에서 말한 營州 柳城縣은 지금의 奉天 錦西廳에 있었고, 이는 吳廷燮의 〈東三省沿革表〉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沈欽韓이 말한 弱水가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지리 위치와 맞지 않으니, 丁謙의 설이 옳은 듯하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原註〕 范曄의 『後漢書』, 「東夷傳」에서는 “그 땅은 사방 2천 리이고, 본래 濊의 땅이다.”라고 기록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原註〕 范曄의 『後漢書』, 「東夷傳」에서는 ‘猪加’ 두 글자가 없다. 『滿洲源流考』, 「御製夫餘國傳」에서는 “『三國志·魏志』, 「魏志·夫餘傳」에서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명을 정하여 馬加·牛加·豬加·狗加가 있었다. 諸加가 따로 四出道를 주관한다. 적이 있으면 諸加들이 몸소 싸우고 下戶들이 양식을 지고 와서 이들을 마시고 먹였다.”라고 하였다. 그 말대로라면, 이른바 ‘加’라는 것은 무엇으로 뜻을 취했는가? 사서에서 ‘부여는 가축을 잘 길렀다.’고 하니, 필시 목축이 번성하여 각기 관리가 있어 이를 주관하게 했을 것이다. 이는 지금의 몽골과 같은데, 몽골에서는 양을 주관하는 관리를 和尼齊라 하는데, 和尼는 양이다. 말을 주관하는 관리를 摩哩齊라 하고 摩哩는 말이다. 낙타를 주관하는 관리를 特黙齊라 하고 特黙은 낙타다. 이렇게 기르는 가축의 이름을 따서 그 관직 이름을 붙이는 것은 백관 중에서도 특별한 한두 경우이다. 부여에 관해 기록할 때 필시 당시에 부여어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말을 관장하는 자, 소를 관장하는 자를 번역하여 馬家·牛家라 칭하였다가, 마침내 와전되어 馬加·牛加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마치 『周禮』에 羊人·犬人이 있고, 漢나라 때 狗監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필히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명을 정한 것이 모두 폄하의 뜻을 구실삼은 것이라면, 郯子가 少皥氏를 대면하여 새의 이름으로 관명으로 하여 鳥師라 하였으니, 새 이름을 또 어찌 칭했겠는가? 사가들이 이미 ‘家’를 ‘加’로 잘못 적고 나서 또 그에 관한 설명을 구하다 얻지 못하면, 억지로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모두 晉·宋 시기 이래로 사람들은 [부여는] 外域과 같이 거리가 멀고 험하였던 관계로 一切의 音譯(소식·정보)이 평소 통하지 못하였으니, 대충 근거했을 뿐이다. 부회하고 심지어 나쁜 말과 추한 글자를 빌려서 그것을 흉보고 헐뜯는 사사로움을 불합리하게 늘어놓았을 뿐이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原註〕 宋本에는 ‘犬’을 모두 ‘大’로 쓰고 있다. 官本에는 아래의 ‘犬’자를 ‘大’로 쓰고 있다. 何焯이 말하길, “‘犬使’ 두 글자는 아마도 衍字로 보인다.”고 하였다. 姚範이 말하길, “‘犬使’는 ‘大使’로 적어야 한다. 뒤에서 ‘麻余을 옹립하니, 牛加 兄의 아들이 大使가 되었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8)
    〔原註〕 宋本, 元本, 馮本, 官本에서는 아래의 ‘民’자를 ‘名’으로 적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9)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犬使’ 이하의 몇 마디는 없다. 단지 “그 나라의 읍락은 모두 諸加에 소속되어 관장되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10)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臘月’로 적고 있다. 何焯이 말하길, “殷나라의 正月을 쓰고 의복은 흰색을 숭사하였으니, 箕子가 남긴 가르침이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1)
