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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목진기촌(木津忌寸; 기츠노이미키)

목진기촌(木津忌寸; 기츠노이미키)
 후한(後漢) 영제(靈帝)의 3세손인 아지사주(阿智使主; 아치노오미)의 후손이다.
 
【주석】
1. 목진기촌(木津忌寸)
목진(木津)의 씨명은 근강국(近江國) 고도군(高島郡) 목진향(木津鄕)의 지명에 유래한다. 현재의 자하현(滋賀縣) 고도군(高島郡) 신욱정(新旭町) 목진(木津) 일대이다.
목진기촌(木津忌寸)의 옛 씨성은 왜한기촌목진(倭漢忌寸木津)이다. 『속일본기』 연력(延曆) 원년(782) 11월조에 왜한기촌목진길인(倭漢忌寸木津吉人) 등 8인이 자신들이 아지사주(阿智使主)의 후손이라며 성(姓)의 글자가 번잡하고 많아 목진기촌으로 해 주기를 청원하자 하락하였다고 한다. 성의 글자 수가 번다하다는 이유로 ‘왜한(倭漢)’이라는 특정 글자를 빼달라고 하거나 또 글자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는 이유로 개성을 청원한 사례는 매우 이례적이다. 아지사주(阿智使主)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왜한’이라는 씨명을 빼 달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왜한씨는 동한씨(東漢氏)라고도 하며 도래씨족 중에서도 웅족(雄族)으로 번영한 씨족명으로서 8세기 대에도 그의 후손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목진(木津)이라는 지명에 기촌(忌寸) 성만 기입하고자 한 것은 본류계에서 지족화, 토착화되어 독립적인 씨족이 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2. 후한영제(後漢靈帝)
중국 후한의 제12대 황제로, 재위 기간은 168~189년까지이다. 영제 시대는 환관을 중용하고 과중한 부역으로 민심이 이반되었다. 황건적의 난으로 황제권이 쇠퇴해지고, 지방 호족 세력의 대두로 삼국 시대의 전 단계가 만들어졌다. 황건적 토벌의 후유증, 권력 암투와 중병으로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아지사주(阿智使主)
『고사기』 응신천황단에 “이 천황의 치세에 …한직(漢直)의 조(祖)가 도래하였다”라고 하고, 동 이중천황단(履中天皇段)에는 “왜한직(倭漢直)의 조(祖) 아지직(阿知直)”이라고 하여 아지직이라는 선조명이 보인다. 『일본서기』 응신기 20년 추9월조에는 이보다 자세하게 “왜한직의 선조 아지사주(阿知使主)와 그의 아들 도가사주(都加使主)가 당류(黨類)17현을 이끌고 내귀하였다”라고 하여 아지사주와 함께 그의 아들 도가사주의 인명이 나온다. 또 『고사기』 응신천황단에 “백제국주 조고왕(照古王)이 모마(牡馬)·빈마(牝馬) 각 1마리를 아지길사(阿知吉師)에게 딸려 공상하였다.[아지길사라는 자는 아직사(阿直史) 등의 조(祖)이다.]”라고 하여 아지길사(阿知吉師, 阿直岐)라는 인명이 보인다. 아지길사(阿知吉師)와 아지사주(阿智使主)를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고사기』 에는 아지사주가 아직사(阿直史)의 조상이고 아지직(阿知直, 阿知使主)이 왜한직(倭漢直)의 조상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서기』 와 같이 양자를 별인으로 볼 가능성도 있다. 『속일본기』 보귀(寶龜) 3년(772) 4월조에는 “선조 아지사주가 경도풍명궁어천황(輕島豐明宮馭天皇, 應神天皇)의 시대에 17현의 인부를 이끌고 귀화하였다. 조를 내려 고시군(高市郡) 회전촌(檜前村)을 하사하여 살게 하였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고어습유(古語拾遺)』 에도 “한직(漢直)의 조상인 아지사주가 17현의 민을 이끌고 내조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속일본기』 연력(延曆) 4년(785) 6월조에는 아지사주의 이주 전승에 대해 자세히 실려 있다. 아지사주의 후손인 판상대기촌예전마려(坂上大忌寸苅田麻呂) 등이 상표하여 “신(臣)들은 본래 후한(後漢) 영제(靈帝)의 증손인 아지왕(阿智王)의 후예이다. 후한 천자의 위가 위(魏)로 넘어갈 때 아지왕(阿智王)은 신의(神意)를 받은 우(牛)의 가르침에 따라 대방으로 갔던 바, 홀연히 보대(寶帶)의 상서를 얻었다. 그 모습이 궁성과 비슷했기 때문에 그곳에 나라를 세워 인민을 살게 하였다. 그 후 아지왕은 부형에게 ‘내가 동국에 성주(聖主)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찌 귀종하지 않을 것인가. 만약 이곳에 오래 있으면 아마도 멸망해 버릴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동모제(同母弟) 우흥덕(迂興德) 및 7성의 민을 동반하여 귀화, 내조하였다. 