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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고려조신(高麗朝臣; 고마노아오미)

#고려(高麗)
고려조신(高麗朝臣; 고마노아오미)
 고구려(高句麗) 왕 호태(好台)의 7세손(世孫) 연전왕(延典王)으로부터 나왔다.
 
【주석】
1. 고려조신(高麗朝臣)
고려(高麗)의 씨명은 고려(고구려) 국명에서 유래한다.
 고려조신의 옛 성은 배나공(背奈公)이고 후에 배나왕(背奈王)으로 개성되었다. 배나(背奈)는 『속일본기』 천평(天平) 10년(738) 3월조, 동 11년 7월조에는 초나공복신(肖奈公福信)으로 나오며, 동 양로(養老) 5년(721) 정월조와 동 신귀(神龜) 4년(727) 12월조에는 배나공행문(肖奈公行文)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씨족의 본성은 고구려 5부의 소노부(消奴部)에서 유래하는 ‘초나(肖奈)’이며, 고구려 5부 중 소노부 출신이었다고 생각된다. 『속일본기』 천평 19년(747) 6월조에 배나공복신(背奈公福信) 등이 배나왕의 씨성을 받았고, 동 천평승보(天平勝寶) 2년(750) 정월조에 배나왕복신(背奈王福信) 등이 고려조신으로 개성하였다.
고려조신의 일족으로는 상기의 배나공복신(背奈公福信), 배나공대산(背奈公大山), 배나공광산(背奈公廣山)이 있고, 그 외에 배나공행문(背奈公行文, 『속일본기』 양로 5년 정월 갑술조), 배나공복신의 조상이라고 전하는 배나복덕(背奈福德, 『속일본기』 延曆 8년 10월 을미조)이 있다. 이들이 고려조신의 씨성을 받아 고려조신복신(高麗朝臣福信, 『속일본기』天平勝寶 8년 5월조), 거만조신대산(巨萬朝臣大山, 또는 巨萬高麗朝臣大山, 『속일본기』 天平勝寶 6년 4월 임신조), 고려조신광산(高麗朝臣廣山, 『속일본기』 天平寶字 6년 4월 병인조), 고려조신석마려(高麗朝臣石麻呂, 『속일본기』 寶龜 4년 2월 임신조), 고려조신전계(高麗朝臣殿繼, 『속일본기』 寶龜 8년 5월 계유조) 등으로 나온다.
이 중에서 배나공행문은 『속일본기』 양로(養老) 5년(721) 정월조에 ‘명경 제2박사(明經第二博士)’의 직위에서 국가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백료 중에서 학업이 뛰어나고 사범이 될 만한 사람을 선발하여 포상하고 후생 교육을 목적으로 엘리트 관인들을 선발한 것이다. 『가전(家傳)』(하)에도 숙유(宿儒)라고 하여 명망 있는 학자로 초나행문(肖奈行文)의 이름이 보인다. 『만엽집』(16-3836)에도 ‘박사초나행문대부작(博士消奈行文大夫作)’이라 하여 단가 1수를 남겼으며, 『회풍조』 에도 장옥왕(長屋王) 저택에서 열린 신라사 일행을 맞이하는 연회에서 단가 2수를 남기고 “종5위하 대학조(大學助) 배나왕행문(背奈王行文), 2수[나이 62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조신복신에 대해서는 『속일본기』 연력 8년(789)조에 기록된 그의 훙전(薨傳)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산위 종3위 고창조신복신이 죽었다. 복신은 무장국 고려군 사람이다. 본성은 배나(背奈)이다. 그 조부 복덕은 당나라 장군 이세적이 평양성을 함락했을 때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무장에 살게 되었는데, 복신은 곧 복덕의 손자이다. 어렸을 때 백부 배나행문을 따라 왕경으로 들어왔다. 그때 동년배들과 더불어 저녁 무렵에 석상구(石上衢)에 가서 씨름을 하며 노는데 힘을 교묘하게 써서 능숙하게 상대를 이겼다. 드디어 궁중에서 듣고 내수소(內竪所)에서 시중을 들게 하였다. 이로부터 이름을 떨쳤다. 처음에는 우위사대지에 임명되었다가 점점 승진하여 천평 연간(729~748)에는 외종5위하를 받고 춘궁량(春宮亮)에 임명되었다. 성무황제는 은혜와 총애를 더하여 승보(749~757) 초에는 종4위 자미소필에 이르러 본래 성을 고쳐서 고려조신을 내리고 신부대보로 옮겼다. 신호 원년(765)에 종3위를 주어 조궁경(造宮卿)에 임명하고 겸하여 무장수(武藏守)와 근강수(近江守)를 역임하였다. 보귀(寶龜) 10년(779)에 글을 올려 ‘신은 성화에 귀의하여 일본에 온 지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조신이라는 새로운 성을 받은 영광은 분에 넘치지만, 구 호칭인 고려를 아직 떼지 못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고려를 고창(高倉)으로 고쳐 주십시오.’라고 하니, 조를 내려 허락하였다. 천응(天應) 원년(781)에 탄정이(彈正尹) 겸 무장수(武藏守)로 옮겼다가 연력 4년(785)에 표를 올려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빌자, 산위를 주어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사망 시의 나이가 81세였다.”