    〔原註〕 沈欽韓이 말하였다. “『天中記』와 謝承의 『後漢書』에서 이르에 의하면, ‘東夷와 三韓의 풍속에는 臘日에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서 세간에서 臘鼓가 울면 봄풀이 자라난다.’고 하였고, 『㓝楚歲時記』에 의하면, ‘12월 8일을 臘日’이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2)
    〔原註〕 官本에서는 ‘袴’를 ‘褲’로 기재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3)
    〔原註〕 宋本에서는 ‘罽’를 ‘ ’로 기재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4)
    〔原註〕 官本에서는 ‘狖’을 ‘狖’로 기재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5)
    〔原註〕 宋本에서는 ‘冒’를 ‘帽’로 기재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6)
    〔原註〕 朱邦衡이 말하길, “‘女’를 ‘子’로 적어야 한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7)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이 세 글자가 없다. 宋本에서는 ‘妒’를 ‘妬’로 기재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18)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尤治惡妒婦’로 기재하였고, 『通志』에서는 ‘尤憎妒婦’로 기재하였다. 즉 ‘妒’ 아래에 ‘婦’자가 있었을 것이다. 元本과 監本에는 ‘憎’을 ‘增’으로 기재하였으나, 이는 잘못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19)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旣殺, 復尸於山上’으로 기재하였다. 沈欽韓이 말하길, “『北史』에서 豆莫婁國이 勿吉의 북쪽 천리 거리에 있는데, 옛 北夫餘이다. 그 풍속이 투기하는 자를 더욱 미워하여, 죽인 뒤에 그 시신을 나라의 남산 위에 내버려두어 썩게 하고, 그 여자의 집에서 소와 말을 바치면 내어준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0)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出名馬赤玉貂豽’로 기록하였다. 章懷太子 李賢이 이를 注하여 ‘豽’은 표범과 닮았고, 앞발이 없으며, 그 음은 ‘奴’와 ‘八’의 반절음이라 하였다. 洪頤煊는 『爾雅』의 「釋獸」편에서 ‘貀’은 앞발이 없다 하였고, 『釋文』에서는 그 글자는 본래 ‘貀’를 적는다고 하였으며, 『字林』에서는 앞발이 없는 짐승으로 호랑이를 닮았으며, 검은 색이라 하였다. 여기서(『後漢書』, 「동이전」) ‘貂豽’을 연달아 칭하여 응당 그 가죽으로 갖옷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니, ‘豽’이라는 짐승은 아니다. 『說文』에서는 ‘狖’는 쥐에 속하는 부류로 도는 것을 잘 하고, [그 글자는] ‘豸’를 따르고, 성모는 ‘穴’이며, 箓文으로는 ‘豽’으로 적는다 한다. [貁이] ‘豽’자와 서로 비슷하므로, [章懷의 注는] 그릇된 注로 잘못 고증한 것이다. 沈家本이 말하길, 『說文』에서는 ‘狖狖’ 두 글이 없고, ‘豸’部에 ‘貁’가 있는데, 쥐에 속하는 부류라 하였다. 段玉栽와 桂馥이 함께 [『說文解字』에 注하여] 이르길, [‘貁’의 성모는] ‘宂散(한산함)’의 ‘宂’자를 따르고, ‘穴’을 따른다고 한 것은 잘못이라 하였다. 『玉篇』에 의하면, ‘狖’은 검은 원숭이라 했으니, ‘狖’는 원숭이에 속하는 부류다. 이 전(『三國志』, 「동이전」)을 찾아보면, ‘狖’와 ‘貂’를 함께 말하였고, 윗글에서는 또한 [부여]의 ‘大人이 여우·살쾡이·狖, 희거나 검은 단비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덧입는다.’고 하였다. 만약 원숭이의 부류인 ‘狖’라면,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든다는 말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다. 