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서론
장안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급격히 파괴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군용지와 각종 청사 및 부속건물, 일본인 거주지 등이 조성되면서, 중성벽과 그 일대 유적들은 거의 파괴되었으며, 외성 안의 가로구획과 도로유구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인해 거듭 심한 피해를 입었다. 더욱이 장안성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만수대 일대의 건물지나 외성 안의 도로유구, 그리고 성벽 등에 대한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전면적이고 체계적인 발굴조사는 행해지지 않았다.
남북이 분단된 현실 속에서 북한의 역사 유적을 실제로 답사하여 연구하기란 매우 어렵다. 남북한의 화해 방안의 하나로 개성공단 일대의 문화재 공동조사는 이루어졌으나, 특히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 대해서 공동으로 조사하기는 매우 어렵다. 평양에 대한 연구는 고조선 및 고구려의 장수왕 이후의 수도로써 주목받고 남한 내 연구자에 의해 문헌 위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통일신라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의 평양성에 대해서는 문헌을 바탕으로 연구가 있으나, 그 연구에 의하면 고려시대 서경성은 고고학 발굴조사 없이 문헌 고찰에 의한 한계로 그 현황을 명확히 구분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 평양성의 윤곽은 대체로 고려 말의 것을 이어받았고, 고려말 평양성의 윤곽은 고려 전·중기의 것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의 서경성 축성기사주 001
와 묘청의 난이 끝난 후에도 당시 성곽과 궁궐이 모두 보존되었다는 김부식의 전승보고 내용주 002
을 통해 보면 중첩된 성곽을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묘청의 난 당시 서경성은 김부식이 1135년 2월에 서경이 북으로는 산을 등지고 3면은 물로 막혔으며 성이 높고 또 험하여 졸연히 함락시키기는 어렵기에 지구전을 펼쳐야 한다는 내용주 003
을 통해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사 내용은 조선 초기 평양부 기록과 조선 후기 고지도에서 보이는 현황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 조사를 통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평양성 현황에 대하여 명확히 구분된 바가 극히 드물어 문헌적 고찰의 한계를 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