이 훙전에는 복신의 본관, 조상의 내력, 씨명의 변화, 관직에 오르는 과정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무장국 고려군 사람으로 본성은 배나(背奈)이고, 조부인 복덕이 당나라 장군 이세적이 평양성을 함락했을 때 일본에 망명하여 무장에 살게 되었다. 고려군의 성립에 대해 『속일본기』 영귀(靈龜) 2년(716) 5월에 준하국(駿河國) 등 7개 지역 고구려인 1,799인을 무장국으로 이주시켜 고려군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복신은 천평승보 8년(756), 보귀(寶龜) 원년(770), 연력(延曆) 2년(783) 등 3번에 걸쳐 무장수를 겸임하였다. 그의 일족인 고려대산(高麗大山)은 천평보자 5년(761)에 무장개(武藏介)에 임명되었고, 고려석마려(高麗石麻呂)도 보귀 9년(778)에 무장개에 보임되었다. 복신은 고구려 멸망 후 30년이 지난 화동(和銅) 2년(708)에 출생하였으며, 연력 8년(789)에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고구려 유민의 3세에 해당된다. 초나씨는 초나공에서 초나왕으로 개성되었고, 천평승보 2년(750)에 초나왕에서 고려조신으로, 보귀 10년(779)에는 다시 고창조신(高倉朝臣)으로 변화의 과정이 있었다.
고창조신으로 개성된 이후의 인물로는 『속일본기』 연력 4년 3월 병오조에 치부소보(治部少輔)가 된 종5위하 고창조신석마려(高倉朝臣石麻呂)가 있다. 그는 동 보귀 4년(773) 2월 갑술조에 고려조신복신의 아들로 나온다. 『속일본기』 천평승보 6년(754) 4월조의 거만조신대산(巨萬朝臣大山)은 견당사 판관으로 파견되었다. 천평보자(天平寶字)6년(762) 4월에는 고려조신광산(高麗朝臣廣山)이 견당부사로 당에 파견되었고, 고려조신전계(高麗朝臣殿繼)도 보귀 8년(777) 5월, 동 9년 9월 2차에 걸쳐 견발해사로 임명되었다. 고려조신씨 중에는 견당사 등 외교 업무에 종사한 사람이 다수 나왔고, 이것은 도래계 씨족으로 선조부터 대대로 대외 사정에 밝다는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2. 고구려왕호태(高句麗王好台)
고구려 왕 호태(好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광개토왕이다. 고구려 제19대 왕으로 391~412년까지 재위하였다. 광개토왕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모두루묘지명에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聖王)’, 호우총 출토의 청동용기의 명문에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우경 제번(하) 「난파련(難波連)」 조(903)에도 호태왕을 시조로 주장하고 있다.
3. 연전왕(延典王)
복부겸문(卜部兼文)의 『천수국만다라수장연기감점문(天壽國慢茶羅繡帳緣起勘点文)」 에 인용된 『신찬성씨록』 「고려조신」 조에 “고구려 호태왕(好台王)의 7세손 연흥왕(延興王)으로부터 나왔다”라고 하였다. 연흥왕(延興王)에 대해서는 기타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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