『後漢書』, 「班固傳」에 대한 注와 『文選』, 「西都賦」에 대한 注에서 모두 「倉頡」篇을 인용하여 ‘貁’는 살쾡이와 닮았다 했다. 이에 근거해 보면, 즉 ‘貁’는 살쾡이 부류로 ‘猨狖(원숭이)’의 ‘狖’가 아니다. 沈家本의 설명이 매우 상세하나, 글이 번잡해서 싣지는 않는다. 黃山(淸, 『後漢書集解校補』) 章懷는 ‘豽’을 ‘貀’로 보았으나, 실은 [이것은] 잘못된 注라 하였다. 漢律에서 ‘豺(승낭이)와 貀을 잡아오면, 백전으로 구입한다.’고 했다. ‘貀’은 기이한 짐승은 아니며, [夫餘에서 대인들이나 입었듯] 해외에서 귀중하게 간주되었을 리 없다. 洪頤煊은 [‘豽’이 아니라] ‘貁’자가 맞다고 주장하며, 『說文解字』에서 쥐의 부류를 끌어 들여 설명하였다(‘貁’). 담비(貂) 또한 쥐의 부류이니, 그 부류로 취하였다. 『三國志』, 「魏志」에 근거해 보면, 즉 원래 ‘貂貁’로 적었고, 또한 ‘貁’은 희고 검은담비라 하였다. ‘貁’는 원숭이 부류인데, 『楚辭』, 「九歌」에서 ‘원숭이가 구슬피 울고 검은 원숭이가 밤중에 운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것이다. ‘狖’는 ‘蜼’로도 적는데, [蜼자는] 虫을 따르며, 『說文』에서 ‘猿’을 ‘蝯’으로 적은 것과 같다. 그러나 『說文』에는 ‘狖’와 ‘蜼’ 두 글자가 없다. 段玉裁는 [『說文解字』]에서 ‘貁’자를 ‘쥐의 부류로 잘 돈다.’한 것을 응당 ‘원숭이의 부류로서(禺屬), 거꾸로 매달리기를 잘한다(善倒縣).’로 고쳐야 한다고 하였고, ‘蝯’을 본래 원숭이의 부류라 하였다. 또한 그 글자는 응당 ‘冗散’의 ‘冗’을 따라야 하고 ‘穴’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鼠’部에 있는 ‘ ’자가 뒤에 대다수 잘못을 범해 ‘穴’에 따르게 되었고, ‘鼬(족제비)’와 같은 것으로 읽히니, 이 때문에 ‘貁’을 또한 잘못된 글자라 확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모두 그러하지는 않다. 대개 ‘貁’를 쥐의 부류로 새기나, 실제로는 원숭이(禺)의 부류와 같은 것이니, 이는 잘못이다. 잘 돈다는 것(善旋)은 즉 ‘蜼(원숭이)’가 능히 거꾸로 매달릴 수 있다(能倒縣)는 뜻이니, [『說文解字』에] 본래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니다. ‘ ’은 ‘冗’에서 비롯되고, ‘貁’는 ‘穴’에서 비롯되었으니, 모두 꼭 고칠 필요는 없다. [지금 『三國志』, 「魏志」를 보면, ‘貁’는 ‘冗’자를 따르는데, 즉 ‘穴’자이다. 『通志』의 글은 『三國志』, 「魏志」를 근거하여 그 글자가 ‘宂’을 따른다. 대저 전사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 같다.] ‘貁’는 본래 蒼黃色이고, 부여에서 생산되며, 털에 흰 곳이 있고, 갖옷으로 만들 수 있으므로 족히 진귀한 것이다. 그런데 담비(貂)와 함께 말해지니, 쥐의 부류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1)
    〔原註〕 沈欽韓이 말하였다. 『東夷考略』에서 “長白山(백두산)이 開原城 동남쪽 4백 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꼭대기에 못이 있어 물이 아래로 흘러 호수를 이루고, 호수 가운데서 東珠가 나오는데, 귀한 것은 千金에 달한다.”고 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2)
    〔原註〕 劉家立이 말하길, “東明이 槖離國으로부터 달아나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으니, 이 때문에 망명인이라 했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3)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둥근 柵을 만들어 城으로 삼았다.”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4)
    〔原註〕 官本에서는 ‘徇’을 ‘殉’으로 기재하였다. 范曄의 『後漢書』에서도 마찬가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5)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有椁無棺’으로 기재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6)
