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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

이복부숙녜(伊福部宿禰; 이호키베스쿠네)

이복부숙녜(伊福部宿禰; 이호키베스쿠네)
 미장련(尾張連; 오하리노무라지)과 조상이 같으며, 화명명(火明命; 호아카리노미코토)의 후손이다.
 
【주석】
1. 이복부숙녜(伊福部宿禰)
이복부숙녜의 원래 씨성은 이복부련(伊福部連)이었다. 천무천황 13년(684) 12월에 이복부련은 숙녜를 사성받았다. 이복부(伊福部; 이호키베)는 오백목부(五百木部; 이호키베), 여성부(廬城部; 이호키베)로도 표기한다. 오백목부는 경행천황의 아들 오백목지일자명(五百木之日子命)을 위해 설치한 부민일 가능성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이복부련은 이복부를 관할한 씨족이었을 것이다.
육국사에서 이북부련을 살펴보면 『일본서기』 웅략 3년 하4월조에 처음 보인다. 웅략천황의 딸로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재궁(齊宮)이던 고번황녀(栲幡皇女)의 탕인(湯人) 여성부련무언(廬城部連武彦; 이호키베노무라지타케히코)이 황녀를 강간하였다는 무고를 당하자 그의 아버지 지거유(枳莒喩)가 여성하(廬城河; 이호키노카하)에서 죽였고, 황녀도 억울함을 호소하고 자살하였다고 적고 있다. 여성하는 현재 삼중현(三重縣) 일지군(一志郡) 백산정(白山町) 가성(家城; 이에키) 지역이다. 이세 지역의 여성하 부근에 여성부가 설치되었고, 여성부련은 이 여성부를 관할하는 씨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여성부련씨는 안한천황 원년 윤12월조에서 여성부련지거유(廬城部連枳莒喩)의 딸 번원(幡媛)이 물부대련미여(物部大連尾輿)의 목걸이를 훔쳐서 춘일황후(春日皇后)에게 바친 것이 탄로 나자 지거유가 딸을 채녀(采女)로 바치고 안예국(安藝國)의 여성부둔창(廬城部屯倉)도 조정에 바쳤다고 적고 있다. 『화명유취초』 에 보이는 안예국 좌백군(佐伯郡) 이복향(伊福鄕)이 여성부둔창이 있었던 곳일 것이다. 이후 이복부련씨는 천무(天武) 13년 12월에 숙녜를 사성받는다. 그 후 육국사에서 이복부련씨는 『일본삼대실록』 한 군데에 보이는데, 정관(貞觀) 4년(862) 6월 15일조에서 파마국(播磨國) 읍보군인(揖保郡人) 답생생[答笙生, 또는 아악료(雅樂寮) 답생생(答笙生)인 무위(無位) 이복정(伊福貞)]에게 본성(本姓)인 오백목부련(五百木部連)을 사여했다고 적고 있다.
한편 이복부숙녜씨는 『속일본기』 에서 신호경운(神護景雲) 3년(769) 10월 30일 갑자에 이복부숙녜자녀(伊福部宿禰紫女)가 외종5위하를 사여받고, 보귀(寶龜) 3년(772) 1월 갑신 3일에 이복부숙녜모인(伊福部宿禰毛人)이 외종5위하를 사여받았다. 『속일본후기』에서 이복부숙녜영씨(伊福部宿禰永氏)가 승화 9년(842) 1월 임인 7일에 외종5위하를 사여받고, 이복부숙녜광우(伊福部宿禰廣友)가 승화(承和) 13년(846) 1월 기유 7일에 외종5위하를 사여받았다.
고문서에서는 천평(天平) 20년(748) 8월 이래 「사경등상일장(經師等上日帳)」(『대일본고문서』 10-337 등)에 이복부숙녜남의(伊福部宿禰男依)가 보이고, 천평승보 6년 「대반야경권제474오서(大般若經卷第四百七十四奧書)」(『대일본고문서』 25-177)에 이복부숙녜종마려(伊福部宿禰種麻呂)가 보인다.
2. 미장련(尾張連)
미장련에 대해서는 좌경 신별(하) 「미장련」 조(401) 참조.
3. 화명명(火明命)
화명명에 대해서는 좌경 신별(하) 「미장숙녜」 조(40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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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부숙녜(伊福部宿禰; 이호키베스쿠네) 자료번호 : ss.k_0002_0010_0010_0060