이것이 예전천황(譽田天皇)이 천하를 통치하던 시대이다. 이에 아지왕이 주청하여 말하기를 ‘신은 대방에 거주했고 그 인민은 남녀 모두 재예(才藝)를 갖고 있다. 근자에 백제와 고구려에 눌러살게 되어 거취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천은을 내려 사자를 보내 불러 주시기를 원한다. 이에 (천황은) 칙을 내려 (아지왕의) 8가에 사신을 나눠 보냈다. 그리하여 인민, 남녀는 촌락을 들어 사신을 따라와 영원히 공민이 되었다. 그로부터 여러 대가 지나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 제국에 있는 한인(漢人)들은 그 후예이다. 신(臣) 예전마려(苅田麻呂) 등은 선조의 왕족 성을 잃어버려 하급 사람의 비성(卑姓)을 받았다. 청컨대 기촌(忌寸)을 고쳐 숙녜(宿禰)성을 받고 싶다….’라고 하였다. (천황은) 조칙을 내려 이를 허락하였다. 판상(坂上), 내장(內藏), 평전(平田), 대장(大藏), 문(文), 조(調), 문부(文部), 곡(谷), 민(民), 좌태(佐太), 산구(山口) 등 기촌의 11성 16인에게 숙녜의 성을 하사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료에 의하면 동한씨의 후예인 판상대기촌예전마려는 자신의 선조가 후한 영제의 증손인 아지왕으로서 대방군으로 이주해 살다가 일본으로 건너갔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판상씨(坂上氏)가 “선조의 왕족 성을 잃어버려 하급 사람의 비성(卑姓)을 받았다”라는 주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성’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자신의 출자를 후한의 황제에게 가탁한 것이다. 그들의 성은 원래 직(直)이었다. 그 후 천무(天武) 11년(682)에 연(連) 성을 하사받고, 천무 14년에는 그 전해에 개정된 8색의 성에 따라 기촌으로 바뀌었다. 8색의성에서상위그룹은 진인(眞人), 조신(朝臣), 숙녜(宿禰), 기촌(忌寸) 순이고, 기촌은 대부분 도래계 웅족과 국조(國造)들이 대상이었다. 이때 판상씨를 비롯한 동한씨의 동족인 11씨 16인이 상위의 숙녜를 하사받았다. 실로 1세기 만에 이루어진 씨족의 승진이었던 것이다. 선조의 출자를 중국 황제라고 주장하는 일은 씨족의 지위를 높이는 데 유리하다는 현실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기 상표문에서 대방군에 나라를 세우거나 대방군으로부터 떠날 수 밖에 없던 사정을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압박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대방군은 후한 말 내란기에 요동의 공손씨가 낙랑군의 남쪽에 설치한 군으로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표적이 되어 온 지역이고, 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는 시기에 소멸하였다. 따라서 상표문의 내용은 8세기 당시 역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으면 나오기 어려운 발언이다. 그러나 아지왕의 대방군 거주설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사기』, 『일본서기』 가 편찬된 8세기 초에는 동한씨의 선조인 아지사주의 본거지가 확인되지 않는다. 이후 8세기 말 『속일본기』 단계에 와서 동한씨의 후예지족인 판상대기촌예전마려의 발언에 의해 비로소 중국의 후한설이 알려진다. 이것은 판상씨와 그 동족이 높은 성을 하사받기 위한 작위적 발언으로서 이전에는 그러한 전승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인다. 즉 중국의 왕조와 황제명을 빌려 자기 조상의 출자를 부각시켜 높은 성을 하사받아 현실의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속군서류종(續群書類從)』 에 수록된 〈판상계도(坂上系圖)〉에 인용된 『신찬성씨록』 일문(逸文)에는 그의 선조가 한(漢) 고조(高祖)로 되어 있어 또다시 앞서 편찬된 『속일본기』 의 후한 영제설을 능가하는 개변을 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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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진기촌(木津忌寸; 기츠노이미키) 자료번호 : ss.k_0002_0020_0010_0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