    〔原註〕 어떤 이가 말하기를, 面衣는 세속에서 白兜(흰 두건)의 부류와 같다고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27)
    〔原註〕 『太平御覽』 권780에서는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부인들은 모두 베로 지은 옷을 입고, 반지나 패물을 벗어둔다.”라고 적고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28)
    〔原註〕 宋本·馮本에서는 ‘彷’을 ‘彳+放’으로 기재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29)
    『三國志』 권2, 「魏書」 2 文帝紀2 延康 元年(220) 三月 己卯. “濊貊·扶餘單于·焉耆·于闐王皆各遣使奉獻”; 『三國志』 권26, 「魏書」 26 滿田牽郭傳26. “忠曰 我遼東在滄海之東 擁兵百萬 又有扶餘·濊貊之用 當今之勢 彊者爲右 曹操獨何得爲是也.” 참조.바로가기
  • 번역주 030)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서 “建武(後漢 光武帝; 25~55) 중에 동이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와서 예물을 보내었다. [建武 25년(49)에] 부여국이 사자를 보내 예물을 보내오자, 光武帝가 후하게 보답하였다. 이에 사절이 해마다 왕래하였다. 安帝 永初 5년(111)에 이르러 부여왕이 처음으로 보병과 기병 7천~8천 명을 거느리고, 樂浪을 침범하였다가, 뒤에 다시 [漢나라에] 귀부하였다. 永寧 원년(120)에 [부여왕이] 嗣子 尉仇台를 보내 궐에 예물을 보내왔다. 順帝 永和 원년(136)에 그 왕이 京師에 방문하였다. [부여왕이] 桓帝 延熹 4년(161)에 사자로 하여금 예물을 보내왔다. 永康 원년(167)에 부여왕 夫台가 2만여 명을 거느리고 玄菟郡을 침범하니, 玄菟太守 公孫域이 이를 쳐서 격파하였다. 靈帝 熹平 3년(174)에 [부여왕이] 다시 예물을 보내왔다. 부여는 본래 玄菟郡에 속하였는데, 獻帝(189~220) 때에 부여왕이 遼東郡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한다.바로가기
  • 번역주 031)
    〔原註〕 『太平寰宇記』 卷274에는 “손자 位居가 이어서 왕이 되었다.”로 기재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2)
    〔原註〕 姚範이 말하길, ‘簡位居立位居死’ 이 7자는 아마 衍文일 것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33)
    〔原註〕 馮本, 官本은 ‘簿’를 ‘薄’으로 기재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4)
    〔原註〕 『晉書』에서는 “부여가 玄菟郡의 북쪽 천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그 왕의 인장 글귀에 ‘穢王之印’이라 칭함이 있었고, 나라 안에도 옛 濊城이 있다.” 하였다. 『魏書』에서는 “豆莫婁國은 勿吉國의 북쪽으로 천 리 되는 곳에 있는데, 洛陽으로부터 6천 리 떨어진 거리에 있으니, 옛 北夫餘이다. 室韋의 동쪽에 있는데, 혹은 원래 濊의 땅이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5)
    〔原註〕 何焯은 ‘似’를 ‘以’로 써야 한다고 말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6)
    〔原註〕 ‘豪’는 宋本에는 ‘高’로 되어 있고, 元本과 馮本에는 ‘槀’로 되어 있으며, 范曄의 『後漢書』에서는 ‘索’으로 되어 있다. 章懷太子자 注하였는데, ‘索’은 ‘槖’로도 쓰고, 음은 ‘度’과 ‘洛’의 반절이라고 하였다. 『太平御覽』에서는 ‘䯧’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37)
    〔原註〕 ‘閑’은 范曄의 『後漢書』에서 ‘蘭’으로 되어 있다. 章懷太子가 ‘蘭’을 곧 ‘欄(우리)’이라고 注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8)
    〔原註〕 『太平御覽』에서는 ‘子’를 ‘生’으로 기재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39)
    〔原註〕 范曄의 『後漢書』에는 ‘南至掩淲水’로 되어 있다. 章懷太子는 이에 대하여 “지금 高麗에 蓋斯水가 있는데, 이 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注하였다. 惠棟(淸)이 말하길, “『北史』에서 ‘掩滯水’로 적고 있다.”고 했다. 沈欽韓이 말하길, “『隋書』, 「百濟傳」에서 ‘掩水’로 기재하였는데, 이는 바로 『한서』, 「地理志」 〈玄菟郡〉조 西蓋馬縣의 ‘馬訾水’로서 지금의 鴨淥江이다.”라고 하였다. 丁謙은 “‘施掩水’는 『後漢書』에서 ‘掩㴲水’로 적었는데, [이는] 글을 새기다 글자가 잘못하여 뒤집힌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 『梁書』에는 ‘掩滯水’로 적고 있는데, [이는] 응당 『水經注』에 기재된 馬訾水일 것이다. 『新唐書』에 의하면, 馬訾水는 靺鞨의 長白山에서 나오고, 색깔이 압록과 같아 鴨淥江이라 불렀다. 夫餘國은 지형이 가장 평평하고 널찍하였으니, 지금의 松花江 근방의 지형과 매우 잘 들어맞는다.”라고 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40)
    〔原註〕 范曄의 『後漢書』, 「東夷傳」에는 “예전에 北夷 索離國의 왕이 출행하였다가, 그의 시녀가 뒤에 임신하게 되었다. 왕이 돌아와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가 말했다, ‘전에 하늘 위에 氣運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크기가 달걀과 같았으니, [이것이] 제게로 내려와 이로 인해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그녀를 가두니 뒤에 마침내 남자 아이를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두게 했는데,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기자, 말 또한 그처럼 하였다. 왕이 그 아이를 신령스럽게 여기니, 이에 어미에게 거두어 기르는 것을 허락하고 東明이라 이름했다. 東明이 장성하여 활을 잘 쏘니, 왕이 그의 용맹함을 꺼리어 다시 죽이려 했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으로 掩淲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모여 물위로 떠올랐다. 동명이 이를 밟고 강을 건널 수 있었고, 이로써 부여에 도착해 왕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隋書』, 「高麗傳」에서는 “부여왕이 일찍이 河伯의 딸을 얻어 방안에 가두었는데, 햇빛이 따라오며 비추니, 그 빛을 받고 마침내 임신하여 큰 알 하나를 낳았다.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오니, 이름을 朱蒙이라 하였다. 부여의 신하들이 모두 그를 죽이라 청했다. 그의 모친이 朱蒙에게 이를 알려주니, 朱蒙이 동남쪽으로 달아나다, 큰 강을 만났다. 朱蒙이 말했다. ‘나는 河伯의 외손이고, 하늘(日)의 아들이다. 지금 어려움에 처하여 추격병이 곧 이르려 하니, 어찌하면 강을 건널 수 있겠는가.’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떼로 쌓여서 다리를 만들어주어, 朱蒙이 드디어 강을 건넜다. 朱蒙이 나라를 세워 고구려라 이름지었다.”라고 하였다.
    [『隋書』, 「百濟傳」에서] 또 이르길, “백제의 선조는 고려로부터 나왔다. 그 나라 왕에게 시녀가 있어 東明을 낳았는데, 그가 장성하자 왕이 그를 꺼려했다. 東明이 이를 두려워하여 달아나 淹水에 이르렀고, 부여 사람들이 함께 그를 받들었다. 東明의 후예 중에 仇台라는 자가 있어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는데, 帶方의 옛 땅에 처음으로 그의 나라를 세웠다. 漢나라때 遼東太守 公孫度이 그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그의 나라는] 점차 창성하여 강국이 되었다. 당초 百家가 바다를 건넜으므로 [나라이름을] 百濟로 불렀다.”고 하였다.
    『北史』, 「高句麗傳」에서는 “朱蒙은 [부여] 속언에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부여의 왕이 사냥터에서 사냥할 때, 주몽이 활을 잘 쏜다 하여 [짐승 한 마리를 잡는데] 화살 하나씩을 주었는데, 죽은 짐승이 매우 많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그를 죽이려 꾀하니, 朱蒙은 이에 焉違 등 두 명과 함께 달아났고, 紇升骨城에 이르러 그곳에 거처하며 국호를 고구려라 했다.”고 하였다.
    『滿洲源流考』에서는 “고려는 부여에서 나왔고, 부여는 索離에서 나왔다.”고 했다. ‘索’은 ‘槖’처럼 읽히는 까닭에 또 바꾸어 ‘槖’ 으로 적는다. [부여]는 고려와는 실은 별개의 나라이다. 부여는 고려의 북쪽에 있었고, 槖離 또한 부여의 북쪽에 있었으니, 이 때문에 東明이 남쪽으로 달아나 부여에 이르렀고, 朱蒙이 또한 남쪽으로 달아나 고려에 이르렀다. 그 일들이 비슷하며 서로 같으니, 혹 전해오는 이야기 중에 어떤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隋書』에서는 “부여의 왕 尉仇台가 帶方 땅에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고, 그 후에 마침내 백제라 칭했다.”고 하였다. 北魏 때에 백제가 [北魏 조정에] 올린 글에서 “앞서 고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나왔다.”고 했다. 晉나라 이후로 百濟王의 이름 중에 夫餘腆· 夫餘豊·夫餘隆이 있으니, 아마도 직접 夫餘[라는 국명]를 성으로 삼은 듯하다.
    丁謙이 “북방에 槀離國이 있었다.”고 말한 것은 실제로는 朝鮮의 고구려가 개국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裵松之가 『魏略』에 전하는 옛 글을 취해 「부여전」 말미에다 잘못 연계한 이래 范蔚宗(范曄)이 급거 『後漢書』, 「부여전」 본문에 수록하였으니, 그릇되고 또한 그릇되었도다. 그러나 이런 오류에 이르게 된 까닭은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고 한 대목의 ‘부여’는 바로 城의 이름이지, 나라의 이름이 아님을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부여에 관해 상고해볼 때, [부여는] 漢나라의 북쪽 경계에 있었고, 弱水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다시 그 나라의 북쪽에 槀離國이 있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槀離는 즉 고구려의 合音인데, 「부여전」 처음 부분에 “남쪽으로 고구려와 접한다.”고 분명히 말해놓고, 어찌 다시 北夷라 일컫는가? 지금 『東國通鑑』을 찾아보니, [朝鮮史·東瀋紀要 및 새로 발견된 好大王碑에 실린 내용도 대략 같다.] “太祖 朱蒙[즉, 「부여전」 중의 東明]이 해를 당할 것을 피해 남쪽으로 가 掩淲水를 건너 卒本夫餘에 이르러, 沸流川 가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했다.”고 한다. 살펴보건대, 沸流는 나라이름인데, 卒本川이 [沸流國의] 경내에 있었으므로 또한 沸流川이라고도 하였다. 卒本夫餘는 卒本川 가의 扶餘城이란 뜻이며, 북쪽의 夫餘國과는 털끝만큼도 상관없다. 이 성(夫餘城)의 옛 터가 즉 지금의 조선 평안도 성천군에 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의 기사는 필히 삭제하고, 뒤의 「고구려전」으로 옮겨 적어야 마땅하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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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夫餘)의 문화와 제도 자료번호 : jd.k_0004_003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